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이야기들

고구마 동맹

아이루다 2018. 12. 7. 08:39

 

며칠 전부터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새벽엔 영하, 낮에도 5도를 채 넘지 못한다. 더군다나 오늘 아침엔 영하 10도라고 한다.

 

며칠 전에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이라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가는 길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서 타고, 오는 길엔 좀 더 걸은 후 지하철만 타고 온다. 그래서 오는 길에는 약 20분 정도를 걷게 된다.

 

그날도 많이 추웠기에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장갑까지 낀 채로 걸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앞에 과일을 파는 노점상과 양말 등을 파는 노점상이 보였다. 노점상에도 단계가 있는데, 그 노점상들은 그야말로 길바닥에 물건을 쌓아 놓고 파는 작은 규모의 노점상이었다. 그래서 누가 저기에서 물건을 살까 싶기도 한 노점상이었다.

 

그리고 매주 걷는 길이라서 나름대로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제는 뭔가 좀 달랐다. 원래 두 노점상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어제는 딱 붙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날씨가 꽤나 춥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분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마도 얼마나 추울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조금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생각과는 달리 그 두 분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그리 추운 날씨에도 말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왜 두 노점상이 그리 딱 붙어서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도 이해가 갔다.

 

일단 두 분은 앉아있었는데 주변을 커다란 박스 같은 것으로 둘러서 바람을 막고 내부의 온기가 밖으로 빠져 나가지 않도록 해두고 있었다. 물론 위는 뚫려있지만 그럼에도 추위는 한결 덜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커다란 박스로 인해서 그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발 밑에 뭔가 따뜻한 난로 같은 것을 둔 모양이었다.

 

내가 그런 상상한 것은 두 분이 각각 손에 쥐고 있는 고구마 때문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노랗게 잘 익은 군고구마 말이다.




 

두 분은 한껏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고구마를 먹고 계셨다. 그리고 그 순간 오히려 내가 그분들이 부러웠다. 더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내 예상이기 하지만, 두 분의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분은 그 노점 상의 일이 아니라면 서로 만날 일도 없는 분들일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한 분이 그만두면 그냥 끊겨 버릴 인연일지도 모른다. 원래 사람은 힘들 때 만난 사람과 인연을 그리 오래 가져가려고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바로 옆에서 장사를 하고 있더라도 매일처럼 그날 나오면 좋고 나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약간 궁금한 정도, 그 정도의 인연일 것이다.

 

서로 경조사를 챙길 일도 없을 것이고, 보통 사람들처럼 세사한 자기의 마음을 털어 놓기엔 노점상이란 공간이 가진 그 무게감을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 그 추운 날 그렇게 같이 모여서 박스로 주변을 두르고 잘 익은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활짝 웃고 있는 그 두 분의 모습은 이 세상 어떤 인연보다 더 따뜻해 보였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 등을 서로 기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꼭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경조사에 참가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속상한 일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어떤 이유로 내 곁에 있게 된 사람, 심지어 그 사람 이름을 몰라도 상관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몰론 그 이유가 사라지면 언제라도 헤어지게 되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필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소중하다. 비록 서로가 서로에게 금세 잊혀질 수도 있지만, 겨울 날의 추위가, 하루 종일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지루함이, 군고구마를 먹는 즐거움이 그 순간만큼은 둘을 그 어떤 관계보다도 더 끈끈해 보이게 해준다.

 

오늘도 몹시 춥다. 그 두 분은 아마도 오늘도 좌판을 깔고 양말과 과일을 팔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낮 동안 추위를 막기 위해서 박스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분 중 한 분은 나눠먹기 위해서 따뜻한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섣불리 장사가 잘되었으면 한다든가, 앞으로 행복하셨으면 한다든가 하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이 겨울 내내 그 두분 중 한 분이 아프거나 일이 있어서 홀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겨울을 지낸 후 따뜻한 봄이 오면 예전처럼 또 다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아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중하다는 것, 그것은 그 존재 자체가 가진 중요성, 가치, 의미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저 나에게 너무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플 땐 의사가, 강도가 들었을 땐 경찰이, 불이 나면 소방수가 가장 소중하다. 그런 일들이 사라지면 그런 인연은 금세 잊혀지지만, 그 순간 그들이 그 누구보다도 소중하다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 일이 삶이라면 어떨까? 그래서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은 누구일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내 고구마 동맹이 누구인지 말이다.

 

 


'소소한 이야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년을 보내며  (0) 2018.12.29
어머니와 동태찌개  (0) 2018.12.16
겨울비  (0) 2018.12.04
두 계절의 시간  (0) 2018.09.06
30대 후반 이후로 조금 낫게 사는 법  (0) 2018.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