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7. 용병 개미단

아이루다 2018. 10. 31. 08:34

 

머리 속은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가득했지만, 가을이 도착한 산과 들은 그 의문들을 가끔은 잊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특히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을이란 계절을 경험하고 있는 플라테네스의 입장에서 초록빛으로 무성하던 산과, 그 초록빛의 근원이 되는 나무들이 매일 조금씩 노랗고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가을이 내린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을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매일 낮은 조금씩 짧아졌고 온도도 하루가 다르게 내려갔다. 특히 비라도 오고 나면 기온이 뚝 떨어져서 플라테네스가 낮에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몇 시간 남짓했다. 그럼에도 플라테네스는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이동을 하려고 했다. 덕분에 개미 굴을 떠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이 시점에 그는 출발지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지면에 붙어서 이동해야 하며 특별한 방향감각을 갖고 있지 못한 플라테네스 입장에서는 지금 자신이 어디쯤, 또한 출발지에서 얼마만큼이나 멀어졌는지 가늠할 길은 없었다. 그가 매일 걷는 숲길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기에 그곳이 그곳 같으면서도 또한 그곳이 아닌 듯 느껴져서 더욱 더 그랬다. 숲 안에서는 숲이 보이질 않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홀로 밖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많이 익숙해졌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점이었다그는 이제 잠자리를 준비하거나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꽤나 익숙해졌다. 단지 점점 더 추워지는 날씨와 그로 인해서 이후 다가올 겨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플라테네스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역시나 매국의 죽음이었다. 특히나 낮에 걸을 때는 힘들어서 잊고 있다가 잠이 들 때쯤이 되면 매국에 대한 기억이 밀려 오곤 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나 자신이 매국이 그런 결정을 하게끔 만든어떤 나쁜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후회까지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오래 생각한다고 해도 무엇 하나 명확히 풀리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밤 그렇게 복잡한 머리로 잠이 들었고 춥고 멍한 상태로 잠이 깨길 반복했다.

 

그래도 낮엔 좋았다. 그 동안 꽃을 찾아 다니는 나비와도 대화를 나눴고, 자신이 얼마나 높이 뛰는지 자랑하고 싶어하는 메뚜기도 만난 적이 있었다. 개미들처럼 무리생활을 하는그래서 겨울을 위해 꿀을 모으기에 바쁜 벌과도 한참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특히나 커다란 호박벌을 만났을 때는 그가 플라테네스를 자신의 다리로 잡아서 잠시 동안 함께 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다.

 

삶은 숲 속 어디에서나 존재했고, 그들이 각각 품은 이야기들은 정말로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멀리서 보면 다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가까이 다가가면 그렇게도 서로 달랐다.

 

그날 역시도 맑지만 추운 어느 날이었다. 플라테네스는 평소처럼 꾸준히 걷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온 후라서 오늘은 날씨는 특히나 더욱 추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기는 무척 맑았고 하늘엔 구름 한 점이 없는 그런 가을 날씨였다. 그래서 춥긴 해도 기분은 무척 좋았다. 플라테네스는 요즘 날씨가 자신의 기분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새삼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얘야, 날 좀 도와주지 않으련?"

 

플라테네스는 이런 저런 생각에 걷고 있다가 갑자기 들려온 탁하고 힘없는 목소리를 듣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펴서 누가 자신을 불렀는지 살폈다.

 

"여기다. 여기."

 

전체적으로 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걷던 경로에서 약간 벗어난 나무 한쪽 밑에서 뭔가 흔들리는 것이 하나 눈에 띄었다. 아마도 누군가의 앞다리인 듯싶었다. 플라테네스가 그쪽 방향으로 몸을 돌려 좀 더 다가가자 거기엔 자신과 같은 개미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같은 개미이긴 해도 상대는 플라테네스와는 너무도 다른 개미였다.

 

"안녕하세요."

 

플라테네스는 일단 인사를 했다. 그리고 상대를 좀 더 자세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로 상대의 몸 크기였다. 상대는 최소한 플라테네스의 세 배는 될 듯한 몸통을 가졌고 앞턱이 무척 발달해서 예전에 자신이 포궁을 방문했을 때 마주친 수호개미들을 연상케 했다. 실제로 그들과 비교해도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월의 흔적이었다.

 

상대 역시도 수호개미들처럼 커다랗게 발달된 앞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 한쪽이 부러져서 반쯤 남아 있었고 온 몸에도 자글자글한 주름 같은 것이 수 없이 나 있어서 오랜 세월을 통과한 흔적이 느껴졌다. 상대는 분명히 젊은 시절엔 힘세고 잘나가던 개미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덩치만 큰 늙은 개미였다.

 

"그래, 안녕하단다. 그런데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니?"

 

"뭔데요?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와드릴게요."

 

"내가 점심으로 가지고 나온 도시락을 잃어버렸지 뭐니. 좀 찾아 줄 수 있겠니? 내가 요즘 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지가 않는단다."

 

", 그럴게요. 어떻게 생겼나요?"

 

플라테네스는 상대에게 어느 정도 설명을 듣고 근처 수풀을 뒤져서는 어렵지 않게 도시락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크기가 커서 한참을 낑낑거리면서 끌고 와야 했다.

 

"여기 있어요."

 

"고맙구나. 그런데 너는 못 보던 개미인데, 어느 굴에서 왔니?"

 

"저요? 저는 이 근방에 사는 개미는 아니에요. 저는 멀리에서 왔어요."

 

"그렇구나어쩐지 몸통 색이 낯설다고 느꼈다. 이 근방 개미들은 너처럼 검은 빛을 띠지는 않거든."

 

"그런가요?"

 

플라테네스는 그 동안 오면서 스치듯 지났던 개미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들의 몸통 색이 자신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래, 그건 내가 다른 개미들보다 좀 더 미세하게 잘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지. 그런데 그 멀리에서 왜 이곳까지 오게 된 거니?"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

 

"그게.. 설명하기가 좀 복잡해서 아무튼 그런 일이 좀 있어요."

 

".. 말하기가 좀 그런가 보구나. 그래 뭐 상관없다. 그나저나 자세히 보니 네 몸이 많이 상했구나. 살던 곳을 떠나면 고생이지. 그럼 오늘 하루는 내 집에서 머물면서 쉬지 않겠니? 내 점심 도시락 찾아 준 보답으로 말이다."

 

"집이요?"

 

"그래. 내 집이다. 나는 이 근방에서 자기 집을 갖고 있는 유일한 개미이지. 점심도 다시 가져가서 집에서 같이 먹으면 좋겠구나."

 

상대는 자신이 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자랑스러운 듯 말했고, 그 순간 플라테네스는 그 점에 대해서 괜한 관심이 생겼다. 자신이 아는 한, 단체 생활을 하는 개미는 자신의 집 같은 것을 갖지 않기 때문이었다. 개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동의 집이 존재하고, 그렇게 평생 동안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운명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있는 나이가 많은 개미는 자신만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일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생각은 다소 길게 이어지는 듯 했지만 판단은 빠르게 이뤄졌다. 오랜 여행으로 인해 지친 몸을 하루쯤은 푹 쉬고 싶다는 실제적인 욕구도 나름대로 영향을 끼쳤다.

 

", 그러면 제가 감사하죠."

 

플라테네스는 이제 겨우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지만 그날 걷기는 그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럼 따라오너라."

 

플라테네스는 상대를 따라서 걸었다. 상대는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습이 힘이 없거나 혹은 병약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느리긴 해도 당당해 보이는 걸음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 제법 커다란 입구를 지닌 굴에 도착했다.

 

"이곳에 내 집이다. 들어가자."

 

플라테네스가 늙은 개미를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서자 제법 익숙한 지형이 나타났다. 그곳은 바로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개미 굴과 매우 비슷한 형태의 구조였다.

 

"이렇게 넓은 곳을 혼자 쓰고 계신가요?"

 

"그렇지. 하지만 이 굴은 내가 만든 것은 아니다. 사실 좀 슬픈 사연이 있지."

 

"그게 뭔데요?"

 

상대는 궁금해하는 플라테네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얘기하자구나. 일단 때가 됐으니 점심이나 먹자."

 

상대는 자신의 점심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다양한 먹거리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플라테네스의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바로 말린 매미포였다. 그 순간 플라테네스는 머리 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다리가 풀렸다.

 

"왜 그러냐? 어디 몸이 아프니?"

 

플라테네스가 갑자기 휘청거리자 상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라서요."

 

"무슨 기억인데 그러니?"

 

"별 것 아니에요. 예전에 잠시 만났던, 결국 매미가 되지 못한 매미가 떠올라서요. 그 후로 매미포를 보면 예전처럼 그저 맛나다는 생각만 들지가 않더라고요. 하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어요.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그래도 먹을 것은 먹어야지."

 

", 그럴게요."

 

플라테네스는 일부로 매미포를 먼저 먹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 먹지 못하면 영원히 먹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들었기에 그랬다. 하지만 먹는 동안 여전히 매국의 생각이 났고 그로 인해서 가끔 속에서 역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꾹 참고 자신이 먹기 시작한 매미포를 모두 다 먹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행히 매국과 매미포를 어느 정도 머리 속에서 분리시킬 수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 말이냐?"

 

"."

 

"특이한 질문이구나. 개미의 이름을 묻다니 말이다. 내가 꽤나 오래 살았지만 내 이름을 묻는 개미는 네가 처음인 듯싶다."

 

"그래요? 하지만 처음 만나면 다들 이름을 서로 말하지 않나요?"

 

"꼭 그건 아니란다. 개미들은 원래 만나는 순간 서로 단 하나만 확인하지. 상대가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 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상대가 자신과 같은 굴에 사는 존재인지 아니면 다른 굴에 사는 존재인지를 판단하는 것이지."

 

"왜 이름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죠?"

 

"그거야 당연히 자신과 같은 굴에 살면 자매이고, 다른 굴에 살면 적이니까 그렇지."

 

"자매와 적이요?"

 

"그래. 너도 개미니까 알 것 아니냐. 같은 굴에 산다는 것은 같은 여왕의 자식이란 말이고, 그것은 상대가 온전히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고, 다른 굴에 산다는 것은 다른 여왕의 자식이고, 그것은 서로 잡아 먹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개미들은 여왕이 다르면 상대를 개미라는 동족이 아니라 먹이로 보지."

 

"네? 그게 정말이에요?"

 

플라테네스는 깜짝 놀랐다. 올해 태어나 삶의 경험이 부족한 그로서는 전혀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그도 다른 왕국에 속한 개미들과 사소한 다툼 정도는 가끔 일어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먹이로 여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너는 아직 어린 개미이구나. 그리고 개미들의 진짜 전쟁을 본적도 없고 말이다."

 

", 그렇긴 해요. 저는 겨우 올 봄에 태어났거든요. 그리고 일개미여서 그저 매일 식량을 수집하는 일만 했어요. 그러다가 도중에 다른 개미 무리들과 만나긴 했어도 싸우지는 않았고요. 사실 서로를 무시했죠."

 

"그래 그 말도 맞다. 아무리 개미들이 서로를 적이라고 여긴다고 해도 늘 싸우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어떤 때는 큰 싸움이 나기도 한단다. 주로 식량이 부족할 때 그렇지. 그나마 다른 경우라면 새로운 여왕이 태어나고 그로 인해서 새로운 왕국이 건설될 때 기존의 질서가 깨지면서 영역 다툼이 크게 일어나기도 하지. 물론 그 역시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안정화되기도 한다만, 아무튼 그 전까지는 큰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지."

 

"그렇군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난 지금도 그렇지만 원래부터 싸움만을 담당하는 병정개미였으니까. 그래말 나온 김에 내 이름 소개나 하마내 이름은 병정개미 #3371 이란다.  덕분에 참 오랜만에 불러보는 내 이름이구나."

 

"그러시구나. 저는 플라테네스라고 해요저도 원래는 일개미 #3470란 이름을 가졌었는데 여행을 하던 중 만난 베짱이 아저씨가 이 이름을 선물해줬어요."

 

"베짱이를 만나서 이름을 선물 받았다고? 참 특이한 일이구나. 그 게으른 베짱이가 어쩐 일로.."

 

순간적으로 플라테네스는 베짱이들은 생각보다 게으르지 않다고 설명하려다가 멈추고 말았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얼마나 오래 살아오신 것인가요?"

 

플라테네스는 상대를 가까이서 보자 그 부러진 앞턱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주름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수없이 난 크고 작은 상처로 인해 생겨난 흉터임을 깨닫고는 그가 살아온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경험한 것들이 결코 작지 않음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문득 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나 말이냐?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아마도 겨울을 열 번 이상은 넘겨온 듯 하구나. 아마도 올 해가 열 한번째 겨울 같기도 한데, 그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갈 날이 멀지 않는 늙은이가 그걸 알아서 뭐하겠냐.."

 

"십 년 이상을 살아오셨다고요?"

 

사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플라테네스는 여왕 개미를 빼고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개미가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나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지만, 개미치고는 내가 오래 살았지."

 

표정으로 보아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홀로 살아오신 건가요?"

 

"아니다. 이렇게 홀로 산지는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났다. 작년에 은퇴를 했거든나도 한 때는 많은 개미들과 함께 했었지."

 

", 그러면 할아버지도 저처럼 개미 굴에서 사셨나요?"

 

"개미 굴에서 살긴 했지. 하지만 나에겐 딱히 여왕님이 없었단다. 그것이 아마도 너와 나의 가장 큰 차이일 듯 싶구나."

 

"? 어떻게 여왕님이 없을 수가 있어요. 여왕님이 없으면 태어나지도 못하는데.."

 

"물론 나 역시 태어나긴 여왕님으로부터 태어났지. 하지만 내가 두 살이 되던 해 내가 속해있던 왕국은 다른 개미 군대의 침략으로 인해서 멸망을 하고 말았단다. 나도 당시 큰 상처를 입었지만 겨우 살아났는데, 결국 그 전쟁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되고 말았지."

 

병정개미 #3371의 목소리에는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과거의 슬픈 기억들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플라테네스는 그 모습을 보고는 웬지 마음이 아팠다.

 

"혼자만 살아남으신 것인가요? 여왕님도 죽었고요?"

 

"사실 개미 왕국 간의 전면전이 일어나면 여왕의 죽음이야말로 그 전쟁의 끝을 의미한단다. 즉, 상대편 왕국의 여왕개미를 포궁에서 끌고 나와서 죽여야 그 전쟁이 끝난다는 뜻이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났을 때 패배한 쪽의 여왕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오히려 전혀 없단다."

 

".. 정말로 그래요?"

 

"그래. 그렇단다. 나는 그 광경을 숱하게 봤지."

 

"? 왜요?"

 

"나는 내 왕국이 멸망한 후에는 결국 떠돌이 용병 개미가 되었거든."

 

"용병 개미요?"

 

"그래. 개미들 사이의 전쟁에서 일정량의 식량을 받고 한쪽 편에서 대신 싸워주는 개미말이다. 용병 개미, 그것이 지난 젊은 시절 나의 직업이었다."

 

플라테네스는 뭐라고 대꾸를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비로소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병정개미의 몸에 나 있던 수많은 흉터들이 이해가 갔다. 실제로 용병 개미들이 어떤 삶을 사는 지는 알 수가 없지만, 지금까지 나온 얘기를 종합하면 그는 한쪽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는 전쟁에 여러 번 참가 해 본 경험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눈 앞에 있는 이 늙은 개미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참혹한 일을 그 누구보다도 앞서서 저지른 존재인 것이다. 그러자 잠시 생겨났던 연민의 감정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내가 다르게 보이니?"

 

"그게.. 좀 그렇잖아요. 개미들끼리 서로 죽이고, 심지어 여왕까지 끄집어 내서 죽인다는 것이 말이에요."

 

"그래. 나도 안다. 그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지. 그리고 내가 그 끔찍한 일의 선두에 서왔다는 사실도 말이다."

 

병정개미 #3371은 잠시 말을 끊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변명일 수 있지만, 너도 이해해 줘야 할 것이 하나 있단다. 어떤 해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거나 큰 불이 나서 먹을 것이 유난히 부족한 때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숲은 이곳에 사는 개미들을 모두 다 먹여 살릴 수가 없게 된단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도태가 일어나게 되지. 그야말로 생존경쟁이다. 그렇게 되면 수 많은 다툼이 일어나고, 그것이 커지면 결국 왕국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말지. 특히 나와 같은 병정개미들이 참가하기 시작하면 그 끝은 무조건 전쟁으로 이어지고 만단다."

 

"왜요? 도대체 병정개미들은 왜 그러는데요?"

 

플라테네스는 속이 좀 꼬여서 말투가 곱게 나가질 않았다.

 

"그건 말이다. 원래부터 병정개미들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병정개미들은 처음부터 적을 죽이기 위해서 태어나기에, 적을 죽일 때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받게 된단다. 네가 열심히 일을 해서 먹을 것들을 창고에 옮길 때 존재 이유가 증명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군요.."

 

플라테네스는 상대의 설명을 듣고는 그 말을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그럴 수 있겠다 정도까지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라니, 지금까지 병정개미들을 먼발치에서 본적은 있지만, 실제로 이런 얘기를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인지라 정말로 낯설고 생소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내가 일개미였다면 아마도 나는 예전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병정개미였고 더군다나 병정개미들 중에서도 매우 강한 편에 속했단다. 그래서 나는 홀로 살아남아서도 쓸모가 있지. 그러니 결국 용병 개미의 삶을 살게 된 것이야. 그것이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할아버지는 다른 개미들을 많이 죽였겠네요?"

 

플라테네스는 더 이상 상대가 약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할아버지로만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단 한번도 상대를 먹기 위해서 죽인 적은 없었다. 나는 그저 내 먹을 것을 보상으로 받기 위해서 그랬을 뿐이지."

 

"하지만 그것은 직접적으로 먹지 않았을 뿐누군가를 죽이고 나서 그 보상으로 받은 먹이니까 결국은 둘이 같은 것이 아닌가요?"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도 예전에 만났다는 매미와 네가 오늘 먹고 있는 매미포를 구분해서 먹고 있지 않니? 그것은 뭔가 서로 다른 것이니?"

 

플라테네스는 순간 움찔했다.

 

"그건.."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말은 없었다.

 

"미안하구나. 너를 당황스럽게 할 의도는 없었다. 아무튼 내가 다른 개미들을 먹기 위해서 죽인 것은 아니란 점만큼은 믿어줬으면 한다. 내 명예를 걸고 그런 적은 한번도 없단다."

 

", 저도 죄송해요. 누구도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잠시 착각을 했네요."

 

"괜찮다. 나는 비록 평생 용병 개미로 살아왔지만, 나에겐 내 나름대로 신념이 있었다나는 그런 전쟁들을 치르면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거든."

 

"무슨 꿈이요?"

 

"바로 평화지."

 

"? 전쟁을 치르면서 평화를 꿈꿨다고요?"

 

"그렇단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그런 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 용병 개미 생활을 시작한 나는 그저 복수심에 가득 차 증오심만 품고 있는 젊고 무모한 개미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몇년 그런 생활을 하다가 보니 어떤 회의감에 사로잡히게 됐지."

 

"어떤 회의감이요?"

 

",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폭력에 대한 회의감이라고 할까? 처음엔 먹고 살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주 전쟁에 참여하다가 보니 실제로 그 이유만이 아니더구나. 생각보다 많은 전쟁이 그냥 무의미하게 시작되고 참혹하게 끝났지. 어떤 면에서는 그것은 그저 탐욕의 결과였다. 강한 개미 왕국이 다른 약한 개미 왕국을 침략해서 그들이 가진 것을 뺏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인 전쟁도 많았거든."

 

".."

 

"그래서 나는 결심을 하나 했지. 그것은 바로 개미 왕국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필요한 전쟁을 줄이고 싶다는 결심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좀 더 전략적이고 계획적인 접근을 생각해 내야 했다."

 

"어떤 것이요?"

 

"그것은 바로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침략할 수 없는 그런 억제력을 가진 강한 힘이다. 어떤 개미도 무시할 수 없는 그런 힘을 말이다."

 

"그럼 할아버지는 그런 힘을 가졌나요?"

 


"그렇단다. 물론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엔 가졌지. 나는 최초에 그 생각을 품은 채 나와 뜻을 같이 할 병정개미들을 최대한 모았단다그리고 결국 강한 용병 개미단이 되었지. 우리는 근처 숲에서는 가장 강한 개미 집단으로 소문이 났지. 그래서 우리가 어느 왕국 편에 서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좌우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

 

"어떤 일인데요?"

 

"바로 전쟁이 멈췄단다. 어떤 전쟁이든 우리가 한쪽 편에 서는 쪽이 이겼기 때문에, 개미 왕국마다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작은 충돌을 절대로 전면적으로 확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근방의 모든 개미 왕국들은 우리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고, 우리는 그 중심점에 서서 서로가 서로를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도록 간접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 대단하시네요."

 

"그래, 그 후로 개미 왕국 사이에 자연스러운 평화 협정이 맺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그 협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단다. 물론 용병 개미단의 힘이 여전하기에 지켜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순간 그 말을 하는 병정개미 #3371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플라테네스는 그가 충분히 그런 표정을 지을 만큼 대단한 일을 해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할아버지는 지금도 용병 개미단에 속해 있나요?"

 

"아니지. 나는 이제 늙어서 은퇴를 했단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훌륭한 개미에게 내 자리를 물려줬단다."

 

"그러셨군요. 정말로 평범하지 않는 대단한 삶을 살아오셨네요. 일반 개미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삶을 말이에요."

 

플라테네스는 진심으로 칭찬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상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상관없이 그 삶은 그 누구도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그는 바네사의 만남 이후 또 다시 누군가를 깊게 들여다 보지 못하면 그 존재를 제대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언제나 진실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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