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순수한 의도

아이루다 2018. 7. 12. 08:42

 

관객1 : 저 개그맨 정말로 대단한 것 같아무엇보다도 팬 서비스가 대박이야. 이런 대규모 코메디 쇼를 무료로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관객2 : 그렇긴 해. 하지만 그것도 다 자기 이득이 있으니까 하는 것이겠지.

관객1 : , 그런 면도 있겠지만, 아까 공연에서 본인이 직접 말한 것처럼 사람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로 좋은가 봐. 아까 공연 중에도 그랬잖아, 자기는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볼 때 제일 행복하다고 말이야. 그래서 이런 쇼도 공짜로 한다고 그랬잖아.

관객2 : 그래, 그러니까 개그맨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그 공연 자체는 공짜로 하더라도 여기에서 얻은 인기랑 인지도를 통해서 cf도 많이 찍고 행사도 자주 불려 다닐걸? 그러니 결국은 자기 이득이지.

관객1 : 너는 뭐든 그렇게 삐딱하냐? 아무튼 순수한 의도로 이런 공연을 공짜로 하고 있는 것은 맞잖아.

관객2 : 당장 공짜면 그것이 정말로 공짜냐? 너의 말에 따르면, 구글이 검색하는 것에 돈을 받지 않으니 검색 서비스를 해주는 것이 순수한 의도라고 말하는 것이랑 비슷하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 * *

 

사람의 행동에는 언제나 적당한 어떤 이유들이 있다단지 이유가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아내기가 무척 힘들거나 아니면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안가는 정도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들을 다른 말로 하면 '의도' 라고 표현할 수 있다 , 어떤 의도는 사람의 행동의 이유이자 목적이다.

 

그런데 의도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일반적으로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계산적 의도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의도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행동이 '의도적' 이란 표현을 썼을 때는 계산적인 경우를 의미한다그리고 그 계산은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결과로 인해 생겨난다, 자신이 가진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앞뒤를 재고, 손해와 이득을 계산했으며,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결정한 결과인 셈이다.

 

이와는 반대로 순수한 의도는 내면에서 올라온 감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하면 순수하다고 할 수 있지만, 따지고 들면 충동적이며 그 결과에 따라서는 아주 좋은 결정일 수도 아니면 몹시 어리석을 수도 있는 결정인 셈이다.

 

이 두 가지 의도는 상황에 따라서 서로 선호도가 다른데, 보통의 관계에서는 순수한 의도를 선호하는 경향이 크고, 돈과 사업에 관련된 경우엔 계산적 의도를 좀 더 선호하는 편이다.

 

더해서 이 둘은 도덕적이냐 여부를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기준점이 된다. 일반적으로 순수한 의도로 한 행위가 계산적으로 한 행위에 비해서 좀 더 도덕적이란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다. , 사람들은 순수한 의도로 행동하는 것을 좀 더 양심적이거나 도덕적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와 같은 시에서도 그것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왜 이 두 가지 종류의 의도는 각자 어떤 과정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관한 직관적인 답을 하자면, 계산적 의도는 의식의 단계에서 결정이 된다고 볼 수 있고, 반대로 순수한 의도는 무의식적 단계에서 결정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 계산적 의도는 머리 속에서 능동적으로 그것에 대한 계산을 한 결과인 셈이며 반대로 순수한 의도는 이미 무의식 단계에서 결정된 결과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의식에 의한 이성적으로 결정된 결과보다 무의식적에 의한 감정적으로 결정된 결과가 더 순수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성에 의한 결과 감정에 의한 결과가 더 순수하다고 믿어지는 것일까?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 것처럼 감정적 판단이 이성적 판단에 비해서 정말로 더 순수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그것이 진짜 이유는 아니다.

 

감정이 이성에 비해서 좀 더 순수하다고 믿어지는 이유는 그저 감정적 결정에 의한 확신이 이성적 결정에 의한 확신에 비해서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 둘의 차이는 순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확신의 차이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확신이 강할수록 그것이 좀 더 순수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순수하다는 것은 잡티가 없는 것이니 좀 더 확실한 것은 맞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서 확신이 생기는 것은 서로 가진 조건이 적당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조절 불가능한 끌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서로의 눈빛에서, 서로의 행동에서, 서로의 표현에서 감정이 격렬하게 드러날 때 비로소 상대를 확신할 수 있다.

 

조건은 그저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오히려 조건이 좋지 않으면 일부로 외면을 하거나 단점보다는 장점으로 보려고 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성적 판단이기 때문에 생각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기에 그렇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인 경우엔, 그 나이 차이로 인해서 주변의 걱정스러운 조언들을 들을 수도 있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나이 차이로 인해서 싸우는 일이 거의 없다고 좋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이 식어서 헤어지게 되면 바로 그 나이 차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가장 큰 갈등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렇듯이 감정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바뀔 일이 없지만, 이성적 판단은 상황에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 이성적 판단을 더 신뢰할 수 있겠는가?

 

확신은 바로 신뢰를 의미한다. 그래서 결국 감정적으로 결정된 순수한 의도가 이성적으로 결정된 계산된 의도에 비해서 훨씬 더 믿을만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것이다.

 

실제로 이성에 의한 계산된 결과는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배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으로 결정된 결과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배신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

 

순수한 의도가 좀 더 도덕적으로 평가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감정은 잘 변하지 않으니 한번 선행을 한 사람은 평생 선행을 할 것이고, 한번 친절한 사람은 평생 친절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 그 신뢰로 인해서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한번 따져보자. 정말로 감정이 이성보다 더 신뢰가 있는 것일까? 더 일관성이 있는 것일까? 더 바뀌지 않는 것일까? 더 변화가 없는 것일까?

 

정말로 그렇다면 왜 사업적 관계에서는 감정적 판단보다 이성적 판단에 따를까? 왜 문서를 작성하고 서로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사인을 할까?

 

이것은 오히려 이성적 판단이 감정적 판단에 비해서 좀 더 신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특히나 서로 신뢰가 부족한 경우엔 더욱 더 감정보다는 이성적 판단에 기대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국가간의 협약서는 완벽히 이성적으로만 작성이 된다. 그래야 개인들의 변심이 그 협약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내려진 결정은 판단에 필요한 조건만 유지된다면 딱히 바뀔 일이 없다반대로 감정은 언제든 바뀌는 것이 가능하다. 어제까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싫어질 수도 있다. 간밤에 만났을 때 했던 말에 실망을 하는 순간 바로 그렇게 바뀔 수도 있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만 바뀌지만, 감정은 딱히 별다른 이유 없이도 바뀔 수 있다. 오늘 어딘가를 함께 놀러 가기로 했는데 그저 오늘 아침에 기분이 별로라서 그 약속을 깰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감정은 이성에 비해서 훨씬 신뢰가 떨어진다그러니 사람들의 믿음과는 다르게 감정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딱히 없다. 그래서 많은 부부들이 감정으로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육아에 대한 책임감이나 혹은 같이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신혼 때와는 너무도 다른 상대의 행동을 보면 솔직히 상대방의 감정은 믿을 수 없지만, 머리 속의 이성적 판단으로 보면 상대가 자신을 배신할 상황이 아님을 알기에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결정되는 것을 이성적으로 결정되는 것에 비해서 더 신뢰하는 것 자체가 많이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감정을 이성보다 더 신뢰하게 되는 것일까? 거기엔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각자에게 있어서 감정은 늘 한 가지 상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다는 감정과 싫다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물론 그다지 많이 좋지도, 그다지 많이 싫지도 않는 어중간한 감정 상태는 존재할 수 있지만, 정말로 좋으면서 정말로 싫을 수는 없다.

 

감정의 이런 특징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성적 판단은 지식과 경험적 한계로 인해서 그 어떤 결정을 하든 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기에 그것에 확신을 갖기는 힘들다반면에 감정은 한 순간에는 오직 하나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혹시 다른 감정들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일이 없다.

 

이런 차이로 인해서 감정은 이성보다 더 신뢰를 느끼게 해준다. 한 순간에는 한 가지 감정만이 유일하며, 그 감정만이 유일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둘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득을 해도 그들이 헤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 둘에게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은 거의 진리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억지로 둘을 갈라 놓으면 자살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것을 지키기 위해서 죽을 정도라면, 그것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높은 상태일까? 하지만 사랑이 식은 연인이 되게 되면 자신이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어처구니 없을 뿐이다. 헤어진 연인은 생판 모르는 남보다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감정적 판단과 이성적 판단은 아예 처음부터 그것이 이뤄지는 과정 자체가 전혀 다른데,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이뤄지는 판단 과정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감정은 외부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다. 무엇인가를 느끼면 바로 두렵다든가, 좋다든가, 만족스럽다든가, 징그럽다든가 하는 반응이 생겨난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얼마든지 일어난다.

 

하지만 이성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성은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서 기존에 쌓여 있는 정보들을 최대한 활용한다. 또한 가장 진실에 가까운 판단을 해내기 위해서 외부 정보를 최대한 제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날씨가 너무 좋은 날 새로 사귄 연인과 어딘가를 놀러 가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는 것은 감정적 판단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달 앞으로 다가온 중요한 시험을 위해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이성적 판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때 감정적으로 느낀 부분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은 처음부터 이성적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이란 말 자체가 기쁨이나 즐거움과 같은 좋은 감정들의 총합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정을 훨씬 더 자신의 본질적 요소라고 여긴다. 같은 이유로 로봇에게는 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판단하려고 한다.

 

이성적 능력은 분명히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지만, 인간은 오직 감정만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신뢰는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니 결국 자신의 본질이라고 믿는 감정적 판단을 더 신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세 번째 이유는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이 이성적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에 비해서 훨씬 더 변화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외모, 성격, 지능, 육체적 능력 등은 돈, 학벌, 지위, 국적과 같은 것들에 비해서 훨씬 더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전자가 후자에 비해서 바뀔 가능성이 현저하게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뀔 가능성이 적을수록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 사람들이 한 눈에 반하는 것은 외모이지 결코 돈이 아니다. 외모는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지만 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아름다운 외모라고 해도 성형한 얼굴에 덜 호감이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변화된 것은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어떤 요소가 타고난 것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것은 이성적 판단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외모는 순간적으로 강한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돈을 통해서는 결코 그런 감정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돈이 그런 감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성적 판단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신뢰도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변화 가능성이 높은 것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사람들이 감정적 판단에 왜 더 많은 신뢰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알아봤다. 사람들의 그런 패턴에는 분명히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이유들이 감정적 판단이 이성적 판단에 비해서 더 순수하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사람들이 이성적 판단에 비해서 감정적 판단을 더 순수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방금 설명했다시피 그저 하나 밖에 존재할 수 없는 강렬함, 행복한 삶에 대한 끝없는 욕구,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조건을 기반으로 해서 생겨난 감정 고유의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니 말이다.

 

사실 냉정히 따지면 순수한 의도이든 계산적 의도이든 결국엔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감정적 판단에 따를지 이성적 판단에 따를지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순수한 의도라는 말 자체는 잘못된 표현인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순수한 의도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 그저 감정적으로 결정된 결과를 순수한 의도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야 더 행복할 수 있기에 그러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선물을 줬다면, 그 사람이 자신을 생각해서 순수한 의도로 줬다고 믿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다. 선물을 준 사람이 뭔가 계산적으로 줬다는 것을 알게 되면 괜히 기분이 나쁘니까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결정된 감정이란 결과는 그저 왜 그런 결정이 내려졌는지만 명확히 알 수 없을 뿐, 그 결정의 과정엔 반드시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다든가,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라든가, 어떤 식으로든 친분을 맺어서 미래에 도움일 될 수 있을 것 같다든가 하는 판단 등이 인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것이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확장이 되어서 인간 자체에 대한 거대한 착각을 일으키고 만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도덕적일 수 있다는 착각, 인간이 이타적일 수 있다는 착각, 심한 경우 인간이 생명체의 본질을 뛰어 넘는, 그래서 동물이 아닐 수 있다는 착각을 불어오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정말로 남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이 정말로 순수한 의도로 뭔가 하고 있다고, 자신은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믿고 싶어한다.

 

물론 인간이 동물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결코 순수성 때문에는 아니다. 인간의 순수성이야 말로 인간 사회가 가진 가장 잘못된 믿음 중 하나이며 수 많은 갈등을 만들어 내는 주체이다.

 

순수성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을 만들어 낸다. 서로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판단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엔 수 많은 갈등이 생겨난다.

 

인간의 삶은 행복과 행복의 투쟁이다. 옳고 그름의 투쟁이 아니다. 삶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남의 행복을 얼만큼 침해하느냐, 혹은 상대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내 행복을 얼마나 방해하느냐를 두고 벌이는 끝없는 싸움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더 옳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야 더 떳떳하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순수한 의도가 아주 중요한 도덕적 판단 기준점 역할을 한다. 순수하게 추구한 것이니 더 나은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가 순수하게 여행을 가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여행을 가고 싶고 상대방에게 같이 여행을 가지고 할 때는 분명히 여행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가는 것이 좋은 것이고 더해서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기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순수한 의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는다그리고는 그것을 기반으로 양심적 도덕적 우위에 서서 상대를 강요한다. 내가 옳고 너는 틀린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이런 식으로 순수하다고 믿어지는 판단이 정당함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 어떤 감정에 정당성이 있을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행복한 감정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행복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정당할 수는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만약 행복의 정당성이 생겼다면 그것은 그저 자신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엄청나게 합리화 해놓은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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