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두려움의 성격, 지루함의 성격

아이루다 2018. 8. 16. 07:46

 

사람은 누구나 생존본능을 타고 난다. 그것은 꼭 사람이 아니라 생명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생존본능은 살고 싶은 욕구이다.

 

생명체는 왜 살고 싶을까? 당연히 죽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죽고 싶지 않을까?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죽어 본 적이 없지만, 죽음은 생각조차 하기 싫을 만큼 두렵게 느껴진다.

 

손끝만 살짝 베어도 그리 아픈데 죽음에 이를 정도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래서 죽음의 고통이 두렵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아끼던 것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이별을 해야 한다. 물론 사후 세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장 이별을 해야 한다. 그것은 참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남겨두고 가야 한다.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떠날 수도 있다. 운이 좋게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자신이 책임지던 모든 이를 다 떠나 보내고 가는 길은 홀가분할 수 있지만, 그런 죽음은 그리 쉽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육체적 고통이, 존재의 소멸이, 이별의 아픔이 더 두려울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두렵다는 사실 그 자체는 그리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움의 연속이다. 두렵기에 태어나자마자 울고, 두렵기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죽고 싶어한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과정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나마 어느 정도는 싸우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삶을 등지고 만다. 또 다른 이들은 누구보다도 두려움과 제대로 맞서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그 삶을 일찍 마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떠난 이들을 바라보는 남은 사람들은 슬픔도 느끼지만 더욱 더 자신의 두려움이 버거워짐도 느낀다. 자신이 도대체 어떤 존재를 상대하는지를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확실히 각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두려움으로 인해서 삶은 언제나 죽음과 최대한 멀어지는 방향으로 향한다. 걱정과 불안을 최소화 시키는 방향을 향한다. 그리고 결국엔 죽음이나 두려움을 최대한 떠올리지 않고 살길 바란다. 그래서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면 그 상태를 '행복하다' 라고 표현한다.

 

행복해지려는 시도는 어느 정도는 성공한다. 하지만 죽음과 그것에 관련된 두려움이 영원히 사라질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죽기에 그렇다. 그리고 언제라도 죽을 수 있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잊고만 살 수 있다면 그다지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

 

지금 이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해졌기 때문에 더욱 더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언제나 두려움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꽤나 심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정도도 심하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정도도 서로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겁이 적은 사람이 있고, 겁이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겁이 많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큰 사람이다. 하지만 두려움이 크다고 해서 누구나 겁이 많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용기이다.

 

용기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힘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두려움으로 인해서 생겨난 극심한 스트레스이다. 죽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미친 듯이 달리거나, 강도가 칼로 찌를 때 그 칼날을 잡을 수 있는 힘이다.

 

용기는 두려움으로부터 생겨나는 강력한 에너지이다. 그래서 덕분에 그 두려움을 견뎌낼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이겨낼 수도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용기는 자칫하면 만용이 될 수 있어서 그렇다. 더군다나 그것이 진정한 용기인지 만용에 불과한지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어떤 용기가 만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타고난 능력들에 대한 제대로 된 파악이 필수적이다.

 

달려오는 자동차 앞에서 서 있는 것은 만용이다. 인간의 육체는 달려오는 자동차와 부딪히면 파괴될 뿐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 온 강도와 맞서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가능하다. 특히 평소에 무술을 배운 사람이라면 더욱 더 그럴 수 있다.

 

이렇게 두려움은 타고난 정도가 다르고,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에 따라서 대처 가능성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이 두 요소는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결국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을 구성하게 된다.

 

타고난 두려움이 큰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신의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 삶이 두려움 속에 있다. 그래서 안정과 평화로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타고난 두려움이 적은 사람은 두려움을 덜 느끼지만 그로 인해서 새로운 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 사라진 곳을 채우는 지루함이다. 그래서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안정보다는 흥분, 평화로움보다는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진 성격의 가장 큰 분류이다.

 

삶이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사람들은 책임과 의무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반복성'이다. , 이들은 매일 같은 일을 하고, 매일 같은 것을 먹어도 그다지 지루해 하지 않는다.

 

장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한 주변의 신뢰도가 높다. 반복이란 말이 가진 의미는 어떤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낮다는 것과 어떤 일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를 과거의 사례를 통해서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제까지 잘 먹던 냉면을 오늘 갑자기 싫다고 말할 일이 없다한번 돈을 꿔줬을 때 잘 갚으면 다음에도 돈을 꿔도 잘 갚을 것이다.

 

그래서 삶의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점점 더 안정화 된다. 그리고 그 안정은 노후로 갈수록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는 삶보다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산 사람이 훨씬 더 안락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하고 싶은 것들은 대부분 몸이 따라줘야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

 

단점도 분명히 있다. 반복적이기에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이 지루함을 느낀다. 또한 어떤 이유로 생겨난 버릇이나 습관을 평생 고수하려고 한다. 도전하거나 혹은 자신의 삶을 변화 시키려는 욕구를 거의 느끼지 못하기에 확실하게 책임과 의무는 다하지만, 신뢰는 있지만, 늘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된다.

 

삶을 지루함을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진 사람들은 욕망과 에너지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확실히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예측불허 성' 이다. 이들은 하루만 같은 것이 반복되어도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매일 뭔가 조금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한다.

 

장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삶이 행복을 향하고 있기에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욕망을 품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에너지가 넘친다. 주변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기 쉽고 인기도 많을 수 있다.

 

어제는 영화 보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해 놓고서는 오늘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 지상 과제인 냥 군다. 내일은 또 맛집을 찾아가려고 안달이 난다.

 

이런 것들이 매일매일 달라진다. 예측 불가능하긴 하지만 그렇기에 재미가 있다. 즐겁다. 얼굴에 활기가 가득 차 있으며 보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웃게 만든다.

 

단점도 분명히 있다. 일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꾸준히 노력해서 해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책임이나 의무보다는 욕망을 우선시 하기 때문에 미래로 갈수록 점점 더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해야 할 일 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흐름은 두려움과 지루함에 관련된 전형적인 성격 유형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단순하게만 구성되지 않는다. 이미 설명했듯이 타고난 능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단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타고난 능력이 그것을 제대로 해결 할 상황이 되지 않으면 아주 큰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내일 굶어 죽게 생겼는데 돈을 벌어서 먹을 것을 구한 능력이 되질 않는다면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두려움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하게 되기에 그렇다.

 

물론 사람들의 두려움은 이렇게 원초적이지는 않다. 먹고는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남들만큼 살지 못하거나, 계속 손해를 볼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비록 그것이 내일 밥을 먹지 못하는 수준의 두려움은 아니지만, 이것들 역시도 큰 두려움의 대상이다.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두려움을 느꼈는데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되질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아니면 그 두려움에 눌려서 삶이 아주 힘들어질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진 능력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인정을 받고, 남들보다 잘 살고, 이득만 보고 살면 된다. 하지만 하고 싶어도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을 쓴다.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 그나마 조금 더 잘하는 것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이다. 또한 조그만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사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의 의도는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는데 아주 이상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각각 열등감, 질투, 피해의식이다. 우월감은 열등감을, 비교는 질투를, 손해를 보지 않고 싶어하는 마음은 피해의식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평생 삶을 좀 먹는다.

 

그냥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타고난 능력으로 감당만 할 수 있었어도 그건 것들로부터 거의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그 두려움을 엉뚱하게 해결하려다 보니 열등감, 질투,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정도는 가진 두려움과 타고난 능력의 차이만큼 강해진다. 그래서 큰 두려움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해도 그만큼을 감당할 능력이 되면 오히려 삶은 아주 안정적이고 행복해질 수도 있다.

 

반면에 두려움 자체는 작은데 능력이 워낙 부족하면 평생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회피이다. , 두려움 그 자체를 최대한 잊는 것이다.

 

두려움은 생각날 때만 두렵다. 그러니 두려움 그 자체가 생각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영화를 볼 때, 여행을 다닐 때, 누군가와 수다를 떨 때, 게임을 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할 때 그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끝없이 집중과 몰입을 할 대상을 찾는다. 끝없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생각을 하다가 보면 두려움이 떠오르고 걱정이 되니까 그렇다. 그래서 아주 조그만 틈도 생각할 시간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면 정말로 두려움이 사라진 듯 느껴진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지루함이 느껴지지 시작한다.

 

지루함은 삶이 가진 기본적인 두려움을 잊었을 때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놀이공원에 가면 그리 즐겁다. 거기에는 삶에 관한 가짜 두려움을 느끼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 지루함을 덜 느낄 수 있다. 흥분되고 짜릿하다.

 

지루함의 단계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재주가 많거나 성격이 좋아서 그 지루함을 쉽게 해결할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은 아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이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도 많고 사실상 시간과 돈이 없어서 그것을 못하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간과 돈 그리고 그것을 해 낼 능력만 된다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거시 더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누구나 다 그럴 수는 없다. 누군가는 관계를 맺는 것에 서툴고, 누군가는 무슨 운동을 해도 잼병이며, 누군가는 뭘 해도 어설프다.

 

누군가는 돈이 부족해서 여행도 못 가고, 누군가는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 책을 읽고 싶어도 못 읽는다. 누군가는 어디에서나 사람들에게 당하고 살고, 누군가는 자신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두려움이 큰 사람들이 그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때 열등감, 질투, 피해의식, 회피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면 지루함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우울함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지루함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기 자신이 어떤 수준에 있는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가진 두려움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제대로 가늠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그 두려움을 얼마나 감당할 능력을 타고났는지도 잘 계산해 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 가진 불안함의 증상들, 즉 열등감, 질투, 피해의식, 현실회피, 우울함 등이 바로 모두 두려움의 크기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의 차이로 인해서 발생했음을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두려움 속에 살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대한 착각이 일어나는 것은 막아준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열등감, 질투, 피해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저 두려움이 그렇게 변질 된 것 뿐이다.

 

두려움은 생명체의 본질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살고 싶다고 한다고 해서 자신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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