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5. 홀로 보내는 밤

아이루다 2018. 10. 23. 08:03

 

플라테네스는 바네사의 대화 후 생겨난 새로운 문제에 사로 잡혀서 새벽녘 무렵까지 잠이 들지를 못했지만,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편안한 잠자리로 인해서 짧은 시간만 자고 일어났어도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고 나서 한참 후에야 자신이 잠들었던 낯선 잠자리를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개미 굴을 떠났다는 점을 비로소 기억해냈다.

 

"일어났니?"

 

플라테네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멀리서 바네사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일어났어요"

 

"그래, 이쪽으로 와. 아침 먹자."

 

플라테네스는 바네사의 말이 전달된 후 머리 속에서 해석이 되기도 전에 이미 코에 달콤한 냄새가 먼저 도착한지라 몸이 먼저 반응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식탁 쪽으로 가까이 가자 거기엔 도대체 어떤 재료를 썼을지 상상하기도 힘든 것들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어제 저녁은 생각에 빠진 채 정신 없이 먹어서 몰랐지만, 오늘 보니 바네사가 먹고 사는 것은 자신이 속한 개미들과는 뭔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개미들이 게으르고, 저렇게 살면 굶어 죽기 딱 좋다고 비웃는 존재인 바네사는 그 어떤 개미보다도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다른 개미들이 알면 뭐라고들 할까? 그는 잠시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식사가 시작되지 그 후로는 완전히 먹는 행위에 빠져들었다. 아침 식사는 그만큼이나 맛있었다.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떠나는 날엔 든든하게 먹어야지."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배려인지 아니면 또 다른 칭찬을 듣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가긴 하지만, 든든하게 먹겠다는 의지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든든하게 먹어졌다. 오히려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가 될 정도로 많이 먹게 되었다. 플라테네스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음식에 대한 칭찬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로 맛있어요. 어떻게 이런 요리를 하실 수 있어요?"

 

"그래? 하지만 이 정도는 별 것 아냐. 내가 마음 먹고 준비하면 이보다도 훨씬 더 맛있는 식사를 준비할 수도 있지. 아무튼 천천히 먹으려무나. 아직도 남은 음식이 잔뜩 이거든"

 

하지만 플라테네스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더 이상 먹지 못하겠다는 듯 두 앞 발을 들었다.

 

"이제 못 먹겠어요. 더 먹었다가는 오늘 하루 동안 걷는 것도 힘들 것 같네요."

 

"그래. 그럼 후식 줄까?"

 

"후식이요??"

 

플라테네스는 후식을 먹을 공간은 따로 있다면서 기어코 후식을 챙겨주려는 바네사를 겨우 말리고 잠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짐을 챙겼다. 이미 밖은 햇살이 가득했고 배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지금 떠나는 것이 좋아 보였다. 아직도 여전히 어디로 갈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 기분 같아서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바네사와 나눈 얘기로 인해서 머리가 더욱 더 복잡해졌고 더해서 자신이 떠난 이번 여행 그 자체에 대한 회의감까지도 생겼지만, 오늘 아침에 맛있는 식사와 맑고 투명한 날씨를 보니 그런 걱정이나 회의감은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벌써 떠나게?"

 

바네사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서운함이 느껴졌다.

 

", 부지런해야죠. 저는 개미니까."

 

"그렇네. 너도 개미니까 부지런해야겠지. 그래, 그럼 잠시만 기다려. 내가 먹을만한 것 좀 싸줄께."

 

참 인정이 많은 베짱이였다. 그 순간 플라테네스는 바네사를 만난 후 자신이 알고 있던 베짱이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었다. 상대를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주어들은 평가로 상대를 판단했다는 것이 말이다. 플라테네스는 다시는 그 누구도 그렇게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데요."

 

확실하게 바네사는 좋은 베짱이지만 무엇이라도 일단 과한 것은 문제였다. 그는 플라테네스의 몸통의 두 배만한 짐을 챙겨서 온 것이다. 저걸 들고 가다간 오늘 하루 내내 열 걸음 걸을 때마다 쉬어야 할 듯 보였다.

 

"그래도 가져가."

 

"안돼요. 반만 주세요. 반이면 어떻게든 들고 가 볼게요."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바네사는 무척 아쉬워했지만 플라테네스가 완강하게 버티자 겨우 짐을 반으로 줄여줬다. 플라테네스는 그가 건 낸 식량 뭉치를 등에 지는 순간 묵직한 느낌이 들면서 지난 여름에 한참 일을 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매미를 잘라서 들고 가던 그 힘들지만 보람찬 시간들 말이다. 그 시간들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지금 이순간에는 아득하기만 했다.

 

"그럼 가볼게요."

 

마지막 인사를 하자 바네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단 하루 맺어진 인연인데도 평생을 사귄 사이처럼 슬퍼하고 있었다. 아마도 예술을 하고 사는 삶을 살기에 그 누구보다도 감성이 풍부한 듯 했다.

 

"답을 찾고 돌아올 때 꼭 다시 내 집에 들려줘. 내가 그 동안 너를 위해 멋진 곡 하나를 작곡해 놓을게. 제목도 이미 지었다. 바로 '플라테네스의 가을 여행' 이야.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상대적으로 무덤덤하던 플라테네스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래요. 꼭 다시 들릴게요. 제가 답을 찾든 못 찾든 상관없이 이 길을 다시 지나가게 되면 반드시 말이에요. 그리고 또 맛있는 식사와 멋진 음악을 들을게요. 저도 그 시간들이 많이 그리울 거에요."

 

"그래, 조심하고. 숲은 위험한 것이 많으니까. 그리고 밤엔 절대로 돌아다니지 말도록 해."

 

", 그럴게요. 그럼 다음에 꼭 다시 봬요."

 

플라테네스는 무겁긴 하지만 견딜만한 짐을 들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딱 한번 뒤돌아 봤는데 바네사는 여전히 집 앞에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힘들지만 자신의 앞발을 흔들어주고는 그 뒤로부터는 열심히 앞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아침의 태양을 향하기로 했다.

 

쌀쌀했던 날씨는 정오가 지나면서 제법 따뜻해졌다. 그리고 생각하지 못하게 커다란 짐을 들고 다니게 된 플라테네스는 덥기까지 했다. 그래서 오전 내내 걸은 후 근처 나무 밑에 그나마 서늘하고 안전해 보이는 장소를 골라서 점심을 먹었다. 비록 홀로 먹는 밥이지만 바네사의 친절함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오후에도 열심히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오후 내내 걷다가 보니 이제 곧 어둠이 밀려올 시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플라테네스는 또 다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제는 그나마 운이 좋게 행복한 베짱이 바네사를 만나 안전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구했지만 그런 행운은 매일 일어나기는 힘들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로 처음으로 홀로 노숙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물론 비록 처음 하는 것이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선배 개미들을 통해서 이미 어느 정도 요령은 알고 있었으니 지금은 경험이 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지식은 언제나 두려움을 낳는 것도 사실인지라 플라테네스는 견딜만한 두려움 속에서 노숙을 준비하기로 했다.

 

플라테네스는 일단 먼저 근처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나무를 골랐다. 그리고 뿌리 밑으로 들어가서는 거기에서부터 땅을 파기 시작해서 최대한 밑으로 팠다. 하루 종일 걸어서 피곤한 몸인지라 매번 하던 땅을 파는 것 조차도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몸에 익혀진 숙련된 몸짓으로 빠르게 구멍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적당한 깊이로 자신이 잠을 잘만한 공간이 생겼다. 너무 넓게 파봐야 입구를 숨기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고, 너무 깊이 파는 것도 그것이 안전함을 보장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입구를 없는 듯 보이게 하느냐라는 것이란 점을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주변에서 넓고 얇은 돌멩이 하나를 찾아다가 입구를 막는 방법으로 최종 결정을 했다. 그렇게 해두면 아마도 밖에서 보면 자신이 숨은 굴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일 것이다. 실제로 그럴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단 그럴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래야 적어도 두려움이 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대충 잘 곳을 정리하고는 안쪽으로 들어와서 남은 먹이를 먹었다. 그리고 온 종일 지친 몸으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잠은 쉽게 오질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가을 밤을 가득 채우는 풀벌레 소리들이 가득했고, 가끔 커다란 새 울음 소리가 들리기도 했기에 플라테네스의 정신이 좀처럼 편안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오늘이 개미 굴을 떠난 지 이틀째이지만 사실상 홀로 자는 것은 첫 번째인 날로 그가 감당해야 할 긴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피곤했기에 비몽사몽간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뭔가 반복되는 듯한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플라테네스는 여전히 잠결이지만 자신의 두 더듬이를 땅 쪽으로 붙여서는 이상한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플라테네스는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잠에서 깰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난생 처음 경험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그 소리는 땅 위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잠자리를 만든 땅 밑에서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테네스는 그 순간 결정하기 힘든 갈등을 느껴야 했다. 빠르게 밖으로 도망쳐야 할지,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서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숨어 있어야 할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과 갈등 속에서 사실상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결국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가만히 있으면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 강제적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땅 밑이 꺼지면서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일단 다행인 점은 그리 많이 추락하지 않았다는 점과 개미는 웬만한 높이에서 떨어져도 거의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점이다. 더해서 어디든 올라가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떨어진다는 것 자체는 그리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공간에 놓인 것은 방금 전까지 경험했던 두려움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그래서 플라테네스는 재빠르게 자신이 추락한 곳의 바닥에 바짝 몸을 낮췄다. 그리고는 최대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너무 어두운 탓에 거의 아무런 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두 더듬이를 이용해서 최대한 주변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자신이 추락하기 전에 들렸던 소음은 완전히 멈췄지만 그는 자신이 추락한 공간이 꽤나 넓으며 더해서 그 공간에 자신이 이외에 누군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땅 밑에 이런 거대한 공간이라면, 그 존재의 몸 크기는 적어도 자신보다는 한참 더 클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분명히 위기 상황을 의미했다. 플라테네스는 점점 더 커다란 두려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때였다. 잔뜩 웅크린 플라테네스의 눈에 어둠 속에서 녹색으로 빛나는 두 개의 커다란 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눈 사이의 거리는, 한 눈에 봐도 플라테네스의 몸 전체 길이보다도 더 커 보였다. , 그 말은 그 괴물체가 그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라는 뜻이었다. 플라테네스는 자신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심장이 멎을 듯 했다. 그리고 그는 괴물체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쳤다. 다행히 상대는 자신을 못 알아 본 듯 아무런 반응도 하질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공포스러운 침묵의 순간이 이어졌다.

 

플라테네스는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긴장감이 풀리고 그 거대한 상대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이젠 조금 용기를 내어서 상대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래서는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상대 쪽을 향해 다가갔다. 어떤 식의 결말이 나든 지금 이대로 있는 것은 결국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으니까 말이다.

 

"살려주세요."

 

그 순간 갑작스럽게 가냘프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라테네스는 처음엔 그것이 환청으로 느껴졌지만 자신이 좀 더 앞으로 갈수록 그 목소리는 같은 말로 더욱 급박하게 반복되었기에 그것이 눈 앞의 괴물체로부터 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플라테네스는 속으로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두려움 일부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좀 더 과감하게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의 끈은 놓지 않았다.

 

"누구세요?"

 

플라테네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발 저를 해치지 마세요."

 

"그럴 생각이 없는데, 도대체 누구세요?"

 

"제 실수에요. 저는 당신이 위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땅을 파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당신의 말에 따르면, 땅을 파다가 우연히 내가 자고 있던 공간 밑을 파고 말았다는 뜻인가요?"

 

", 맞아요. 개미님"

 

어둠 속의 존재는 이미 플라테네스가 개미임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제가 딱히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 당신을 확인할 수 있게 좀 더 다가갈게요. 너무 겁먹지 말아요."

 

플라테네스는 이번엔 상대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커다란 눈을 가진 존재의 형체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것 같으면서도 전혀 낯선 존재였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세요?"

 

플라테네스는 그 순간 상대의 정체가 정말로 궁금했다.

 

"저는.. 매미에요."

 

상대방의 답을 듣는 순간 플라테네스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자신이 아는 매미는 이렇게 생긴 적이 없었다. 적어도 여름 내내 몇 주간 그가 처리한 매미들 사체들은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스스로 매미라고 말을 하고 있는 이 존재는 뭘까? 그는 혼란스러움과 함께 상대에 대한 커다란 궁금증을 느꼈다.

 

"당신은 매미이군요. 그런데 왜 저를 그렇게 두려워하죠? 저는 오히려 그쪽이 두려운데 말이에요."

 

"그거야 개미들은 매미를 먹으니까 그렇죠. 저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혼자이지만 곧 동료들이 와서 저를 갈기갈기 찢어서 먹이로 삼겠죠. 그렇지 않나요? 제가 땅을 파다가 실수로 개미 굴을 건든 것이잖아요."




 

플라테네스는 그제서야 비로소 상대방의 두려움이 이해가 갔다. 그럴 만 했을 것이다. 정말로 상대가 개미굴을 잘못 건드렸다면진짜로 살아 있더라도 금세 분해되어서 먹이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매미들이 죽은 후 먹이가 되는 이유는, 그저 살아 있는 동안엔 나무 위에 있어서 개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서일 뿐이다. 상대가 매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떤 곤충이든 개미 무리에 걸리면 답이 없다는 사실은 플라테네스가 속한 개미들에게는 커다란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저는 혼자 있거든요. 그래서 제 동료가 오거나 하지 않아요."

 

"정말이요? 왜요? 왜 혼자 있어요? 제가 듣기로는 개미는 늘 단체로 생활한다고 하던데."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제가 사정이 있어서 개미 굴을 떠나 여행을 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오늘 땅 밑으로 굴을 파고 자고 있었는데 또 우연히 그 밑의 땅을 파고 있던 당신과 연결이 되어 버린 것이죠."

 

".. 그렇군요. 그럼 제가 이제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 오히려 제가 더 무섭죠. 당신의 덩치는 저보다 한참을 더 크니까 말이에요."

 

"물론 그렇긴 해요. 하지만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아요. 저희 매미들은 나무 수액만 먹을 뿐 개미를 잡아 먹거나 하지는 못해요. 물론 개미들은 저희들을 먹지만요."

 

상대는 개미들이 자신들을 먹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해서 설명했다.

 

"저는 이미 먹을 것을 충분하니 당신을 먹을 생각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저 혼자서 어떻게 당신을 어떻게 해보겠어요. 그러니 안심해요."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네요. 그럼 좀 더 가까이에서 봐요."

 

경계를 완전히 푼 것은 아닌 듯 상대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서로 가까워지자 그제서야 플라테네스는 상대가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가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존재는 확실히 자신이 알던 매미와는 다르게 생겼지만 뭔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제 생김새가 이상하죠? 저는 보통 매미라고 알려진 상태가 되기 전, 유충 상태의 매미에요. 제가 땅 위로 올라가서 껍질을 벗고 우화를 하면 그때가 바로 흔히 보이는 매미가 되는 것이죠."

 

", 그러면 성충이 되기 전 매미이군요."

 

플라테네스는 그제서야 전체적인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지금 우연히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우화를 해야 하는 매미가 땅을 파고 올라가던 만난 것이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되자 이제는 마지막 남은 두려움마저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다이제는 상대에 대한 궁금증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지금 시기까지.."

 

플라테네스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궁금증은 바로 시기였다. 이미 마지막 매미가 떨어진 때로부터 꽤나 날짜가 지난 후였다. 그런데 아직도 우화조차 못하고 있는 매미가 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미 가을이 된지가 한참인데 왜 아직도 우화를 못했냐고요?"

 

"그렇죠. 제가 알기로 매미들은 이미 다 먹.. 아니, 사라졌는데.."

 

플라테네스는 다 먹이가 되었다는 표현을 하려다가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 그것을 설명하려면 복잡해요."

 

상대는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듯 했지만 그것을 딱히 설명하고 싶어하지는 않는 듯 했다. 플라테네스도 상대가 말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그것이 궁금해도 누구나 말하기 싫은 자신만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서로 인사나 해요. 저는 플라테네스라고 해요."

 

바네사에게 이름을 받은 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그것을 소개를 했다. 기분이 좀 묘했지만 이렇게 번듯한 이름이 하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 듯 했다.

 

"플라테네스라고요? 예쁜 이름이네요. 저는 이름이 안 예뻐요. 저의 이름은.. 매국이에요."

 

"매국이라.. 제가 얼마 전 만난 분에게 듣기로는 이름은 자신의 목적이나 이루고 싶은 꿈으로 짓는다고 하는데, 그럼 나라를 팔아 먹는 것이 꿈인가요?"

 

"그게 아니라, 매란국죽을 따서 만든 이름이에요. 제가 세째라서 그렇게 이름이 그래요."

 

고분고분하게 말을 하던 상대는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설명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형제들이 매매, 매란, 매국, 매죽 인가요?"


플라테네스는 말을 하면서도 참 이상하게도 이름을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요. 아무튼 이름 가지고 놀리지 마세요."


"미안해요. 그냥 농담 한 것이에요."

 

"! 그런 농담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정말로 미안해요."

 

"두 번 미안하다고 했으니 사과는 받아 줄게요."


그것이 무슨 원칙인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매국의 목소리는 나아졌다.

 

"다행이네요. 그럼 지금부터 또 다시 땅을 파서 위로 올라갈 거에요?"

 

", 꼭 그럴 거에요. 그것은 제가 가야 할 길이니까 말이에요."

 

", 그래요 그럼. 저는 어차피 떨어진 김에 여기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에 올라가도록 할게요. 잠을 좀 자야 하니까 저는 저쪽 구석으로 갈게요. 가던 길 가세요. 행운을 빌어요."

 

플라테네스는 이미 다른 매미들이 다 사라진 지금, 눈 앞에 있는 매국이 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때로는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는 점이 하나 있긴 했다. 그것은 바로 왜 지난 여름 동안 땅 위로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다. 분명히 사정은 있겠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지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또 다시 잠이 들어서는 눈을 뜨니 아침이 되어 있었다. 비록 좁은 굴이지만, 위쪽으로부터 작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뜬 플라테네스는 최대한 빠르게 올라가서 자신이 막아두었던 입구의 돌을 치웠다. 그러자 동굴 밑부분까지 빛이 스며들어왔다. 새벽 공기는 몹시 차가웠지만 땅 속의 온도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던 탓에 다시 밑으로 내려오니 견딜 만 했다. 아침은 되었지만 그가 떠날 만큼 따뜻해지려면 잠시 기다려야 할 듯 했다. 그래서 아침이나 먹기로 결정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어제 만났던 매국이 떠올랐다. 이미 땅을 뚫고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자신의 위로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의 커다란 몸이 빠져나가려면 아무래도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할 것이 분명했지만 그런 구멍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매국은 어제 그 후로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플라테네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어제 매국이 처음 서 있었던 장소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기에 도착하자 그 뒤쪽으로 그가 뚫고 온 것으로 보이는 넓은 통로가 보였다. 플라테네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쪽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작별 인사는 하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후로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결국 매국을 발견했다. 그는 잠을 자고 있는 듯 거의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매국님."

 

그가 매국을 부르자 커다란 몸에 작은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리고 잠시 후 상대는 몸을 돌려서 플라테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커다란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자고 있던 것이 아니라 울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왜 울어요?"

 

"흑흑.. 저는 겁쟁이에요. 아무 것도 못하는 겁쟁이, 살아있어 봐야 어떤 가치도 없는 존재에요. 저 같은 것은 죽어야 해요. 살아봐야 어떤 의미도 없으니까요."

 

매국은 화를 내면서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플라테네스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끝없이 흘러나오는 상대방의 넋두리를 듣고만 있어야 했다.

 

"도대체 왜 그래요.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비난해요? 얘기를 해봐요. 내가 들어줄 테니까."

 

결국 플라테네스는 궁금하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해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매국은 깜짝 놀라면서 비로소 말을 멈추고는 플라테네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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