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3. 세상으로 나가다.

아이루다 2018. 10. 14. 10:15

 

딱히 환송식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미 굴에 있던 다른 개미들은 처음부터 그의 떠남에 대해서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뒷말로 '도대체 쟤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정도의 정서들만이 공유되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것 조차도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개미들에만 한정된 것이고, 대다수의 개미들은 사실상 일개미 #3470에 대해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개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동하고 사는지에 대해서 원래부터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들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한, 그런 개미들이었다.

 

가을이 시작된 후 날은 빠르게 추워지고 있는 시기였기에 일개미 #3470은 여왕의 조언처럼 차분히 생각하고 결정할만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기에 또한 이렇게 빠르고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생각했다면 오히려 두려움에 굴복해서 떠나지 않은 결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일개미 #3470는 여왕과의 만남 후 딱 삼일 만에 최종 결론을 냈다그 누구도 상의할 상대가 없었기에 오직 홀로 그 결정을 했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준비를 시작해서 이틀 만에 떠나는 날이 된 것이다.

 

일개미 #3470에 관련된 이야기는 개미 굴에 작은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대다수는 무관심했고 몇몇만 그를 찾아와서는 조언을 가장한 참견을 하고 갔다. 그리고 일개미 #2999도 그들 중 하나였다.

 

"오늘 떠난다며?"

 

일개미 #2999는 일개미 #3470가 기거하는 곳에 들어오자 마자 삐딱한 자세로 말을 걸었다.

 

", 그렇게 되었네요."

 

"결국 지난 번에 나에게 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가는 거야?"

 

", 결국 그런 셈이죠."

 

"? 여왕님도 모른 데그분하고 만나서 충분한 답을 얻지 못한 거야?"

 

".. 그 말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리네요. 여왕님은 직접 답을 주시진 못했지만,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셨거든요. 그분의 말에 의하면, 세상 속으로 나갈 때 그 답을 찾을 수 있데요."

 

일개미 #3470는 일부러 두려움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는 것'과 같은 듣기에 멋지고 뭔가 있어 보이는 표현들이 있는데 지금 괜히 상대에게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봐야 말리기 밖에 더 하겠는가?

 

"날씨가 많이 추워졌던데.."

 

일개미 #2999는 약간의 걱정이 담긴 혼잣말을 했고, 일개미 #3470는 그런 그의 말이 고마웠다.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밖에서 겨울을 나야 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가을은 아직 좋은 때죠."

 

"그렇구나. 너 정말로 겨울을 밖에서 보낼 생각이구나. 나는 그래도 눈이 오기 전에는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답이라면, 처음부터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겠죠. 누구나 그 답을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그래, 그 말도 맞다. 아무튼 이것이나 챙겨가라."

 

일개미 #2999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그것은 매미의 몸통 중에서 가장 맛있는 부위를 잘 말려 놓은 것이었다.

 

"이게 뭐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난 것인지 몰라서 물었다. 개미들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식량을 챙기는 것은, 그것이 걸리면 엄청난 벌을 받는 것이기에 일개미 #3470가 그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수는 없었다.

 

"묻지 마. 그냥 지난 여름에 애써서 꼬불쳐둔 것인데, 가다가 먹으라고. 뭐해 빨리 넣지 않고. 남들이 보면 어떻게 하려고."

 

일개미 #2999는 자신의 한 짓에 대한 부끄러움과 상대에 대해 베푸는 선의 사이의 오묘한 갈등이 섞인 표정으로 앞발로 쥔 말린 매미포를 흔들었다.

 

".."

 

일개미 #3470는 그 매미포가 어떤 경로로 자신에게 전달되는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그냥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신경 써줌이 매우 고맙기도 했다.

 

"그래, 난 간다. 너도 준비 잘해서 떠나."

 

일개미 #2999는 매미포를 건네자 마자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이것을 주려고 온 듯 했다일개미 #3470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참 좋은 개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꼭 맛있게 생긴 매미포를 챙겨줘서 드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준비가 다 끝나고 익숙한 굴을 따라 밖으로 빠져 나와니 쌀쌀하지만 따뜻한 햇살이 그를 반겼다. 하지만 어디로 갈 것인가? 일개미 #3470 그 순간 여정의 시작점에서 길을 잃었다. 그것도 자신이 매일 드나들던 개미 굴 바로 앞에서 말이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단순한 결정을 하나 내렸다. 그것은 바로 해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 어느 방향도 자신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그 어느 방향도 자신의 목적지였으니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옳은 것이 될 수 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등에 진 짐은 잔뜩 이었지만, 일단 결정이 되자 마음은 가벼워졌다. 그런 생각으로 길을 걷다가 보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날은 맑았고, 햇살을 따듯했고, 아직은 여전히 자신이 매일 다니던 길이어서 겁도 나질 않았다. 미지의 대상을 향해 떠난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커다란 기대감과 흥분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을 그는 그날 처음으로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몇 시간을 걸쳐 걷고 나니 다리는 점점 더 아파오고또한 이제는 개미 굴을 한참 벗어났기에 주변이 온통 낯설고, 등에 짐의 무게는 끝없이 그를 짖눌러 왔다. 그가 느꼈던 처음의 호기로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점점 더 지치고, 피곤하고, 두려워졌다. 그가 따라 걷고 있는 해는 이제 얼마 후 산 밑으로 내려갈 듯 많이 낮아져 있었다.

 

일개미 #3470는 갑자기 해가 지는 것이 너무도 두려워졌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목적점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해가 지고 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가지 걱정거리가 머리 속을 파고들자 그것은 그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두려움은 떠나온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를, 후회는 자신에 대한 불신을, 불신은 자신의 삶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머리 속은 두려움, 후회, 불신 등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 걷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는 조그만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근처 나무 밑으로 가서 힘없이 쪼그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부정적인 생각들은 좀처럼 떨쳐지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다시 자신의 굴로 돌아가고 싶었다. 익숙하고 안전하고 외롭지도 않은 그곳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갈등하면서 있는 도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일개미 #3470는 갑자기 찾아 온 목소리 덕분에 겨우 생각이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목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생전 처음 보는 어떤 존재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말이에요?"

 

"그럼 당연히 너지너 말고 여기에 누가 있겠어."

 

"왜요? 왜 저를 불렀어요?"

 

"왜 불렀냐고? .. 잠시만. 내가 그 이유를 생각해 낼 동안 잠시만 기다려."

 

일개미 #3470는 조금 황당했지만그제서야 상대를 자세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자신보다는 열 배 이상은 크고 온몸이 녹색을 띤 몸을 가진 존재였다. 앞쪽 두 더듬이 역시도 같은 녹색으로 길게 나와있었고 뒤쪽으로는 아주 긴 뒷다리 한 쌍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보기엔 그 동안 봐왔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식량으로 삼아왔던 다른 곤충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긴 했는데, 일개미 #3470는 그를 살펴보면 볼수록 이미 어디에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서 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 속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 그래생각났다지금부터 내 연주를 좀 들어봐 달라고. 이번 가을을 맞아 내가 새롭게 작곡한 곡이야. 곡명은 가을 여행이지."

 

그는 상대의 허가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는 바로 자신의 몸을 비비면서 연주를 시작했다. 일개미 #3470는 그의 그런 행동에 조금 당황했지만음악 소리를 듣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점점 그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마음 속에 가득 찬 불안함이 조금은 사라짐을 느끼면서 어느 정도 편해졌다.




 

"어때?"

 

일개미 #3470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상대는 일개미 #3470를 바라보면서 매우 기대가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좋지 않았다고 대답을 했다간 한바탕 눈물이라도 흘릴 기색이었다.

 

"좋았어요. 특히 후반부가 좋았어요."

 

일개미 #3470는 자신이 느낀 대로 말했다.

 

"좋았어? 그러지 말고 좀 더 제대로 표현해 봐. 단순하게 아주 좋았다, 정말로 좋았다, 너무도 좋았다, 같은 표현들이 있고, 환타스틱했다, 내가 경험한 최고의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역시나 지상 최고의 연주였다, 같은 좀 더 멋진 표현들이 있잖아. 너는 이것들 중 어떤 것을 쓰고 싶어?"

 

일개미 #3470는 좀 당황했다. 자신이 스스로 연주를 하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그것도 정해진 단어들을 나열해서 강요하는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우연히 주변을 지나가던 개미를 붙잡고서 말이다.

 

"아주 좋았어요."

 

그래도 괜히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어떤 식으로든 상대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이다. 더군다나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좋은 말 해주는 것이 뭐가 그리 문제이겠는가?

 

"그렇구나."

 

일개미 #3470는 나름대로 좋은 말을 해줬지만, 상대는 오히려 실망하는 듯 했다.

 

"왜 그래요? 아주 좋았다는데."

 

"너는 내가 말한 것들 중 가장 흔한 표현을 선택했어. 그것은 내가 한 말 중에서 어쩔 수 없이 하나를 골랐다는 뜻이야."


"? 그것이 무슨 말이에요."

 

"원래 그래. 아무튼 네가 정말로 감동을 했다면 내가 한 표현들 말고 또 다른 것을 말했을 거야. 하지만 괜찮아. 솔직한 평가를 듣는 것도 가끔 필요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의 평가를 모두 신뢰하는 것은 아니야. 나 역시도 너를 평가하니까 말이야."

 

일개미 #3470는 속으로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상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지금껏 대화를 해왔던 개미들과는 전혀 다른 정신 세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누구세요?"

 

"? 정말로? 진심으로 묻는 거니?"

 

", 누구세요?"

 

"나를 몰라? 그런데 네 표정을 보니 정말로 모르는구나. 그럼 너는 올해 태어난 개미임이 틀림없어. 아니라면 이 근방에서 나를 모르는 개미가 있을 수가 있나."

 

어디에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일개미 #3470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바네사 쥰이라고 해. 이 근방에서 가장 연주 실력이 뛰어난 베짱이지."

 

일개미 #3470는 그 순간 머리 속에서 뭔가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베짱이. 들어봤어. 여름 내내 노래만 부르고 놀다는 그 게으름뱅이.'

 

"네 표정을 보니 다른 개미들에게 나에 대한 이상한 얘기를 많이 들었나 보구나."

 

", 그것은 아니고.."

 

일개미 #3470는 일순 당황스럽고 상대에 대해서 괜히 미안하기도 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들었던 소문만 머리 속에 떠올리다니,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상관없어. 그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 나는 그냥 나니까."

 

"그렇죠. 맞아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일개미 #3470는 알고 있었다자신은 이미 상대를 판단한 후라는 것을 말이다더군다나 바네사 쥰?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것인데, 그 이름부터 이상했다.

 

"그런데 왜 이름이 바네사 쥰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이름이니까 그렇지."

 

"그럼 베짱이들은 우리들 개미처럼 #1234 라는 식으로 이름을 짓지 않아요?"

 

"뭐라고? 무슨 소리야. 그것이 무슨 이름이야. 이름은 너만의 고유한 것이며 너를 정의하는 것이어야지. 너희들 개미들이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저 태어난 순서 번호일 뿐이야. 그것은 절대로 고유한 것이 될 수 없지. , 그렇고 말고."

 

자칭 바네사 쥰은 꽤나 확신 있게 답을 했다. 그러자 일개미 #3470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제가 저 자신을 일개미 #3470 라고 칭하는 것은 저만의 고유한 명칭이 아니란 뜻인가요? 제가 살던 곳에는 저와 같은 번호를 가진 개미는 없는데요?"

 

"너는 일개미 #3470 이니? 그래. 그것은 너희들 개미 사회에서는 편리한 호칭이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너의 고유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너는 분명히 개미이지만 개미라는 사실이 너를 정의하게 할 수는 없어. 너는 개미가 아닌 존재거든."

 

"? 무슨 말이에요? 제가 개미가 아니라니?"

 

바네사 쥰은 대답 대신 일개미 #3470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것을 설명해주긴 너무 복잡하고, 언제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러지 말고 생각난 김에 너의 이름을 짓자. 그것은 어때? 너만이 고유한 이름 말이야. 얼마나 멋진 일이니?"

 

일개미 #3470는 상대방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안 왔지만, 상대는 이미 수 많은 이름들을 나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도대체 이 베짱이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름을 정하자는 그의 말에 괜히 마음이 끌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잠시만요, 질문이 있어요."

 

일개미 #3470는 질문을 해서 일단 상대의 입을 막았다.

 

"뭔데?"

 

"이름은 어떻게 지어요그것을 하는 데 어떤 규칙 같은 것이 있어요?"

 

"그런 게 어딨어. 그냥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정하면 돼. 그런데 넌 왜 지금 여기에 있지? 지금쯤이면 다들 개미 굴로 되돌아가 있어야 할 시간인데?"

 

바네사 쥰은 원하는 답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는 또 다시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게, 저도 설명하려면 복잡해요. 아무튼 저는 개미 굴을 떠났어요. 그리고 오늘이 그 첫날이고요."

 

"그래? 그럼 묻지 않을게자기 만의 사정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니까그런데 방금 좋은 생각이 났어. 네가 개미 굴을 떠났다니까 든 생각인데, 너의 이름을 '플라테네스' 라고 하는 것이 어때? "

 

"플라테네스요? 그것이 무슨 뜻이에요?"

 

"해석하면 방랑자라는 뜻이야. 네가 개미 굴을 떠났으니 너는 방랑하는 존재잖아. 그러니 그 이름이 너한테 어울려."

 

".. 그리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은데요.."

 

"뜻이 중요한 것이 아냐. 그냥 듣기에 좋으면 되는 거지."

 

"뭐에요. 아까는 이름은 자신의 고유한 명칭이며 존재를 정의하는 것이라면서요. 그런데 단순하게 듣기 좋다고 이름을 그렇게 정해요?"

 

"일단 이름을 그렇게 정하고 나서 네가 그 이름에 맞춰서 살면 되는 거지. 그 순서가 뭐가 중요해."

 

듣기에 따라 다소 억지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면 제가 스스로 저의 이름을 방랑자라는 뜻을 가진 플라테네스라고 짓고는 그렇게 방랑하면서 살라는 뜻인가요?"

 

"너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목표를 먼저 세우고 행동해왔잖니? 그러니 이름을 자신의 목표로 정하는 것이 뭐가 이상해? 나는 어려서부터 최고의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 유명한 연주자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말이야."

 

"바네사 쥰이 그런 뜻으로 정해진 이름이에요?"

 

"그래. 그래서 나의 이름은 나의 목표이지."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정해요. 사실 어떤 이름으로 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요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저 자신을 일개미 #3470라고 칭해왔던 것이 괜히 이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긴 하네요. 그리고 아저씨가 제안한 플라테네스는 그 의미는 좀 그렇지만 마음엔 들어요."

 

"그렇지? 그래, 내가 이름 하나는 잘 짓는다니까. 고맙지?"

 

", 고마워요."

 

"그럼 아주 고맙니, 정말로 고맙니, 너무도 고맙니.."

 

"아주, 정말로, 너무도 고마워요. 됐죠?"

 

바네나 쥰은 플라테네스란 이름을 갖게 된 일개미 #3470의 약간은 놀리는 듯한 반응에 멋쩍게 웃고 난 후 대꾸를 했다.

 

"그럼 오늘은 내 집에서 자고 갈래? 이미 해도 졌는데, 어둠 속에서 숲을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니까 말이야. 늘 개미 굴에서 밤을 보냈던 너는 잘 모르겠지만, 밤의 숲 속은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거든."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에 해는 이미 서쪽 산으로 넘어가있었다. 플라테네스로서는 바네사 쥰의 제안이 오히려 그 자신이 먼저 부탁해야 할 내용이었다. 그는 그 순간 진심으로 고마웠다.

 

", 저야 그러면 '정말로' 감사하죠."

 

이번엔 진심을 담아서 말했고 바네사 쥰은 그의 마음을 읽은 듯 활짝 웃었다.

 

"나를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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