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6.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

아이루다 2018. 10. 27. 06:06

 

"정말로 말을 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금방이라도 뭔가 말할 듯 굴었던 매국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 사이 플라테네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기만 했다.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 전에 매국이 보여준 격렬한 감정 반응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그리 쉽게 꺼낼 수 있는 얘기는 아닌 듯 했다.

 

"말하기 힘들면 꼭 말하지 않아도 돼요."

 

플라테네스는 그가 많이 고민하는 듯 보이자 그냥 마음이라도 편하라고 한 마디 해주었다. 그러자 매국은 눈물이 마른 눈으로 플라테네스를 한참 동안 바라본 후 대답했다.

 

"당신은, 아니 너는 참 좋은 개미이구나. 말 놓아도 되지? 우리 말 놓자."

 

".. 그래."

 

플라테네스는 얼떨결에 대답했다사실 그것이 무슨 상관 있으랴.

 

"나는 구제불능의 겁쟁이야.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지."

 

매국의 앞뒤 다 잘라먹고는 뜬금없는 내뱉는 말에 플라테네스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왜 스스로를 겁쟁이라고 해?"

 

"겁이 많으니까 겁쟁이지."

 

"왜 겁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겁이 많아서 겁쟁이가 된 결과가 바로 지금 니 눈 앞에 있으니까."

 

매국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플라테네스는 답을 듣고는 오히려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저 매미는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자신을 겁쟁이라고 칭하고 나서, 그 증거가 바로 자신이란 말이 도대체 앞뒤가 맞는 말인가?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말만하면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정직하다, 그 증거는 바로 나다.', 라고 하면 되니까 말이다.

 

"왜 그렇게 되는 거지? 너 자신이 겁쟁이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야?"

 

매국은 플라테네스의 반문에 이번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를 했다.

 

"모르는 척 하는 거니?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거니? 하지만 너는 개미이니까 이미 알고 있을걸? 그래서 아마도 내가 매미라고 밝힌 순간부터 나에 대한 어떤 이상한 점을 느꼈을 것이 분명해. 나는 내가 나 자신을 매미라고 밝혔던 어제 밤의 너의 표정을 기억하거든."

 

"어제 밤에 내가 그랬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너를 이상하다고..."

 

대꾸를 하던 순간 플라테네스는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실제로 그런 것이 있긴 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시기였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매국이란 이름을 가진 매미는 사실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매미는 당연히 여름의 존재였고, 여름이 지난 후 매미의 존재는 그 의미를 잃어 버리고 만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고 좀 더 크게 표현하면 자연의 순리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 앞에 그 당연한 것이 부정되고, 자연의 순리마저 역행하는 존재가 매국이란 이름을 가지고 떡 하니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구나.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네. 하지만 그것이 네가 겁쟁이라는 사실과 무슨 상관이지?"

 

플라테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은 얼굴로 물었다.

 

"넌 아직도 모르겠니? 내가 왜 여전히 이 땅 속에 있는지를?"

 

매국의 말투는 처음보다는 많이 차분했다.하지만 여전히 그의 차분함에는 뭔가 설명하기 힘든 다른 감정 하나가 깔려 있었다. 플라테네스는 아마도 그것이 우울함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는데?"

 

"너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정말로 모르겠어? 어떤 상상도 안되니?"

 

"아마도 너는 분명 남 모를 사연은 있겠지. 그리고 내 짧은 생각으로 너는 지금 여기에 있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 이 세상은 늘 흘러가는 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나만해도 그렇거든. 나는 얼마 전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고향을 떠났어. 답을 알고 싶은 질문에 사로잡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나의 그런 판단은 개미에게 있어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거지. 아마도 다른 개미들 중에서 나처럼 떠난 개미는 하나도 없는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내가 문제가 있거나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저 다들 각자만의 사정이 있는 것일 뿐이지."

 

"네가 개미 왕국을 떠났다고?"

 

매국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래서 어제 밤에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말했잖아나 말고 다른 개미들이 오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래, 나는 얼마 전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개미 왕국을 떠났어."

 

"정말로 놀랍구나. 도대체 어떤 질문의 답을 찾고 싶어서 그곳을 떠난 거야?"

 

"지금 자세히 설명하긴 복잡한데.. 단순히 말하면 그냥 내가 왜 사는지 알고 싶어서 떠났다, 정도만 알고 있었으면 해."

 

".. 그렇구나. 그런데 그런 질문은 그냥 듣기만 해도 머리 속이 복잡하다. 하지만 결국 너와 나는 다르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잖아. 나는 두려워서 여기에 머물고 있지만 너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용감하게 떠났으니까 말이야.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가지 못하고 있고, 너는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떠났는데, 어떻게 우리 둘이 같은 입장이 될 수 있겠니?"

 

"내가 선택을 했다고? 아니야. 나 역시 내가 그곳을 떠난 것은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그냥 어느 날 그 생각에 한번 사로잡히니까 전혀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떠날 수 밖에 없었어. 물론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는 여왕님이 도와주셨지만 말이야."

 

"그래도 정말로 대단한 일인걸? 나하고는 전혀 달라. 나는 해야 하고, 하고 싶기도 한데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게 뭔데?"

 

매국은 잠시 망설였다. 매국은 자신의 진짜 두려움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쉽지 않은 듯 했다. 플라테네스는 매국이 어떤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긴 했지만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매국이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한참 후 매국이 대답을 했다.

 

"지상에 올라가 우화를 해서 진정한 매미가 되는 것."

 

"우화를 하는 것? 그런데 왜 못하고 있는데?"

 

"왜냐고? 정말로 몰라서 물어? 아까 말했잖아. 그것이 너무 두려워서 그래."

 

"아니, 그게 뭐가 두려운데? 다른 모든 매미들은 다 하는 것이잖아. 우화를 할 때 많이 아파서 그런거야?"

 

매국은 약간 답답한 표정으로 플라테네스를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너는 우리들 매미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미안해. 하지만 모르니까 설명을 해줘."

 

"우리들 매미는 지금의 나처럼 땅 속에서 7년을 살아. 그리고 7년이 지나면 땅을 파고 지상으로 나가서 나무 위로 올라가 우화를 하지그리고 그때가 다들 알고 있는 매미라고 부르는 존재가 돼그 다음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 열심히 울어. 사실 처음부터 지상으로 가는 이유가 바로 짝짓기를 위한 것이니까 당연해. 그런데 짝짓기가 끝나고 나면 그 후로 매미가 어떻게 되는지를 너도 개미니까 잘 알거 아냐."

 

매국은 마지막 부분을 강조하면서 플라테네스를 흘깃 바라보았다.

 

".. 그래.. 맞다. 그렇지. 그래서 우리 개미들의 식.."

 

플라테네스는 식량이란 말이 나오기 전에 멈췄다. 그래야 그제서야 매국이 정말로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정말로 순수하게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난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너무 무서웠어. 난 내가 죽는 것도 또 그리고 내가 죽은 후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누군가 먹이로 삼는 것도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었지."

 

"하지만 다른 매미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그렇게 하잖아."

 

"그들은 나와는 달리 용감하니까. 하지만 난 겁쟁이일 뿐인걸..."

 

"죽고 싶지 않은 것을 겁쟁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의 살아 있는 모두가 다 겁쟁이겠지. 그것은 그저 각자마다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그것은 잘 모르겠어하지만 난 결국 내 아이들을 남기고 죽는 내 운명을 피하고 말았어."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것이 그리 나쁜 거야?"

 

"나쁜 거냐고?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겠어.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나는 그 선택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아."

 

"? 살고 싶어서 살아 있는데, 왜 벌을 받지?"

 

"처음엔 살아만 있을 수 있다면 나머지 것들은 다 별다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처음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점점 더 심각해지더라고."

 

"어떤 문제?"

 

"여러 가지 있지만, 지금 가장 큰 것은 바로 외로움이야."

 

"외로움?"

 

"그래, 나혼자 이 공간에 홀로 남겨진 것. 이번 여름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형제들과 친구들 그리고 지난 7년간을 함께 했던 수 많은 다른 매미들과 함께 있었어. 그런데 나 빼고 그들 모두가 이번 여름에 다 지상으로 올라갔지. 그런 후에 알을 낳고 죽었어. 그래서 난 처음엔 그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뭔가 이상한 거야.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이 그토록 필요한 것임을 홀로 있게 되는 순간에 겨우 알게 된 거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 결국 지금의 나는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존해 있을 뿐이야."

 

"그래서 지금이라도 지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거야?"

 

"그래. 매일 밤마다 그것을 꿈 꿔. 그리고 시도 하지. 하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더 큰 두려움 때문에 포기하고 말아. 그러면 그 좌절감을 품고는 낮 동안 괴로워 해. 더해서 외로움도 더 커지지그래서 괴로우니까 밤이 되면 또 다시 지상으로 나가려고 해. 하지만 결국 실패해이것이 바로 요즘 나의 삶이야."

 

", 정말로 힘들겠다."

 

플라테네스는 진심으로 매국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만약 자신이 그런 입장이라면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래, 그런데 힘들지만 결국 다 내 탓이니 어떻게 할 수 있겠니."

 

"그럼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하는 것은 어때? 홀로 사는 삶을 받아들인다든가, 아니면 과감하게 지상으로 나가본다든가. 내가 얼마 전에 만난 베짱이 아저씨는 너랑 비슷하게 혼자 살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걸? 매일 작곡을 하고, 연주를 하고, 겨울이 되면 연주회를 열어서 자신의 연주 실력을 뽐내면서 말이야. 더불어 돈도 많이 벌고. 아무튼 혼자 사는 것이 꼭 불행하고 외로운 것만은 아니던데?"

 

"그래? 하지만 나는 지금 견딜 수 없는걸? 내 형제들이 그리고 친구들이 그리워서 참을 수가 없어. 더해서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내가 지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충동이 늘 일어나고 있어. 아마도 나의 본능이겠지. 그래서 나는 그 베짱이처럼 혼자 사는 삶을 살지는 못할 거야."

 

"그러면 나가야지."

 

"나도 알아. 하지만 죽는 것이 너무 무서워."

 

진퇴양난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플라테네스는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런 방법은 어때? 올해는 이미 가을이 왔으니까 포기하고 그냥 내년 여름에 올라가는 것으로 정하는 것 말이야."

 

"그것도 생각해 봤지하지만 나는 아마도 외로워서 그 전에 죽고 말 거야. 나는 이번 겨울을 혼자서 보낼 자신이 없어."

 

".."

 

플라테네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매국이 질문은 던졌다.

 

"나에 관한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부터는 네 얘기는 해봐. 넌 지금이라도 개미굴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 아마 너도 홀로 지내고 있을 텐데 말이야. 외롭지도 않고?"

 

"사실 굴을 떠난 지 이제 겨우 삼 일째야. 그제 밤에는 마음씨 좋은 베짱이 아저씨를 만나서 오히려 더 따뜻하고 행복한 밤을 보냈지. 그래서 어제가 처음으로 홀로 보낸 밤이야. 그런데 너 때문에 여기로 떨어진 거지."

 

"그랬구나. 아무튼 너는 나중에라도 너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후회? 뭐 그런 것은 아직 없어. 나도 나중에 어딘가에서 목숨을 잃게 되면 그때는 왜 개미굴을 떠났을까죽기 직전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하지만 지금까지는 아냐."

 

"그래. 넌 나와는 달리 용기가 있는 것이 분명해."

 

"하지만 너도 매일 시도는 하잖아. 포기하지 않았잖아."

 

"시도만 하면 뭐해. 결국 아무 것도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걸."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중요해. 시도를 하다가 보면 언젠가는 원하던 것을 이룰 수 있는 날도 올 거야."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고맙다고는 하지만 매국의 표정은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우울한 매미였다. 플라테네스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우울할 때는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최고다.

 

"내가 맛난 것 좀 가지고 있는데 먹을래? 아까 말한 베짱이 아저씨가 요리해서 싸준 것인데 정말로 맛있어."

 

"그래? 그래도 돼?"

 

다행히 매국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래. 내가 가져올 테니 같이 먹자."

 

플라테네스는 자신이 간밤에 잠들었던 자리로 돌아가서 식량을 가져왔다하지만 플라테네스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매국의 덩치였다. 매국은 플라테네스가 며칠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을 바로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우고 말았다. 매국의 덩치는 바네사보다도 컸으니까 말이다.

 

"정말로 맛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 내가 다 먹고 말았네."

 

매국은 정신 없이 먹고 난 후 미안해 했다.

 

"아니야. 어차피 얻은 것인데."

 

"그래도 미안해. 내가 너무 염치가 없네."

 

"괜찮대도. 아무튼 맛있게 먹었으니까 다행이다."

 

플라테네스는 다 사라진 식량은 좀 아쉬웠지만 매국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을 발견하고는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고마워. 덕분이 힘이 났어."

 

"별 말씀을. 아무튼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서 다행이다."

 

"지금 같은 기분이면 오늘 밤에는 지상으로 나갈 수 있겠는걸!"

 

"그래. 그럼 나도 하루 더 머물면서 너를 응원해줄게. 꼭 할 수 있을 거야."

 

플라테네스는 지금 지상은 꽤나 쌀쌀해져서 매국이 밖으로 나가 우화를 한 후에 하루라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는 선택을 하긴 해야했다. 지금의 삶은 살아있다고 하기에도 애매해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 나도 꼭 성공하고 말 거야."

 

대화는 대충 그쯤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플라테네스는 이 장소에서 하루를 더 묵기로 했기에 낮 동안은 그냥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낯선 곳이니 낮 동안 볼거리도 많을 것이다. 또한 매국이 식량을 다 먹어 버렸으니 새로 먹을 것도 구해야 했다. 그렇게 낮 동안의 시간은 금방 가고 또 다시 밤이 되었다.

 

"지금부터 땅을 파서 올라갈 거야."

 

다행히 밤이 되었어도 매국의 각오는 여전해 보였다. 플라테네스는 오늘만큼은 매국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도 생겨났다.

 

"고마워, 플라테네스야.  덕분에 나는 이제 내가 가야 할 길로 갈 수 있게 되었어. 비록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고 해도 말이야."

 

"별 말을. 모든 것은 네 스스로 결정한 거야. 잘 해봐."

 

"그럼, 이만 안녕. 나는 지상으로 나갈게."

 

매국은 인사를 마치고는 지상으로 향하는 굴을 파기 시작했다. 플라테네스는 그런 그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의 눈에 가장 처음으로 비친 것은 바로 매국이 지상까지 이어지게 완벽히 뚫어 놓은 커다란 통로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밝고 희망찬 아침 햇살이었다.

 

'정말로 다행이다.'

 

플라테네스는 커다랗게 뚫린 통로를 보는 순간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혹시나하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상태로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혹시라도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나 하고 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다른 풀벌레 소리만 요란할 뿐, 자신이 아는 매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플라테네스는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걱정이 되었다.

 

"어디로 간 거지?"

 

플라테네스는 근처에 가장 가까운 나무 주변을 돌면서 혹시나 매국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를 살폈다. 하지만 한참을 찾아도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매국만 찾을 수는 없었다. 그 자신도 떠나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지하로 다시 내려왔다.

 

떠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굴 안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플라테네스는 직감적으로 그 소리의 주인공이 매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국이니?"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플라테네스는 무거운 마음으로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그러자 과연 거기엔 매국이 있었다.

 

"매국이구나."

 

플라테네스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실망이 담겼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매국은 등을 돌린채 누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괜찮아. 그래도 땅을 다 파 놓은 것이 어디니."

 

플라테네스는 매국을 애써 위로하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매국아, .. 괜찮니?"

 

플라테네스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매국의 몸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고개만 돌려 플라테네스를 바라보았다.

 

"플라테네스구나."

 

슬퍼보였지만 다행히도 별 일은 없는 듯 했다그런데 매국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라니, 무슨 말이야?"

 

매국은 대답대신 씩 하고 웃기만 했다.

 

"괜찮아. 저렇게 굴을 다 파 놓았으니, 또 언젠가는 올라갈 수 있을 거야."

 

플라테네스는 또 다시 매국을 위로하려 했지만 매국의 표정은 그저 슬퍼보기기만 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플라테네스야.. 나에게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기회는 많이 남았어."

 

"고마워. 덕분에 내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낼 수는 있었어. 그리고 이상하게 지금 이 순간엔 내가 어제 네 식량 멋모르고 다 먹어치운 것이 걸리네. 참 웃기지. 이제 곧 죽을 건데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내가 죽거든 내 몸을 네가 먹어도 돼. 네가 나를 먹는다면 나는 그리 두렵지 않을 것 같아."

 

플라테네스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너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그리고 내가 왜 너를 먹어. 나는 그런 짓 못해. 이상한 소리 하지마."

 

"아니야. 이미 끝난 일이야. 나는 이제 곧 이 세상을 뜰거야. 그런데 나를 너무 비난하지 말아줘. 바보 같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어제 오랫동안 고민해봤는데 지금 지상으로 올라가서 그냥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더라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계속 혼자 살아갈 수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떠나. 그나마 내 스스로 내 삶을 결정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너같은 좋은 개미와 내 삶의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큰 행운이지고마웠어. 플라테네스야. 나는 이제 많이 졸려.. 이제는.."

 

매국은 말을 흐리더니 서서히 고개를 떨궜다. 플라테네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정신이 들자 재빠르게 매국의 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의 배엔 날카롭고 긴 나뭇가지가 꽂혀서는 그 상처로 다량의 체액이 흘러나온 후였다. 매국은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렇게 삶을 마무리 했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플라테네스는 한참 동안 매국의 시체 앞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매국의 죽음 그 자체도 충격이지만 그가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눈 앞에서 가깝게 지켜 본 일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플라테네스가 정신을 차리고 그 자리를 뜬 것은 거의 정오가 다되어서였다. 그렇게 반나절이나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플라테네스는 무거운 마음으로 짐을 챙겨서 그 자리를 떴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매국이 파 놓은 커다란 구덩이 입구에 작은 돌을 하나 가져다 놓는 것으로 매국과의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대신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려는 플라테네스의 머리 속에는 커다란 의문이 남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매국의 만남과 그리고 그의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죽음은 플라테네스에게 무거운 질문만을 남기고 말았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 떠난 여행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해답은커녕 질문만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테네스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 오후 내내 멍하게 걷기만 했다.

 

 



'소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옛날 이야기  (0) 2018.11.04
7. 용병 개미단  (0) 2018.10.31
5. 홀로 보내는 밤  (0) 2018.10.23
4. 바네사 쥰  (0) 2018.10.19
3. 세상으로 나가다.  (0) 2018.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