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11. 새로운 봄

아이루다 2018. 11. 15. 07:55

 

".. 그래. 가족, 가족 말이야."

 

"그런데 가족이 뭔데?"

 

플라테네스가 질문하자 이름없는 개미의 얼굴엔 황당하다는 표정이 가득했고 잠시 후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을 했다.

 

"두 개미가 같이 사는 것, 그리고 아이를 낳고 사는 것, 그것이 가족이야."

 

"그래? 그럼 이곳에서 나랑 나랑 계속 같이 살면 가족이 되는 거야?"

 

"맞아, 그러면 돼."

 

"?"

 

"왜냐고? 정말로 네가 묻고 싶은 말이 ''인 거야? 다른 질문은 없어?"

 

"다른 건 별로 생각나지 않는 걸? 그러니까 왜 너랑 나랑 같이 이곳에서 살면서 가족을 이뤄야 하냐고."

 

"아니, 그런 질문 말고,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만약 같이 산다면 아이를 몇을 낳을 건지, 먹고 사는 일은 큰 문제가 없는지, 앞으로 삶의 계획은 어떻게 짤 것인지, 노후 대책은 있는지, 그런 것 물어봐야 하는 것 아냐? 그 많은 질문은 어디로 가고 너는 지금 왜 네가 나랑 같이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싶은 거야?"

 

".. 그런 질문들은 머리 속에 떠오르지도, 궁금하지도 않는 걸? 나는 그저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궁금해."

 

".. 그건.."

 

이름없는 개미는 또 다시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건?"

 

하지만 그는 결국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약간 화를 내 듯 대답했다.

 

"그냥.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건 질문에 어떻게 답을 낼 수 있겠어!"

 

"그냥 그러고 싶어서 내가 너랑 그곳에서 같이 살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뤄야 한다고?"

 

", 결국 얘기가 그렇게 되네."

 

이름없는 개미는 뭔가 좀 씁쓸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 뭔가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니까."

 

"그래, 그래도 이해라도 해줘서 고맙다."

 

정말로 고마운 것인지 전혀 가늠이 되질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말에 약간의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냥이야? 좀 더 생각을 해보면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플라테네스는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그러자 이름없는 개미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 너를 구해서 이곳에 데려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혼자 살면서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런 충동적인 생각이 들더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기대가 생겨났지.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 계속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온 거야. 물론 너의 질문엔 제대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내 머리 속에는 이미 우리가 함께 살면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계획까지 다 세워놨다고."

 

"그렇구나.. 그렇지만 난 그럴 수 없는 걸. 나도 역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것을 반드시 하고 싶거든. 아무튼 미안해. 누군가가 품은 이루고 싶은 희망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니까 말이야."

 

".. , 어쩔 수 없지. 내가 너무 급하게 말한 것도 있고. 그런데 제안 하나만 하면 안될까?"

 

"무슨 제안?"

 

"일단 겨울은 이곳에서 보내는 것, 그리고 봄이 되면 그때 가서 최종적으로 나의 제안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은 어때?"

 

"봄이 될 때까지 여기에 있으라고?"

 

"그래. 지금 나가면 무척 위험하기도 하고, 봄이 올 때까지 여기에서 나랑 지내다 보면 너의 생각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어느 정도 일리도 있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해도 너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당연하지. 난 이미 너랑 가족을 이루고 죽을 때까지 함께 살 계획까지 다 세웠는걸?"

 

"정말로 대단하다. 아무튼 그럼 그 제안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볼게. 잠시 나에게 시간을 줘."

 

그 후로 또 다시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그 사이 플라테네스는 고심 끝에 이름없는 개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이름없는 개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짓는 것에 찬성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런데 마땅한 이름이 생각나질 않아."

 

플라테네스는 정작 이름을 지으려 했지만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답답했다. 자신도 바네사처럼 그렇게 쉽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뭐 하러 이름 따위를 지으려고 해."

 

이름없는 개미는 플라테네스가 고민하고 있자 이때다 싶은지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름은 있어야 해.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존재의 이유가 될 수도 있잖아."

 

플라테네스는 자신이 일개미 #3470으로 불렸던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름이라고 믿었지만 그 이름엔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저 단순한 순서 번호에 불과했던 시절 말이다. 하지만 플라테네스란 이름을 짓고 나서 뭔가 달라졌다. 물론 그것이 꼭 이름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름을 짓고 나서 확실히 존재적 고유함에 대한 인식이 커졌다고는 할 수 있다그리고 존재로써 고유함, 그것만큼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을만한 것도 드문 것이 아닌가?

 

"이름 따위가 어떻게 그런 것이 될 수 있어?"

 

"될 수 있어. 난 그렇게 믿어."

 

"그래, 그럼 아무렇게나 지어 바. 아하, 나도 방금 아주 좋은 생각이 났는데, 내 이름을 아무렇게나 이름 지은 개미, 그리고 이름이 없는 개미, 이 둘을 모두 함축해서 '아무개' 라고 지으면 어때?"

 

"아무개?"

 

"그래,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은 개미라는 뜻도 되고, 이름이 없다는 의미도 되잖아. , 그냥 생각난 건데 좋다.. 넌 어때?"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아무개라고?"

 

"그래, 아무개. 나 그냥 이걸로 할래. 네가 딱히 의견이 없다면 말이야."

 

이름없는 개미는 뭔가 몹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플라테네스는 단어 그 자체도 딱히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말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는 의도도 거의 납득이 되질 않았기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좀 별로인 것 같은데?"

 

"그럼 뭔가 좀 괜찮은 이름을 제안해 보던가. 지금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 말고 말이야."

 

이름없는 개미가 이죽거렸다.

 

".. 그래, 그럼 일단 그렇게 하자. 그런데 그렇게 이름을 짓는 것이 좋아?"

 

"좋지 그럼."

 

정말로 좋은 것인지, 아니면 뭔가 속이 꼬여서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름없는 개미는 스스로 이름을 아무개로 정했다. 플라테네스는 나중에 더 나은 이름이 생각나면 그때 제안을 하기로 하고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

 

"그래, 아무개야. 그럼 나는 겨울 동안 여기에서 뭘 하면 되지?"

 

"나랑 가족이 되는 예행 연습을 하면 되지."

 

"어떻게 해야 하는데?"

 

", 지금까지 한 것과 별로 다를 것 없어. 때 되면 같이 밥 먹고, 할 일 있으면 같이 하고, 시간 나면 이렇게 담소도 나누고 하면 돼."

 

"그것이 가족이야?"

 

"아니.. 사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지."

 

"뭔데?"

 



"그게..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 거야. 우리들 사이에 태어날 어린 개미들을 낳는 것. 물론 그 개미들을 낳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암개미인 너만이 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아이 개미를 낳는다고?"

 

"그렇지. 원래 모든 암개미는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럼 내가 여왕 개미가 되는 거야?"

 

플라테네스는 순간 몹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안 했으면 해. 그냥 너와 나 그리고 몇몇의 아이들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게 여왕개미와 뭐가 다르지?"

 

"여왕개미는 결혼 비행을 한 후 몸 안에 수 많은 어린 개미를 낳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 그래서 죽을 때까지 계속 개미알을 낳고, 그 개미들이 자라서 왕국을 이루지. 모든 개미왕국이 공통되게 거치는 과정이야. 하지만 당연히 그 사이 수개미들은 결혼 비행 후 죽기 때문에 결국 여왕개미는 어떠한 가족도 이루지는 못해. 왕국은 이루지만 가족은 없는 것이지. 하지만 우리는 달라."

 

"네가 있어서?"

 

"그렇지. 일단 내가 있지. 그리고 아이들도 많이 낳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뭘 의미하는데?"

 

"이미 말했잖아. 가족이라고."

 

"그러니까 가족이 의미하는 것이 뭐냐고."

 

".. 그러니까 가족은.. 뭐라고 해야 할까.."

 

아무개는 여전히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너도 잘 모르는구나?"

 

"그게 아니라, 사실 나도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이라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서 그래."

 

"그래? 누군가 너에게 가족을 이뤄야 한다고 했어?"

 

"꼭 그러 뜻은 아니지만, 만약 무리에서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면 최소한 가족은 이루는 것이 좋다고 했어. 물론 그 말을 해준 존재는 개미는 아니었을 거야."

 

"왜 가족을 이뤄야 한다고 했을까?"

 

"지금 막 생각났는데, 가족은 서로를 보살펴 주는 것인 것 같아.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네가 너를 처음 만났던 날, 네가 많이 아팠잖아? 그때 내가 널 보살펴줬잖아. 물론 가족으로써 보살펴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누군가 힘들고 위기 상황에 놓이면 옆에 있는 존재가 그를 보살펴 주는 것이지. 그러면 훨씬 더 삶이 안전해지지 않을까?"

 

플라테네스는 아무개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네. 혼자 있는 것보다 둘이, 아니 좀 더 많이 모여서 사는 것이 안전하긴 하겠다."

 

"맞아. 그러니까 가족을 이뤄야 한다고. 그리고 그전엔 혼자서 지낼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너와 어느 정도 같이 생활을 해보니 누군가 말동무가 있다는 것도 정말로 좋은 것 같아. 예전에 그냥 하루하루가 매일 똑같아서 아침에 눈을 떠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뭔가 기대감이 생겨.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고, 뭔가 재미난 일이 생길 것 같거든."

 

"그래? 나는 별로 그렇지 않은데.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 눈이 녹을까 하는 생각만 들어."

 

"넌 그러니?"

 

플라테네스의 반응에 아무개는 잠시 좀 실망한 듯한 말투도 대답을 했다.

 

"왜 그래?"

 

"아냐. 그냥 마음 한 구석이 좀 아파. 왜 그런지는 모르겠네."

 

"그래? 어디 아픈 거야?"

 

"그건 아냐. 그냥 뭔가 좀 쓸쓸하다고 해야 하나? 너도 나처럼 아침에 그런 기대감 속에서 눈을 떴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왜 그런 기대가 생길까?"

 

"글쎄, 그것은 나도 모르겠다. 뭐 아직도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한참 남았으니 나중엔 알게 될지도 모르지."

 

그 후로 시간은 플라테네스에겐 천천히, 아무개에겐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둘은 그 사이 좀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에게 좀 더 깊은 정을 느끼게 되었다그 동안 아무개는 가끔 성질을 부리거나, 퉁명스럽긴 했지만 플라테네스에게 정말로 잘했다. 그리고 그 사이 봄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제 눈이 좀 녹았으려나?"

 

플라테네스가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 지금이라도 떠나려고?"

 

"아니, 그냥 궁금해서."

 

플라테네스도 지난 겨울 동안 아무개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왜 아침에 기대를 품고 눈을 뜨는지, 그리고 가족을 이룬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도 나름대로 중요한 것임을 이해하자 생겨난 변화였다. 그래서 요즘은 쉽게 대놓고 밖으로 나가서 자신이 하던 여정을 계속 하겠다는 표현을 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서 아무개가 상처를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자신도 아무개의 제안처럼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도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못들은 척 했긴 했지만 말이다.

 

"아직 멀었어. 내가 어제 올라갔다 왔는데, 아직도 눈이 가득 이야."

 

"그래? 언제나 눈이 다 녹으려나.."

 

"아직 멀었다니까!"

 

아무개는 갑자기 신경질을 내면서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다. 플라테네스는 이미 이런 일을 몇차례 겪은 적이 있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 동안 저렇게 삐쳐서 나가고는 하루가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웃으면서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랬다

 

플라테네스는 아무개가 화를 내고 사라진 쪽에서 시선을 떼어서는 천천히 방의 한쪽 구석에 겨울 내내 처박혀 있었던 자신의 낡은 짐 쪽으로 옮겼다아무개는 분명히 아직 멀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 얼마간의 시간만 지나면 하얀 눈이 녹고 그 밑으로 드러나는 진한 갈색의 낙엽들 사이로 연하고 예쁜 연두색의 새싹들이 돋아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여기를 떠날 때인 것이다.

 

하지만 머리는 복잡했다. 매번 떠난다는 말만 나올라치면 저렇게 삐치는 아무개와 어떻게 최대한 상처 없이 이별을 할 수 있을지 여부와 자신도 여기에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 그리고 막상 나가서도 문제였다. 벌써 자신의 삶 중에서 일년이 지났다. 그러니 이제 겨우 이년의 시간밖에 없었다시간은 이렇게 쏜살같이 흐르고 있는데 자신이 품은 의문은 여전히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겨울의 그 수 많은 시간 내내 숱한 생각과 망상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무엇 하나도 명확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뭔가 의미 있는 답을 구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솔직히 말해서 생각하기도 힘든 두려움이었다.

 

"아직도 생각이 바뀌질 않은 거야?"

 

아무개가 또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꽤나 오랜만에 왔다. 그 사이 일주일이 꼬박 지났으니까 말이다. 플라테네스는 그가 한동안 오질 않자 먼저 찾아가 보려고 생각하다가 이내 포기를 했다. 예전에 그랬다가 아무개가 더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그냥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풀리는데, 그전에 억지로 화를 풀려고 하면 더 화를 내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그리고 찾아가면 괜히 상대의 기대감만 더 높이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걱정도 되었다.

 

"그렇다고 봐야지."

 

플라테네스는 대답을 하고는 슬쩍 아무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오늘은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면서 튀어나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소보다 훨씬 차분한 얼굴로 플라테네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래, 그럼 떠나야겠네."

 

"뭐라고?"

 

플라테네스는 갑작스러운 대답에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네가 떠나야겠다고. 그렇게 떠나고 싶어하니 내가 보내주는 수 밖에."

 

", 지금 하는 말 진심이야?"

 

"그래, 진심이야. 네가 그렇게 떠나고 싶어하니, 내가 보내주는 수 밖에. 그리고 밖에 눈도 다 녹았어."

 

"진짜로?"

 

"그래, 다 녹았어. 사실 이미 한참 전에 녹았는데 내가 그 동안 거짓말을 했어. 네가 떠나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랬어. 하지만 거짓말 한 것 전혀 안 미안해. 미안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계속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알려주는 거야."

 

"그래.. 그랬구나살짝 짐작은 했었어."

 

플라테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가지는 확실히 하자."

 

"?"

 

"네가 떠나는 것이 아니야. 내가 보내주는 거지."

 

"그게 달라?"

 

"그래. 달라. 그리고 나는 그러길 바래이제서야 좀 알겠어. 무엇인가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을 늘 품고 있어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란 점을 말이야그래서 누군가 정말로 소중하다면 그가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게 해줘야 해. 그러니 내가 너를 보내는 거야. 너를 더 넓은 세상으로 보내주는 것이라고. 절대로 네가 날 떠나는 것은 아니어야 해."

 

"그렇구나.."

 

플라테네스는 아무개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듣다 보니 그냥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간에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네가 떠나길 원하니 내가 보내 주는 거야. 그러니 오늘 당장 바로 떠나."

 

"오늘? 이렇게 갑자기?"

 

"겨우 마음 결심 굳혔으니까 지금 바로 떠나. 내가 떠날 준비는 다 해뒀어."

 

아무개는 말을 마치고는 플라테네스의 어떤 이견도 듣지 않겠다는 듯 서둘러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나가기 직전 잠시 몸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다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목이 매였지만,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했다.

 

"언제라도 돌아와. 나는 죽는 그날까지 여기에서 너를 기다릴 거야."

 

플라테네스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고는 대답했다.

 

"정말로 고마워. 이 모든 것이 다."

 

"고맙긴, 다 내가 좋아서 한 것인데. 그리고 내가 좀 알아봤는데, 이 숲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이 세상에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신비한 존재가 있대. 물론 그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들었어. 그 존재는 너무도 오랫동안 살아와서 모르는 것이 없데. 그러니 너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알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 존재를 꼭 한번 찾아가 봐. 아주 깊은 숲 속에서 검고 빛나는 돌로 된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어."

 

"정말로 그런 존재가 있대?"

 

플라테네스는 순간 마음 속에서 희망이란 단어가 커지는 것을 느꼈다. 나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는데, 아무개가 어떻게 그것까지 다 알아봐 준 모양이었다. 그는 새삼 아무개가 고마웠다.

 

"확실한 것은 아냐. 그래도 그냥 뜬소문만은 아닐 거야."

 

"그래, 정말로 고마워."

 

"그런 인사는 그만하고, 앞쪽에 나가서 먹을 식량 좀 싸놨으니 챙겨서 가. 지금 밖에 나가면 햇살이 아주 좋을 거야."

 

이별의 순간은 매우 짧았다. 아무개가 평소보다도 더 밝은 얼굴을 하고는 서두르는 바람에 플라테네스는 오히려 쫓기듯 밖으로 나왔어야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 아무개는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한 후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플라테네스는 갑자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서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곧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따뜻한 봄의 햇살이 피부로 느껴지고 봄을 상징하는 연한 녹색의 물결이 사방에 가득 피어나고 있는 느낌으로 인해서 그런 기분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둘은 지난 겨울 동안 맺어진 인연을 정리했다.

 

그렇게 첫 날은 새로운 봄을 만끽하는데 시간을 다 보냈다. 둘째 날은 숲의 깊은 방향이 도대체 어느 쪽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길에서 만난 여러 곤충들에게 길을 물었다그렇게 걸어갈 방향을 정하고는 셋째 날 역시도 기분 좋게 길을 걷었다. 그런데 점심으로 아무개가 챙겨준 마지막 식량을 다 먹고 난 후 갑자기 급격한 감정 변화가 찾아왔다그것은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상실감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점점 더 심해지더니 결국 폭발하듯 터져버렸다. 스스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갑자기 와락 눈물이 터졌다그리고 플라테네스는 크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를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 시간쯤 울고 나자 지난 며칠 동안 답답했던 속이 시원해졌다. 플라테네스는 그렇게 눈물이 마르고 어느 정도 감정이 정리가 된듯 하자 다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틀 전 이뤄진 아무개와의 이별은 그제서야 뜬금없이 홀로 마무리가 되었다.

 

 


'소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여정의 끝 - 1  (0) 2018.11.22
12. 잊자  (0) 2018.11.19
10. 정체성  (0) 2018.11.11
9. Winter is coming  (0) 2018.11.08
8. 옛날 이야기  (0) 2018.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