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4. 바네사 쥰

아이루다 2018. 10. 19. 08:18

 

바네사 쥰이 데리고 간 곳은 이제는 플라테네스라고 불리게 된 개미 #3470에게 있어서는 한번도 상상도 못해봤을 만큼 크고 멋지게 지어진 집이었다플라테네스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온, 그리고 삶이 전부였던 개미 굴과는 다르게 지하가 아닌 지상에 지어진 그의 집을 보고는 일종의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플라테네스는 바네사의 집을 보는 순간 지금껏 그가 알고 있던 집이라는 개념을 송두리 채 바꿔 놓아야 했다. 그 무엇보다 땅 밑을 파서 길고 축축한 공간으로 이어졌다가 그 끝 부분에 작은 공간들이 배치되어서 숙소나 기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개미 굴과는 전혀 달랐다. 그 집은 무엇인지도 모를 예쁘고 튼튼해 보이는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그것들을 구했는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것은 겉모양도 예뻤지만 문을 열고 안쪽 내부로 들어서자 널찍한 공간에 잘 꾸며 놓은 인테리어로 인해서 한껏 고급스러운 느낌까지 들었다바닥엔 부드러운 풀들이 깔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서는 플라테네스는 낯선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집처럼 안락하고 평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에는 도대체 일년 내내 연주만 하고 노는 베짱이가 어떻게 이런 집을 짓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내 집 좋지?"

 

", 정말로 좋네요."

 

"그런데 너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아마도 일년 내내 놀고 먹기만 하는 베짱이가 어떻게 이런 집을 구했냐 싶은 생각이 드는 모양이구나?"

 

바네사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플라테네스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자신의 마음을 딱히 숨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해서 정말로 궁금하기도 했다.

 

"죄송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네요."

 

"괜찮아. 그리고 사실 그런 질문 많이 받아봤어. 특히 너희 개미들에게서 말이야."

 

괜찮다고는 하지만 뭔가 뒷끝이 느껴지긴 했다. 특히 개미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할 때 그랬다. 플라테네스는 그냥 모른 척 하기로 했다.

 

"뭔가 비결이 있어요?"

 

"비결? 비결까지는 아니지만, 한 가지 비밀은 있지."

 

"뭔데요? 그것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어요?"

 

"당연히 말해 줄 수도 있지. 그런데 알고 나면 네가 기분이 좀 그럴걸? 내가 이렇게 호강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너희들 개미들 덕분이니까 말이야. 그래도 듣고 싶니?"

 

"개미들 덕분이라고요?"

 

플라테네스는 바네사의 호화스러운 집과 개미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래. 정확히 말하면 관련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지."

 

"그것이 무슨 말이에요?"

 

바네사는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했다.

 

"너희들 개미들은 봄부터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 아주 열심히 일하지?"

 

", 그렇죠. 우리들 개미들은 정말로 열심히 일해요. 하나같이 모두가 다."

 

그 순간 플라테네스는 개미 #2999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이 순간 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로 인해서 모든 개미가 열심히 일한다는 말을 할 때 뭔가 좀 걸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냐고 물으면 괜히 진지한 표정으로 'Winter is Coming', 이런 소리나 하면서 하고 있지."

 

플라테네스는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Winter is Coming'을 말하는 개미의 표정을 흉내 내고 있는 바네사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실제로 선배 개미들이 그랬으니까 말이다.

 

"맞아요. 그들이 그렇긴 해요."

 

"그런데 웃기는 사실이 하나 있어. 그것은 바로 정작 겨울이 오면 개미들은 뭘 하고 지낼까에 관한 거야겨울이 오면 최소 네 달은 개미 굴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는데 말이야."

 

플라테네스는 갑자기 생각의 흐름이 막혔다. 그 순간 지금까지 겨울이 오는 것만 두려워했지 정작 겨울이 온 후에는 어떻게 지낼까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네요. 개미들은 겨울엔 뭘 하죠?"

 

플라테네스의 질문에 바네사가 웃었다.

 

"그걸 개미인 네가 나에게 물으면 어떡하니. 아무튼 너는 올해 태어나서 겨울을 한번도 보내 보지 못했으니까 이해는 해. 그럼 내가 진실을 말해주지."

 

플라테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진실은 말이야, 대부분의 개미들은 정작 겨울이 오면 할 일이 없어서 나처럼 빈둥거리게 된단다. 추워서 밖에 나오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 좁은 개미 굴 안에서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정말이요? 정말로 개미들이 모두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려요?"

 

플라테네스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정직, 성실, 근면, 이것은 개미들의 정체성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개미들이 겨울이 오면 빈둥거린다니.. 오늘 플라테네스는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여러 번 깨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빈둥거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할 일이 없어서 지루해서 죽지."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 모여서 잡담도 하고, 진딧물에서 나오는 달콤한 꿀물을 마시기도 하고, 평소 보다 더 오래 잠을 자기도 하고, 흙으로 공을 만들어서 놀기도 한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지. 그러다 보니 개미들 대부분은 매일매일이 시간이 가질 않아서 고통스러울 정도야."

 

"그건 좀 심각하네요. 그런데 개미들의 겨울이 지루한 것과 아저씨 집이 좋은 것이 무슨 관련이 있어요?"

 

플라테네스의 질문에 바네사는 '나 좀 잘났지'를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표정으로 씩하고 웃었다.

 

"바로 내가 개미들의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거든. 나는 봄, 여름, 가을엔 작곡도 하고, 연주도 하고, 자연을 벗삼아서 놀러 다니기도 하고, 맛난 먹거리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거기에 놀러 가기도 하고, 친척집에 잔치가 있으면 거기에 가서 함께 신나게 즐기기도 하지. 그런데 겨울이 되면 색다른 것을 한단다."

 

"뭔데요?"

 

"바로 연주회를 열지. 내가 봄부터 가을까지, 자연을 벗삼아 나의 행복을 재료 삼아 열심히 만든 노래들로 가득 찬 숲 속에서 열리는 나의 연주회를 말이야."

 

"연주회요?"

 

"그래, 바네사 쥰의 단독 연주회야. 그리고 그 연주회에 누가 구경을 하러 오는 줄 아니?"

 

"설마.. 개미들이 온다는 뜻이에요?"

 

"정답! 그래 맞아. 개미들이 온단다. 나의 연주회는 개미들에게 있어서 그 긴 겨울에 그나마 지루함을 달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락거리이거든."

 

"충격적이네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직 지루하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긴 하지만, 평소에 게으르다고 뒷담화를 하던 아저씨 연주회를 보러 올 만큼 견디기 힘든가 보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그리고 나는 그 개미들에게 약간의 입장료를 받는단다. 하지만 보러 오는 개미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겨울을 나고 나면 내 수입은 꽤나 짭짤하지. 덕분에 나는 이렇게 좋은 집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지."

 

플라테네스는 갑자기 기분이 좀 상했다. 바네사의 설명에 따르면 개미들의 삶은 뭔가 좀 이상한 것이다. , 여름, 가을 동안 겨울을 나기 위해서 그리 열심히 일하고, 정작 겨울이 되면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다가 결국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모은 것을 연주회를 구경 와서는 쓰고 있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정말로 놀랍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일이네요."

 

"그래. 그리고 이것은 비밀인데난 가끔 개미 여왕님 앞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한단다. 비밀리 초대를 받아서 말이야. 이 사실은 일반 개미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그럴 때면 아주 맛있는 먹이를 잔뜩 선물로 받는단다."

 

"여왕님까지도요?"

 

"그럼, 여왕님도 지루함을 느끼는 것은 동일하지. 겨울은 누구에게나 지루한 시간이니까 말이다."

 

"그럼 우리 여왕님도 만나 보셨나요?"

 

플라테네스는 바네사 쥰이 여왕을 만났다는 소리에 씁쓸한 기분은 잠시 누그러지고 그 자리엔 반가움이 들어섰다.

 

"너 저기 언덕 너머에서 왔다고 했지?"

 

", 거기에서 왔어요."

 

"그럼 만나 봤지. 거기 여왕님은 아직 젊지. 이제 왕국을 만든 지 십 년이 조금 넘었으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내 연주를 제대로 이해하는 분이야. 그래서 내가 연주를 하고 나면 언제나 놀랍도록, 최고로,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고 칭찬 해준단다."

 

바네사는 세가지 표현에 특별히 힘들 주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결국 우리 여왕님을 안다는 뜻이죠?"

 

"그래.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의 연주에 대해서 평가해 준 것이 중요하잖니?"

 

바네사는 자신의 연주에 대한 평가 부분에 대해서 계속 떠들었지만 플라테네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며칠 전 만났던 여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며칠 전이지만 아주 오래 전 일 같았다.

 

바네사는 플라테네스가 언젠가부터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표정이 밝게 변해서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넌 왜 그곳을 떠났어? 곧 겨울도 올 텐데 말이야. 궁금하니까 얘기 좀 해줘."

 

바네사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게.."

 

플라테네스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자신이 개미 굴을 떠난 과정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너 자신이 왜 사는지 궁금해서 그것을 알기 위해서 떠났다는 것이지?"

 

", 결국 그런 셈이죠."

 

"그런데 내 생각 얘기해도 되니?"

 

바네사가 약간 조심스러운 표정을 물었다.

 

",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는 네가 조금 이상하다. 도대체 왜 사는지를 왜 궁금해 하지?"

 

"? 그럼 아저씨는 그것이 안 궁금해요?"

 

"안 궁금해. 그냥 하루 눈을 뜨면 사는 거지. 어느 날 눈을 뜨지 못하면 죽는 거고."

 

"참나, 그러면 그런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데요?"

 

".. 그럼 네 생각으로는 삶은 꼭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거니그냥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고, 그것이 그것이 죽을 때까지 반복되면 되는 것 아냐? 삶의 의미와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지 당췌 모르겠다."

 

"그럼 아저씨는 매일 이렇게 연주만 하다가 어느 날 죽으면 끝인 것인가요?"

 

"만약 정말로 그럴 수만 있다면 내 평생 소원이 없겠다. 예술가로써 태어나 평생 연주만 하다가, 무대 위에서 죽을 수 있다면 말이야."

 

"? 그럼 그것 이외에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요?"

 

", 세세하기 바라는 것들은 있지. 맑은 하늘, 기분 좋은 바람, 붉은 노을, 연한 풀 잎, 어느 날 떠오른 끝내주는 악상관객들의 찬사어느 날 우연히 만난 친구와 기분 좋은 식사와 대화그런데 거기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항목은 없네."

 

플라테네스는 바네사 쥰의 말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개미들은 대화 자체를 피하거나 그저 관심이 없어 하거나 정도였고, 여왕은 자신도 그런 질문을 품은 적이 있다고 얘기를 해줄 만큼 자신이 품은 질문은 그저 생각을 하지 못할 뿐,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네사는 왜 그런 질문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런데 정작 플라테네스의 머리 속에는 그것을 명쾌하게 설명할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단 운은 뗐지만 꺼냈지만, 그 뒤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자 바네사가 말을 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널 난처하게 한 모양이네. 내 질문은 별 것 아니니 그냥 무시해도 돼. 그리고 지금부터는 저녁을 먹도록 하자. 내가 개미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해줄 테니까 말이야."

 

바네사는 말을 마치고는 바로 요리를 하러 주방으로 갔다. 하지만 플라테네스는 그의 말과 행동이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늪에 빠진 것과 같았다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칠수록 점점 더 빠져드는, 그런 수렁과도 같은 그런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분명히 맛난 음식을 대접받았지만, 플라테네스는 자신이 먹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를 만큼 멍한 표정으로 식사를 마쳤다. 바네사는 자신이 차린 음식에 대해서 또 다시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의 플라테네스는 전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 후 플라테네스는 천천히 입을 뗐다.

 

"그렇다면 아저씨는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목적이 없어도 된다는 생각해요하지만 작곡을 할 때도, 연주회를 할 때도 모두 목적이 있잖아요. 멋진 노래를 작곡한다든가, 그렇게 작곡한 노래를 연주해서 다른 존재들을 즐겁게 해준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에요. "

 

"그거야 당연히 있지."

 

"그런데 삶에 대한 목적은 왜 필요가 없죠? 결국 삶의 의미는 그 목적으로 인해서 생겨나는데. 그리고 아저씨도 분명히 이름을 지을 때 그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했어요. 저의 이름을 지을 때도 그렇고요. 그러니 아저씨도 사는 것에도 분명히 목적이 있다는 뜻이죠."

 

"맞다. 나도 목적이 있지. 하지만 목적이 왜 꼭 의미가 되어야 하지? 가령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밥을 먹는 것이 꼭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 그렇지 않니?"

 

"그렇긴 하지만, 밥을 먹는 것은 우리를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게 해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먹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제 말도 맞죠?"

 

"그래, 그 말도 맞다. 그래 그렇게 따지면 모든 목적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목적보다 우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너는 먹을 때마다 어떤 의미가 있어서 먹고 있니? 아니잖아. 그저 과거로부터 쭉 먹어왔으니까 먹고먹을 것이 있으니까 먹고, 오늘처럼 맛있는 것을 먹으면 행복하니까 먹지. 그리고 그 결론이 바로 계속 살 수 있는 것이고 말이야. 결국 처음부터 사는 것에 의미가 있어서 먹는 것은 아니잖아."

 

"그건.."

 

플라테네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냥 사는 것은 안될까? 나처럼 매일 행복하게 말이야."

 

"하지만 아저씨는 매일 행복해요? 행복하지 않는 날은 없어요?"

 

"물론 그런 날도 있지. 작곡이 잘 되지 않는 날이나, 비가 너무 오랫동안 오거나 바람이 심한 날도 행복하지 않지. 아픈 날도 있고,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 들려올 때도 그렇지. 하지만 또한 그렇기에 행복한 날이 무척 소중하단다. 그러니 나는 매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그런 행복이 찾아오면 최대한 붙잡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네가 말하는 내 삶의 의미인지도 모르겠구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요? ..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제대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 눈 앞의 목적은 될 수 있지만,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에는 괜히 반감이 들었다. 결국 삶의 끝은 가장 큰 불행인 죽음인데, 행복이 삶의 목적이게 되면 결국 모든 존재의 삶은 목적과는 거꾸로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플라테네스는 그 말을 바네사에게 하고 싶었지만, 대화 내용이 산으로 갈 것 같아서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혹시나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런 차이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떤 차이요?"

 

"사실 나와 너희들 개미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 보여."

 

"뭐가요?"

 

"그것은 바로 나는 매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삶을 사는데, 너희들 개미들은 매일 나와는 달리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 그런데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나는 목적이나 의미가 없어도 되는데 해야 하는 일을 할 떄는 반드시 목적이나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 아냐? 그것이 없으면 해야 할 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플라테네스의 표정은 그 순간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개미들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삶이 그렇지. 너희들이 봄, 여름, 가을 동안 그리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잖아. 그렇게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지. 그리고 빈둥거리는 겨울이나 되어야 겨우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내 연주회를 보러 오는 것 같은 것 말이야."

 

"그럼 이렇게 정리가 되네요.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개미는 봄, 여름, 가을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놀고 먹는 겨울에 그 의미가 있네요. 그때가 바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니까요."

 

"그렇지.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처음부터 왜 해야 할 일이 있지?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거 아냐? 그러니까 그건 이상한 일이야."

 

"이상하다고요?"

 

플라테네스는 바네사가 무엇을 가지고 이상하다고 하는지 정확히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의 말처럼 반드시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일까? 그냥 처음부터 해야 하는 일은 없는 것일까?

 

"만약 겨울이 없다면 너희들 개미들도 평소엔 적당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또한 적당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지도 모르지. 하지만 겨울이 오는 것을 너무도 두려워하기에 봄, 여름, 가을 동안은 그렇게 죽어라 일만 하지. 그렇지 않니?"

 

"꼭 그런 것은 아니고.."

 

플라테네스는 그 순간에 또 다시 개미 #2999을 떠올렸다. 그는 다른 개미들에 비해서는 좀 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개미니까 말이다. 그리고 바네사의 말에 따르면 적당히 요령도 피우고, 자기 욕심도 좀 차리고, 매미포를 꼬불쳐 두기도 하는 그 개미가 자신이나 다른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은 인정을 하기 힘들었다그렇다고 해서 개미 #2999가 싫다거나 그런 삶이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플라테네스는 그를 매우 좋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유는 정확히 몰라도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문제라고 느끼는 것 그 자체가 바네사의 설명처럼 그저 겪어 보지도 못한 겨울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해 뭔가 좀 불안해졌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내가 한 가지만 더 물을게. 내가 네가 그런 질문이 생기는 이유 자체가 오늘이 행복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면, 너는 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제가 가진 질문이 제가 행복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라고요?"

 

"실제로 그럴 수도 있으니까. 원래 행복하며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거든. 나는 그랬거든. 뭔가 잘 안풀려서 우울한 날이 되면 괜히 그런 의미나 가치 같은 것들을 떠올렸지. 하지만 행복해지면 언제 그런 생각을 했느냐는 듯 금세 사라지고 말았어. 그러니까 행복하면 더 이상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어."

 

".."

 

"아까 밖에서 내 연주를 들을 때 이런 생각이 났었니? 그때는 그냥 기분이 좋았으니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을 거야. 분명히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정말로 그랬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그 전에 가졌던 두려움과 불안함에 관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그냥 편해졌었다.

 

"네 표정을 보니 내 말이 맞는구나. 아무튼 내 말이 꼭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네가 품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도움이 되었으면 해."

 

대화는 거기까지 에서 멈췄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서 개미굴을 떠난 플라테네스는 처음 만나 존재를 통해 새로운 질문만 잔뜩 더 떠 앉은 채 생각에 잠겨야 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여정에 관한 근본적 회의감에 빠지고 있었다. 답은커녕 왜 그런 답을 찾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부터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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