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행복 그리고 너의 행복

아이루다 2018. 6. 18. 07:39

 

지구 상의 70억 인구가 각자 모두 그 생김새가 다르듯, 사람들마다 행복을 느끼는 대상도 무척 차이가 크다. 그래서 만약 사람들마다 어떤 행복을 선호하는지를 측정하는 장치가 있다면 그것을 지문인식이나 얼굴인식 시스템 대신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양한 행복들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일까? 무엇인가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 마치 타고난 지문이나 목소리처럼 선천적으로 고정된 것들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행복 자체는 매우 다양하지만 몇몇 특정 행복들은 사람들이 대부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행복은 분명히 존재한다그러다 보니 가족, 아이, 여행, 만남, 사랑, 문화생활, 취미활동, 운동, 공감과 같은 것들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며 그로 인해서 가치화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행복을 추구하느냐는 완전히 개인적인 영역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행복이 그렇게나 다양해진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의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다.

 

행복이 그토록 다양한 이유는, 두려움의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두려움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그 방법론이 사람들마다 너무도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의 다양성은 근본적으로 두려움의 다양성과 그 처리 방법의 다양성을 곱만큼 것만큼 복잡해진다. , 『행복의 다양성 = 두려움의 다양성 X 처리 방법의 다양성』인 셈이다. 그러니 행복은 엄청나게 다양해질  밖에 없다

 

늑대가 두려운 사람들의 두려움 자체는 동일하겠지만,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게 이뤄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집을 견고하게 짓고, 누군가는 그 지역을 떠나거나, 누군가는 총을 구입해서 늑대를 사냥할 수 있다. 혹은 늑대에게 주기적으로 먹을 것을 줘서 친해지거나, 개를 잔뜩 길러서 늑대에 대항할 수도 있거나설마 늑대가 정말로 공격하겠냐고 생각하면서 그냥 살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각각의 처리 방식들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성과를 올릴 때마다 각자는 행복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결했을 때의 행복감 역시도 커지게 된다.

 

그래서 모의고사는 덜 두렵기에 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있는 대신 성적이 잘 나와도 대충 기쁘고 말고, 본고사는 많이 두렵기에 엄청나게 긴장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세상을 얻은 듯 기분이 좋아진다. , 두려움이 클수록 해결했을 때 행복이 훨씬 커진 것이다.

 

또한 두려움의 종류가 다양한 것에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에 겪는 부족함에 대한 상처가 큰 영향을 끼친다. , 어떤 경로로 인해서 주어졌든지 간에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겪은 부족함에 의한 두려움을 평생 안고 가는 현상이 흔하게 일어난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지는 것이 너무도 두려운 사람들은 그 자신의 삶을 지는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채우게 된다그래서 만약 그나마 자주 이기는 경험을 한 사람은 이길 때마다 강렬한 행복을 경험하고, 반대로 자주 지는 사람은 아예 승부 자체를 피하면서 다 같이 만족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는 것이 너무 두려운 사람은 평생 권력을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대접을 받을 때 큰 행복감을 느낀다. 어려서 돈이 없어서 힘들게 산 사람은 평생 동안 더 많은 돈을 벌 때마다 행복해진다. , 돈이 필요해서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모을 때마다 행복해서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러니 만족을 모르게 된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커서도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받거나 무리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을 무척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평생 동안 자신이 속한 단체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목표로 정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두려움을 통해 행복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딱히 그것을 의식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것이 해결될 때마다 행복함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반대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이 되지 않을 때마다 불행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일반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해결하지 못한 두려움이나 혹은 아예 처음부터 해결이 불가능한 두려움 앞에 서게 되면 사람들은 보통 좌절을 경험한다.

 

이 중에서 처음부터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 예를 들면 나이를 먹으면 죽는다든가 하는 문제 등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할 수 있기에 마음 속에 남기지 않을 수 있지만, 해결할 수 있다고 알려졌지만, 능력이 되질 않아서 방치된 두려움은 당사자를 병에 걸리게 한다.

 

그것을 보통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이라고 부른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증의 우울증을 앓고 살아간다. 단지 그 우울증의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아주 적고 또한 금세 다른 것으로 그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심각하지 않을 뿐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누구나 해결해야 하지만 미루고 있거나 혹은 능력이 되질 않아서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한 두려움은 하나쯤 있기 마련이기에 그렇다.

 

특히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서 머리가 훨씬 좋기 때문에 두려움 자체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더 많고 다양하다.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가 당장 먹을 것만 해결되었다고 해서 세상 편하게 자듯이 잠을 잘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오늘 먹을 것을 준비해 두고 시간이 남으면 내일 먹을 것, 일년 후에 먹을 것, 죽기 전까지 먹을 것을 준비해 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생각은 여유 시간이 생길 때마다, 조금이라도 시간의 틈이 생길 때마다 머리 속으로 치밀어 올라서 당사자를 괴롭힌다.

 

미뤄뒀던 영어 공부, 처리해야 하는 회사 문제, 따야할 것 같은 자격증 시험, 더 많은 저축을 해야 할 것 같은 불안함, 좀 더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 담배를 끊어야 하는 문제, 술을 줄여야 하는 문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노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 등등이 떠오르는 것이다.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뭔가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지만, 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본격적인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 바로 이것이 지루함의 본질이며 더해서 우울함으로 가는 교두보가 된다.

 

이런 식으로 행복의 본질이 두려움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크게 두 가지 중요한 각성이 가능하다.

 

하나는 바로 자신이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과연 어떤 시선에서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연결된 사고는 정말로 매우 중요하며,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삶 자체를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40대 근처에 다다르면 한번쯤 삶의 회의감 속에 놓이게 된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나이는 인생의 정점을 막 통과하고 이제 하락을 시작하는 시점이 되기에 그렇다. 한없이 올라갈 것 같은 삶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회의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상승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상승의 희망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지만, 이 사회 구조는 기본적으로 피라미드 형태이다. 그래서 위로 올라갈수록 남는자보다는 탈락자가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탈락자가 된 사람들은 목표를 잃고, 방향을 잃고, 심지어 삶의 목적까지도 잃게 된다. 그래서 결국엔 모두가 비슷하게 '왜 사는지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질문은 아무리 하고, 그 답을 찾아 다녀도 답을 낼 방법은 없다.

 


사람이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는 원래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은 그저 행복하니까 사는 것이다. 원래 행복하면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고, 불행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답을 찾아 다닐 시간에 그냥 조금 더 행복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행복해지면 자신이 그런 질문을 했었는지조차 잊어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커다란 문제가 있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막막해서 그렇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많은 것들을 따라 하고 흉내 내어 보지만 돈과 시간만 소비될 뿐, 정작 별로 행복해지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답은 이미 나왔다. 행복은 두려움을 통해 나오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어떤 두려움을 회피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회피하고 있는 두려움이 있기에 삶이 그토록 지루하고 불행한 것이다.

 

몸이 약한 사람이 정신적 만족을 위해서 죽어 라고 책을 읽어봐야 그때뿐이다. 몸이 약한 사람은 열심히 운동을 해서 건강해질 때 가장 행복해진다. 하지만 이미 몸이 건강한 사람은 운동을 할 때 어느 정도 기분이 좋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몸이 약했던 사람이 운동을 할 때의 행복은 얻을 수 없다. 두 사람은 두려움의 크기가 다르다.

 

돈이 부족한 사람이 행복에 있어서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책을 읽으면 잠시 위로가 되겠지만, 그 사람을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결국 돈이다. 그러니 그런 책을 사서 볼 돈을 아껴서 돈을 모으는 것이 더 낫다.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서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열쇠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삶에서 부족하다고 느껴서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보다도 그것을 채우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행복 원리를 사람들은 왜 그렇게 힘들어할까?

 

그 이유는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그 원인을 없애는 방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뭔가 위로를 받거나 혹은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처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해결하려면 많이 힘들기 때문에 회피하고 싶어서 그렇다. 이것은 그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의지력을 상당히 약화 시킨다.

 

사람은 원래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싶어서 틈 만나면 어딘가에 기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의 위로에, 믿고 있는 종교에, 책 속의 글귀에, 누군가의 강연에 기댄다. 그리고 기대는 순간 의지력은 사라지고 만다.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이 힘들고, 돈을 버는 것도 힘들다. 그러니 그런 것을 하기 것보다 정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책을 읽고, 돈의 가치를 낮게 말하는 사람의 강연을 들으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두려움을 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보이지 않게 처박아 두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사람들이 좋아하는 위로와 공감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두려움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두려움 자체가 바로 처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에 관련된 두려움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해결하고 싶지만, 해결하기가 너무도 힘들거나 혹은 그러려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용기를 내야 할 경우도 많은데 말이다.

 

다행스럽게 답은 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은 반드시 해결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에 관련해서 정말로 중요한 진실은, 설령 어떤 두려움을 제대로 해결을 할 수는 없더라도, 어떤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만 밟고 있어도 충분히 그 두려움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사람들이 두려움을 계속 느끼는 이유는, 여유 시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쓰지 않고, 그냥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TV를 보고, 스마트폰을 보고, 게임을 하는 등, 그냥 놀면서 보내고 나면 두려움은 더욱 더 커져버리고 만다. 특히 비슷한 두려움을 제대로 해결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날이면 그날은 하루 종일 불안함 속에 놓인다.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직장 동료가 영어 학원을 끊어서 다닌 지 세 달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그때부터 그렇게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몸이 본격적으로 건강해지지는 못했더라도 운동을 하고 있는 동안은 병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도 일단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두려움이 줄어든다. 실력이 눈에 띄게 늘지는 않더라도 일단 영어 공부를 하고 있으면 영어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든다.

 

그리고 운 좋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 두려움이 큰 만큼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행복의 경험은 나중에 또 다른 두려움을 가졌을 때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좋은 경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두려움에 근거한 행복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어떤 시각에서 봐야 하는지에 대한 것도 도움을 많이 준다. 이것은 생각보다 중요한데,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나의 이득과 너의 이득의 충돌이며,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 사이의 충돌 현장이다. 그래서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상대의 행복을 어떻게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줄 수 있느냐가 서로 관계를 맺어가는데 있어 아주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행복에 너그러우면 너그러울수록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누구나 행복하길 원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났을 때 자신이 행복하면 당연히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그것은 상대가 추구하는 행복이 바로 자신처럼 두려움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 상대가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해결하고 있거나 혹은 도망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은 끝없이 뭔가에 자신을 집중시킨다. TV에 집중하고, 영화에 집중하고, 술에 집중하고, 대화에 집중하고, 여행에 집중을 한다. 그래야 두려움을 잊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다.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필요하긴 하지만, 과하게 될 때 분명히 충돌이 일어난다.

 

자신은 그것이 하고 싶어서 한다는 착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 정말로 하기 싫은 일 앞에서는 그것이 아닌 어떤 일을 해도 즐겁다고 느낀다. 그래서 술자리가 너무 싫은 사람은 회식날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해야 할 때 평소와 다르게 오히려 즐겁게 일을 할 수가 있다.

 

회사에 가기 싫으니 주말에 하는 일이 다 즐겁고, 공부를 하기 싫으니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그리 즐겁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왜 공부를 하지 않고 게임을 하고 싶어하냐고 따질 필요가 없다. 공부를 하는 것이 싫으니까 그런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공부를 하지 않은 미래의 삶에 대한 두려움보다 공부를 할 때 감당해야 할 힘듦의 두려움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신은 주말에 쉬고 싶으면서 아이들에게는 왜 공부를 하지 않냐고 따지는 것은 처음부터 옳지 않다그것은 이해 받아야 하는 것이지 꾸중을 들을 일은 아닌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두려움으로 봐줄 수 있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원래 누군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하는 모습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원망이 생겨난다.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러고 있다는 진실을 바라봐줌으로써 훨씬 더 깊은 이해를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원래 타인의 욕망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 사람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서 악당이라고 해도 왜 그 사람이 그렇게 권력에, 돈에, 이득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그가 어린 시절에 겪은 두려움을 보게 된다면 용서는 하지 못해도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관점의 변화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다.

 

자신을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찾는 것,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대해서 너그러워지는 것, 이 둘 모두는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에 매우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정이 필요하다. 자신은 행복의 존재가 아니라 두려움의 존재임을,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의미나 가치는 사실은 그저 두려움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나의 의미와 가치를 내려놓음으로써 궁극적으로 타인의 의미와 가치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가능해질 때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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