나의 이야기

홀가분한 삶

아이루다 2019. 2. 8. 08:19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 중에 한 명이 집에 가야 한다고 한다. 엄마와 약속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가봐야 한다고 하기에 다른 친구들은 아쉽지만 그 친구를 보내준다. 그 자신들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수 있음을 알고 있고, 또 삶은 언제나 놀고 지낼 수만은 없다는 점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기에 그렇다.

 

그래도 이렇게 집안 일 때문에 먼저 가는 것은 괜찮다하지만 이런 경우와 다르게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에 가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는 아쉬움 말고 또 하나의 감정이 생겨난다. 그 감정은 보통 배신감이라고 칭해진다혹은 질투심이 될 수도 있다더군다나 그렇게 떠난 친구가 그 친구들 무리와 더 재미있게 놀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게 되면 마음 속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본능적인 절망이다.

 

사람은 누구나 더 행복한 쪽으로 움직이기에, 만약에 어떤 친구가 나보다 다른 친구들과 놀 때 더 행복하다면, 나는 그 친구에게 있어서 자투리 시간에만 만나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슬픈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불안한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가 생기게 되면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그 친구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더욱 더 잘하는 방법이다. , 상대가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더 행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선물을 해주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 친구를 만나려고 한다그러면 보통 의리 때문에라도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집착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상대가 더 답답함을 느끼기에 아예 멀어져 버릴 수도 있다. 누군가를 의리 때문에 의무감으로 만나는 일은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기에 그렇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방법이다. , 상대가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면 자신도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 그만이다. 이렇게 되면 서로 쿨해진다. 만나면 좋고, 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것이 없다. 언제든지 다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친구 무리를 늘려 놓으면 오히려 이제는 서로 만나는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진다. 어느 모임에 가서도 오랫동안 있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른 모임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기 자신은 남들에게 아쉬운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좋은 일로 여겨진다. 남들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렇게 관계를 맺는 것은 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잘 사귀는 것은 매우 갖기 힘든 능력이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좋은 매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첫 번째로 외모적 매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예쁘고 잘 생긴 사람들은 사람 사귀기가 쉽다. 특히 진입이 쉽다. , 처음 보는 사람과 좋은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다. 잘 모를 때는 그냥 웃어주기만 해도 사람들은 외모가 좋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외모의 매력은 점점 떨어진다. 익숙해지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이제 또 다른 능력이 필요해진다. 그것은 바로 모임을 재미있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엔 다양한 수단이 있는데,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 행동이 유별나서 흥미를 끄는 사람말은 별로 없지만 한 마디를 하면 주변이 빵 터지게 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 등등이 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외모의 매력을 훌쩍 뛰어 넘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좋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더해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나 전문적 영역 등도 도움이 많이 된다. ,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경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든다.

 

더불어 긍정적인 성격좋은 반응, 잘 웃는 성격도 중요하다. 지식이 많거나 행동력이 있는 것도 필요하다. 아무튼 사람들마다 그 선호도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잘날수록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다. 아니, 원래 잘났다는 말 자체가 바로 매력이 많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이렇게 타고난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물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다. 아니 많이 만날 수는 있지만 어디에서나 환영 받고 인기가 있는 사람이 되기가 힘들다.

 

그리고 소수의 매력적인 사람들과 다수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이후 갑과 을의 관계로 이어진다.

 

다수인 을의 입장은 늘 아쉬운 입장이기에 결국 관계에서 주로 손해를 담당하게 된다. 또한 그나마 갑이 의리를 지켜서 관계가 유지될 수는 있지만, 결국 갑이 배신을 하고 떠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이때 을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게 된다.

 

이렇게 자주 상처를 받게 된 을은 그것이 너무 힘들어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은 바로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계는 유지하지만 거기에서 인간적인 부분은 모두 제거하려고 한다. ,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해서 만나거나,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고 행복해서 만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과거에 모두 그런 태도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기에 그렇다.

 

그래서 관계는 유지를 하지만 그 모든 관계를 단순히 이득과 손해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한다. , 인간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손해가 될지만 가지고 상대를 판단한다. 그렇게 되면 관계에서 감정이 사라지기에 관계가 주는 이득은 챙기면서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의 근본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또 다시 상처를 입을까 봐 그렇다. 또 다시 그 사람이 자신을 이용해 먹은 후 결국 떠날까 봐 그렇다. 그래서 사전에 자신을 철저하게 보호한다. 모든 관계를 이성적으로만 맺고 자신의 내면에 그 누구도 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고립이긴 하지만 오히려 삶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 수 있다. 그 누구에게도 집중하지 않고, 그 누구와도 진지하게 관계를 맺지 않고, 오직 이득과 손해의 입장에서 보기에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질 수 있어서 그렇다. 이런 관계들은 끈끈하지 않고 아쉬움도 없기에 늘 건조하고 쿨하게 이어진다.

 

사람들을 만나기도 쉽다. 자신이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이해할만한 사람인지, 자신을 이해해 줄만한 사람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으며, 자신은 그 대가로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 만 중요할 따름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 온 사람들은 모두 서로에게 영업사원이 되고 만다. 처음 만나도 수년을 만난 사이처럼 살갑게 굴고, 몇 번을 만나도 처음 만난 사이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보게 된다이렇게 관계의 연속성 여부는 사라지고 매일 새롭게 맺어지는 관계처럼 끊어진다. 하지만 각자의 태도는 그렇지 않다. 서로는 여전히 연속적 관계인 냥 서로에게 표현한다. 서로가 거짓임을 알면서도 자신을 속이고 상대를 속인다.

 

관계는 아주 단순해지고 만다. 그래서 얻는 것은 이득과 안정이다. 그래서 얻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이다.

 

사람들은 상처를 입는 것보다 차라리 외로움과 고독을 얻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섬이 되어간다. 누군가의 흔들림이 최대한 전달되어 오지 않도록 점점 더 멀어지려고 애쓴다.

 

행복한 것만 어울리려고 하고슬픔에는 눈을 돌린다. 물론 의례히 이뤄지는 형식적 예의는 잊지 않겠지만 말이다그래서 관계는 마치 결혼식에 참석해서 돈 봉투를 내고 밥을 얻어 먹고 오는 절차와 비슷해지고 만다.

 

결국 사람들은 외로워지지만 행복하고 싶기에 스스로 그것을 부정한다. 외롭지 않다고 한다. 고독하지 않다고 한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 자신도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인생은 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어린 시절 다 함께 놀았던 기억이 남아 있기에 그렇다. 그때 분명히 충만함을 경험했기에 그 기억을 절대로 잊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부정된다.




 

가끔 그 고립감을 견디다 못해서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타난다.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심하면 자살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과 자신은 전혀 다르다고 부정한다.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자위한다. 하지만 가끔 뜬금없이 밀려오는 외로움 때문에 눈물이 난다. 슬픈 노래를 듣다가, 영화를 보다가, 소설을 읽다가 눈물이 난다. 그렇지만 그 눈물조차도 그것이 텅 빈 내면에 고인 물이 밖으로 흘러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 빈 공간을 채워 줄 누군가가 필요해서 그렇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아예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외로움과 고독에 지치면 오히려 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때 홀가분하다고 느낀다. 당연하다. 모든 관계를 이성적으로 이득과 손해 입장에서만 맺고 살아왔기에 관계 자체가 힘들고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과 같다.

 

관계는 하고 싶은 일이며 행복한 일이어야 한다. 하지만 의무감으로 이득 때문에 하고 살았기에 어쩔 수 없이 지치고 만다. 그러니 홀로 여행을 떠나면 그런 의무감이 사라지면서 홀가분한 것이다. 그리고 뭔가 자신이 치유된다고 느낀다.

 

원래 관계를 통해서 충만함을 느낀 사람들은 홀로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 오직 관계 속에서 고립되고 외로움을 느낀 사람들이 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착각에 빠진다. 고립이 되었지만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다. 관계로부터 자신이 능동적으로 멀어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한 것일 뿐이다.

 

결국 고립되고, 외로워지고, 허전해진 채 늙어간다. 한때 젊은 시절에 많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아서 살았던 시절에 어쩔 수 없는 생겨난 상처를 평생 동안 치유하지 못한다나이를 좀 먹고 나면 그랬던 시절이 참 별 것도 아닌 것에 상처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음에도 어린 시절에 뜨거운 불에 크게 데인 후 불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관계 그 자체를 거부하려고 한다.

 

나이를 먹고 나면 세상 일에 대해서 이해도가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아무리 뜨거운 불이라도 적당한 거리에만 있으면 충분히 따뜻할 수도 있는데 데일까 봐 그냥 춥게 지내는 것을 선택하고 만다.

 

그러다 보니 우연히 만난 누군가가 진심 어린 손을 내밀어도 의심스럽기에 경계하고 쉽게 손을 맞잡지 않으려고 한다. 분명히 텅 빈 내면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스스로 거부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고립된 채 자신처럼 고립된 사람들의 말과 글을 들으면서 감성을 공유하고 동의를 한다. 마치 그것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착각이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이기에 그렇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가장 안전하기에 그렇다. 안전은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조건 중에서 가장 필수적이다. 누구나에게 집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관계는 안정과 재미, 이 모두를 준다. 집은 안전함만, 영화는 재미만 준다. 이 세상에 안정하고 재미있는 것은 무척 드물다. 왜냐하면 안전할수록 자극이 없기에 지루해서 그렇다. 반대로 불안할수록 흥미와 재미는 생겨나지만 결국 크게 다칠 수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가 그것의 극단적 예가 된다.

 

그런데 관계만큼은 이 둘을 모두 준다. 따듯한 가족 모임에 모여서 서로 윷놀이 한판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크게 웃으면서 즐거워한다. 그 순간 안전함과 즐거움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집단 속에 속해서 온전히 그 안에 녹아들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주고 서로가 서로를 재미있게 해주면 얻을 수 있는 감정이다. 더해서 이득은 부록처럼 따라온다. 그러니 관계가 가진 장점은 그 어떤 것보다도 대단하다.

 

하지만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홀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혹은 자신과 잘 맞는 짝을 찾아 둘만의 세상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저 그것은 고립된 둘일 뿐이다. 물론 하나보다는 낫지만 말이다.

 

그런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잊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했던 기억을 말이다. 그런 것들은 어리고 순수할 때나 했던 어리석은 행위가 되고 말았다. 스스로 을이 되는 것이고, 상처를 만들어 내고 마는, 하면 안 되는 것들이 되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공허함이 결국 관계의 부재로부터 오고 있음은 자각하지 못한다. 어른이 된 후 단 한번도 그런 충만함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외로움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어서 그렇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고 다닌다. 누군가와 깊게 관계를 맺지 말라고 말이다. 그것이 너의 단점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더 나은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솔깃하게 된다. 당장 그것이 더 나아 보이기에 그렇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조언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렇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 같아서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자 하는 것도 결국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 , 불안해서 그렇다는 뜻이다.

 

관계 속에서 충분히 안전해지고 나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짓이다. 김치 하나에 밥을 먹은 사람이라도 충분히 배가 부르면 아무리 좋은 소고기를 구워줘도 먹지 못한다. 그래서 소고기가 맛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배고픔이다.

 

이미 충분히 안전해진 사람들은 더 나은 관계를 맺을 필요를 못 느낀다. 관계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떠나 홀로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 홀가분해질 필요도 없고, 스스로 고립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삶이 어느 시기가 오면 주변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자신이 관계를 어떤 목적에서 맺고 있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여전히 이득과 손해라면 절대로 내면의 텅 빈 공허함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그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잘 살펴보면 따듯하게 손을 내밀만한 보석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 역시도 상처 입었기에 자기 자신과 다를 바 없지만, 그 사람 역시도 고립되어 있고 공허함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진심을 다해 손을 내밀면 상대도 손을 맞잡아 줄 것이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절 서로 편지를 주고 받던 친구들처럼 말이다. 그것을 왜 어른이 되면 멈출까? 상처 때문이다. 편지를 주면 받고 싶어서 그렇다. 자신이 두 장을 쓰면 상대도 최소한 두 장을 써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그리고 그때는 어리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알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편지 두 장은 한 시간이면 쓰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주일을 써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저 과일을 답례로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동일하게 상대를 향한 마음이다. 무엇을 주고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어른이 되었으니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이와 어른의 차이이다. 한끼 식사에 담겨진 의미도 어른이 되어서야 아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떠한 기대도 없이 주는 것이다. 무척 힘들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면 된다. 주는 즐거움도 있고, 줬다고 생각하기에 안전하다고도 느낄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착각이라고 해도 말이다.

 

원래 위기에 닥치면 도움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난다. 정말로 믿었던 친구들은 등을 돌리는데 예전에 단 한 번 우연히 스치듯 도움을 준 사람이 나서주는 것이다. 관계는 이렇게 예상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꾸준히 주변에 잘하고 사는 것이다. 이득과 손해가 아니라 진심을 다해서 말이다.

 

그러면 우연히 누군가의 마음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이 자신의 빈 내면을 채워 줄 것이다. 그리고 자시도 또한 상대의 빈 공간을 채워줄 수 있다. 그렇게 서로가 충만해지고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시작하지 못한다. 아니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잊었기에 그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삶은 혼자 사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최대한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이라고 믿는다. 결국엔 많은 돈을 쥐고도 공허함과 두려움으로부터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내린 삶에 대한 정의가 되고 만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 조언으로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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