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혐오감의 정체

아이루다 2018. 7. 31. 15:19

 

미국의 심리학자 에크만은 인간의 얼굴 표정을 근거로 해서 사람의 기본 감정을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그것은 각각 행복, 슬픔, 놀람, 두려움, 분노, 혐오이다. 그리고 이후 다양한 감정들이 파생된다고 주장했다.

 

에크만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감정을 나름대로 의미 있게 분류 했지만, 사실상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저 몇 가지 비슷한 감정이 들어가고, 몇 가지 애매한 감정이 빠질 뿐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에크만의 분류법에 그리 공감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에크만이 분류한 감정들은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기본적인 감정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 그것들 역시도 일종의 파생된 감정들인 것이다

 

정말로 본질적인 관점에서 분류하면 인간의 기본 감정은 사실상 하나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감정은 이후 1차 파생, 2차 파생.. N차 파생을 거쳐서 수 많은 다양한 감정들로 분화되어간다.

 

그렇다면 최초의 시작이 되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비슷하게 걱정이나 불안이란 단어를 쓸 수도 있는데, 두려움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게 보인다.

 

두려움의 근원은 고통이다. 그것이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상관없다. 그리고 고통의 근원은 바로 생존이다. , 사람은 살기 위해서 고통을 느끼게 되고, 고통을 느끼기 싫기에 두려움을 느낀다. 결국 사람들은 두려움을 줄여서 고통의 가능성을 줄이고, 그것을 통해서 생존이라는 최종 목적점에 도달하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기본적으로 두려움은 그 대상과 느끼는 강도가 끝없이 변한다. 그리고 그 흔들림에 따라서 수 많은 감정들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게 된다.

 

당장 눈 앞에 있는 두려움이 줄어들 때 사람들은 안도감, 평온함, 편안함 등의 감정들을 느낀다. 하지만 그 상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당장 맛난 밥을 먹으면 기분이 좋지만, 내일 먹을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당장 눈 앞에 있는 두려움을 해결하고 남는 시간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해야 한다고 느끼는 감정, 그것이 바로 지루함이다.

 

그래서 지루함은 두려움의 일종이지만 미래형이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미래에 대해서 많은 걱정을 하는 사람일수록 좀 더 크게 느낀다. 그럼에도 지루함은 눈 앞의 두려움처럼 직접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지루함은 두려움과는 달리 그 해결 방법이 아주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지루함이 느껴지면 사람들은 심심하다든가 우울하다든가 하는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한다. 결국 안전하고 편안한 집 밖으로 나와서 친구를 만나든지 영화를 보든지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이런 식으로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서 뭔가를 했는데 다행이 지루함이 사라지게 되면 본격적으로 좋은 감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 기쁨, 즐거움과 같은 행복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반대로 두려움이 더 커질 때나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면 본격적으로 나쁜 감정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갑자기 두려움을 느끼면 놀라게 된다.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는데 그것이 상대의 잘못이란 판단이 들면 화가 난다. 두려움을 실제로 현실화 되어서 어찌할 수 없을 때 짜증이나 슬픔을 느끼게 된다.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서 영화를 보러 갔는데 재미가 없으면 실망감이 든다. 여행을 떠났는데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면 분노, 짜증, 실망, 억울함까지 모두 느껴진다. 많은 돈을 들였기 때문이다

 

, 그러면 지금부터 오늘의 주제인 혐오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혐오감은 두려움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혐오감 역시도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파생된 감정이며 최초엔 두려움으로부터 생겨난다

 

자신의 편에 속한 사람이 바보 짓을 하거나 엉뚱한 소리를 해서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 때 두려움이 느껴지면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혐오감이 느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혐오감은 다른 감정들과 다르게 한가지 묘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혐오감의 쌍둥이 동생 격인 감정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 감정은 혐오감과는 다르게 긍정적으로 해석이 된다.

 

그것이 바로 연민이다.

 

사람들이 거지를 보면 혐오감도 느끼지만 연민도 느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거지를 피하고, 어떤 사람은 적선을 한다. 심지어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불쌍하면서도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또 다른 거지는 그 거지에게 혐오감이나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 같은 거지의 처지이기에 오히려 경쟁심을 느끼기에 그 거지가 적선을 많이 받으면 그저 질투심만을 느끼게 될 뿐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 혐오감이나 연민은 반드시 어떤 조건을 가져야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대상과의 격차이다. 거지처럼 자신과 확실하게 구분이 되는 존재일수록 더욱 더 그렇게 느낄 수 있다.

 

혐오감은 기본적으로 상대와 자신이 뭔가 수준에 있기에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같은 거지를 보고도 왜 혐오를 느끼거나 연민을 느끼는 차이점을 나타나게 될까?

 

단순히 인격적인 수양의 문제인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서 많은 재난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캐릭터가 하나 있는데, 일반적으로 주인공의 말에 반대를 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고, 결국 비겁하게 배신만 일삼다가 죽는 역할로 끝난다.

 



<영화 부산행에 나온 민폐 캐릭터,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2691270>

 



<영화 미스트에서 나온 민폐 캐릭터, https://1boon.kakao.com/share/superazumma>

 

이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관객은 그때 그 비겁한 출연자의 죽음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깐다. 너무도 이기적인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하기에 답답함을 넘어서 혐오감과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때 개인의 인격의 차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다.

 

더해서 아주 더러운 것을 보면 누구나 다 혐오감을 느끼는 것을 보면 그것이 반드시 인격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기본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완성이 된 사람들이 혐오보다는 연민을 더 많이 보여주는 경우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혐오감이 생겨나는 진짜 원인을 알아보도록 하자.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비겁하고 배신하는 캐릭터를 왜 그리 싫어하는 것일까? 물론 기본적으로는 그 사람이 전체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결국엔 자신에게 피해를 줄까 봐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거기엔 좀 더 본질적이면서도 미묘한 감정이 하나 더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혐오감은 원인이 아닌 증상인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특정 캐릭터에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비겁한 존재에게서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어떤 것을 봤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죽음이다. 그런데  상황에서 비겁한 존재는 그 두려움을 제대로 극복하려 하지 않고 나 혼자만 살겠다는 식으로 하다가 결국 그 두려움을 실체화 시키고 만다. , 혼자만 살려고 하다가 오히려 일찍 죽고 만다.

 

그러니 답답하고, 한심하고, 결국엔 혐오감까지 드는 것이다. 그 존재가 비겁하고 이기적이라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남에게 못된 짓까지 하면서도 결국 살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만약 살았다면 혐오감보다는 분노를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상황에 따라서는 살았다고 해도 여전히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선택한 해결책은 자신의 기준으로는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옳지 않기에 쓸 수 없는 해결책은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오히려 존재하게 되면 해결책이 여러 개가 되기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러니 더욱 더 짜증이 난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비겁하고 배신을 일삼는 캐릭터를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런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용기와 신뢰, 특히나 협력의 가치를 저버렸기 때문이다결국 죽음이라는 가장 거대한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필요해 보이는 노력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혐오감을 느낀 것이다.

 

영화를 보는 초반엔 답답함을 느끼다가 본격적으로 혼자만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짜증과 분노를 느끼다가 죽게 되면 결국 혐오감으로 끝난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끼더라도 영화 속 인물이 갑자기 용감해지거나 협력을 하는 모습으로 바뀔 리가 없다. 그러면 그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대상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일이다. , 상대를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자신과 분리할 때 생겨나는 감정이 바로 혐오감이다. , 자신이 저 사람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해야만 분리가 이뤄지는데, 이때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결론인 셈이다.

 

누구나 당장 눈 앞에 있는 커다란 두려움 앞에서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영화에서는 그 두려움이 죽음이기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혐오감이 나타나게 된다. 반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화 시키면서 주인공이 온갖 고난을 뚫고 살아나게 되면 안도감과 성취감을 같이 공유한다.

 

결국 혐오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두려움에 대해서 상대방이 적절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으로부터 생겨난다.

 

돈이 없는 것이 너무도 두려워서 밤이고 낮이고 돈을 벌어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게 된 사람은 돈을 열심히 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혐오감을 느낀다.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하거나 심지어 대놓고 경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해 다른 아이들에게 상처를 많이 입은 아이는 피나는 노력을 한 끝에 성공할 수 있지만,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치열하게 살지 않는 것을 보고는 한심함을 느끼다가 결국엔 혐오감까지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끝없이 애들을 다그치게 된다

 

정직하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늘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을 보면 혐오감을 느낀다. 미래가 두려워서 하루도 제대로 놀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딱히 미래에 대한 대책도 없이 나태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혐오감을 느낀다.

 

사람들과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 너무도 두려운 사람은 못되게 굴어서 사람들과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을 보면 혐오감을 느낀다. 너무 작은 이득에 연연해 하다가 결국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눈 앞에 이득에 연연해 하는 사람을 볼 때 혐오감을 느낀다.

 

뚱뚱한 것을 게으름이나 의지 없음의 상징으로 여겨서 그것이 두려운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먹고 싶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두려워서 참는 사람은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먹는 사람을 보면 혐오감을 느낀다.

 

도덕적으로 살지 못할까 봐 몹시 두려운 사람은 도덕적이지 않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양심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사람은 비양심적인 사람을 보면 혐오감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런 식으로 혐오감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려움이 자극된 후 그것을 제대로 해결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결국엔 그것이 외부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통해서 혐오감과 연민의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혐오감이 처음부터 느끼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결과이기에 그렇다. 처음부터 혐오감과 연민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저 판단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갈린다.

 

, 그 기준점이 자신일 경우엔 혐오가, 그 기준점이 상대일 경우엔 연민이 생겨나는 것이다.

 

거지를 볼 때 자신은 어떤 상황에 놓여도 절대로 저 거지처럼 구걸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혐오감이 든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죽하면 저렇게 살 수 밖에 없나, 라고 생각이 들기에 연민을 느낀다.

 

결국 혐오감은 상대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인정하거나 혹은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한계를 자신의 수준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줄 수 있을 때 연민으로 바뀔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은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그 노력의 정도가 모두 다르며, 노력한다고 해서 언제나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해내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두려움 자체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식으로 중간에 포기하거나 적당히 타협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딱히 어떤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동질감을 느끼기에 공감을 하게 되는 편이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을 해서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자신이 극복했으니 너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더해서 생각하지도 못한 아주 곤란한 문제들이 더해진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문제인데, 하나는 어떤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그것을 극복해 낸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여기는 마음이다.

 

이 중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는 바로 행복하지 않는 점이다. 그 과정이 오직 두려움과 싸운 것이기에 그렇다. 두려움과 싸우고 나면 평안함이나 안도감은 느낄 수 있지만, 결국엔 지루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평생의 삶을 언제나 두려움과 싸우는 것만을 해왔기 때문에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 사라진 후 도대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 돈은 많은데 쓸 데가 없고, 시간이 남아돌아도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 평생을 목표를 정하고 끝없이 도전을 해왔기에 그렇다. 오히려 그런 노력을 거의 하지 않은 백수가 돈을 더 잘 쓰고 시간도 잘 보낸다.

 

그래서 행복하지도 않고 허공에 붕 뜬 사람들은 이제 가상의 목표를 정해서 도전하기 시작한다. 마라톤을 하고, 높은 산을 오르고, 뭔가 남들이 힘들다고 인정해주는 것들 도전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만 잠시 만족스러울 뿐, 삶 자체는 끝없이 고통에 시달린다. 그래서 결국 별 다른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을 보면 질투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 자신과는 달리 두려움을 노력으로 극복하지도 못한, 그래서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동시에 질투심을 느끼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질투심을 느낀다고 인식하기도, 설령 인식했다고 해도 인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상대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드러내게 된다. 그럼으로써 자신과 상대 사이의 격차를 명시화 하는 것이다

 

웃기는 짓이지만 이 방법은 실제로 유효하다.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성공한 수준이 다르며 가진 돈이 다르니 그것이 주변에 어느 정도 인정을 해주니까 그렇다. 하지만 집에 오면 불행해서 울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울 수도 없다. 우는 순간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갑질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이 되고 있다. 갑질은 많은 돈을 가졌거나 높은 지위는 가졌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에게 무작위적으로 혐오감을 가장한 질투심을 드러내는 사건들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혐오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혐오감이란 감정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혐오감에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신의 두려움이 꼭 다른 사람의 두려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매우 단순한 사실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누구나 자신을 기반으로 해서 남을 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상대도 두려워할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돈이 없을 때 돈이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이때 가장 돈이 두려운 사람이 돈을 벌려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삶의 목적이 돈에 맞춰지고 돈이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가족이 없는 것이 두려운 사람도 있고, 힘들 때 혼자 있을까 봐 두려운 사람도 있다. 혼자만 잘 사는 철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려운 사람도 있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사람도 있다. 배가 고픈 것이 가장 두려운 사람이 있고,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가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도 있다. 노후에 홀로 지내게 될까 봐 두려운 사람들도 있고,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운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도 있고,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가 될까 봐 두려운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할까 봐 두려운 사람들도 있고, 자신의 삶이 남들의 중간도 가지 못할까 봐 몹시 두려운 사람들도 있다

 

이런 다양한 두려움이 이후 다양한 가치를 만들어 낸다. 사실 가치라는 개념은 자신의 가진 가장 큰 두려움에 대한 최고의 해결책을 의미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장 가치 있다고 느낀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점점 더 돈으로 해결 가능한 두려움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려움의 종류가 사람마다 모두 제 각각이고 그로 인해서 삶의 가치 역시도 사람들마다 서로 너무도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노력으로 극복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두려움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는 상대도 자신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의 갈등에서, 아버지의 두려움이 반드시 자식들의 두려움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식들은 아버지의 노력으로 인해서 풍족하게 컸기에 돈이나 성공이 아닌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욱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혹은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것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저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돈이 없어 본 적이 없기에 그런 소리나 하고 있다고 한심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두려움을 보고는 그것을 제대로 해결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 정상적인 것일까

 

정작 그 사람은 자신의 진짜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애쓰고 사는데,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하면서 무시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혐오감은 처음부터 엉뚱하게 시작되고 결국엔 뒤틀리고 만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선에서 인정하고 타협을 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자부심을 갖거나 혹은 불행하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혹은 힘들지만 두려움 그 자체를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과 같은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연민이, 각자 자신만의 두려움과 싸우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동지애가 생겨난다. 서로 다르지만 어떠한 이유들로 인해서 생겨난 두려움과 열심히 싸우면서 살아가는 모습에 눈물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중간에 포기를 했거나 적당히 타협을 했기에 힘들지만 나름대로 행복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결국 졌다는 것을 알기에 자부심도 가질 수 없다. 그러니 결국 부드러워진다. 상대방에게 한심함이나 혐오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연민을 느낀다.

 

새는 날개를 타고 나기에 추락이 무섭지 않다. 북극 곰은 몸에 지방이 많아서 북극의 추위가 무섭지 않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기에 물 속에 빠지는 것이 무섭지 않다. 하지만 새는 땅위가 무섭고, 북극곰은 더운 곳이 무서우며, 물고기는 물 밖이 무섭다.

 

모든 존재는 각자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인해서 서로 다른 두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타인의 두려움을 자신을 기준으로만 보려고 한다. 그리고 혐오를 느끼고 경멸감을 갖는다.

 

하지만 혐오 그 자체가 처음부터 상대방의 두려움을 자신이 발견한 결과일 뿐이다. 극복되었다면 그것이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상대방에게서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을 발견하는 순간 느껴지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견딜 수 없기에 상대를 이해할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상대와 자신을 분리할 생각만 하게 된다. 그래서 혐오감이 생기고 만다.

 

그래서 정말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증거가 바로 연민이다. , 연민을 느낄 때 제대로 벗어난 것이다. 그러니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존재가 있다면 무한한 연민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은 두려워하지 않을 때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극복하거나 뛰어 넘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모든 두려움의 근원이 되는 죽음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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