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이야기들

겨울비

아이루다 2018. 12. 4. 07:50

 

춘우세부적(春雨細不滴), 야중미유성(夜中微有聲).

 

봄비가 가늘어서 물방울을 맺지 못하더니 밤이 되고 나니 소리가 난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인 듯싶은데, 이런 시조를 배운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한문을 알아내기 위해서 찾아보니 그 유명한 정몽주님이 지은 시조라고 한다.

 

암기력이 남들에 비해서 유난히 떨어지는 내가, 지금 이 나이가 되도록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시조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앞부분만 기억한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문구만 들으면 한적한 오두막집에 어둠이 내리고,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방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하게 빛나는 호롱불빛과 바람 한 점 없이 내리고 있는 비의 침묵이 떠오른다.

 

그냥 너무 가늘어서 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봄비가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밤에 물방울이 커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밤의 고요함으로 인해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 사는 곳은 시끄럽기 그지없는 서울이다. 그리고 6층이나 되는 곳에서 산다. 지면과 거리가 멀고 더해서 겨울이기에 모두 닫아 놓은 베란다 문들로 인해서 밖에서 나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비가 오는 날이면 새벽녘에 그 고요함 속에서 물방울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아마도 그 어딘가는 어느 집에 설치해 놓은 에어컨 실외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몇 십 년 전에 읽었던 시조 한 구절을 떠올린다. 그 시조 속의 비는 겨울비도 아닌 봄비인데 말이다.

 

이 시조를 지은 선비 정몽주는 나처럼 컴퓨터 자판을 쳐서 그 글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당연히 커다란 붓과 진하게 갈아 놓은 먹, 그리고 하얀 한지를 통해 그 시조를 썼겠지만, 아무튼 깊은 밤 중에 들려오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다가 이 시조 구절이 갑자기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자동차도 없고불빛도 없기에 해가 지면 깜깜하기 그지 없었던 그 시절에 무엇을 느꼈을지 상상하긴 힘들다. 그런데 시대를 초월해서 같은 사람이라는 존재로써 그리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제 12월이다. 공식적으로 겨울이고, 지금부터 내리는 비는 겨울비가 된다. 유명한 노래도 있다. 왜 겨울비가 슬픈 노래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정적인 가사와 아련한 운율이 기억이 난다.

 

예전에 영월에 집이 있을 때 그곳은 정말로 고요했다. 특히 겨울이 되면 벌레 소리조차 다 사라져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때 나와 아내는 비가 아닌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예전에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내 기억은 그때가 처음이다. 싸락눈이 아닌, 소복소복 내리는 함박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발걸음만 멈추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그 장소이기에 들릴 수 있는 소리였다.

 

그때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잠시 동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눈이 내리는 소리에 빠져들었다.

 

요즘은 옛날과 달리 맑은 날이 좋다. 별 사진을 찍으면서, 자연을 찍는 사진을 취미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변화이다. 그래서 가을처럼 해가 좋은 날이 많으면 그리 기분이 좋다. 딱히 기분 좋은 일이 없어도, 밖에 나가서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또 이렇게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면 그것도 좋다.

 

나는 요즘 장난이 늘고, 표정이 다양해졌다. 그리고 아내도 그렇다고 한다. 아마도 행복해져서 그럴 것이다하지만 내가 사는 환경이 뭔가 변한 것은 없다. 그저 내가 그 환경을 바라보는 시점이 조금 변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삶은 많이 달라진다.

 

그 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감사한 것들이 되고, 감사한 것들이 다행스러운 것들로 변해간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어둡고 사나웠던 내가 후회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이 있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단지 누군가 과거의 나처럼 어떤 틀 안에 갇혀 있다면, 거기를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은 생긴다별 다른 노력도 없이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런 사람들의 행복을 통해서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인연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비록 성냥개비로 켠 불이라도 누군가에게 잠시나마 온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은 그 작은 불로 누군가 큰 불을 켤 수 있었으면 더 좋겠다.

 

그래서 다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딘가 눈이 가득 내린 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 그리고 그 끝에 길게 솟아오른 연통으로 하얀 연기라 피어 오르는 찻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거기에서 참나무 타는 향이 났으면 더 좋겠다. 그곳에서는 커피가 아닌 계란을 띄운 쌍화탕이라도 한 잔 마셔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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