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극과 극

아이루다 2018. 6. 13. 09:33

 

'극과 극은 통한다' 라는 말이 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말하는 표현 같지만, 실제로 세상을 살다가 보면 생각보다 이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는 순간들이 꽤나 있다.

 

사고 방식, 철학, 사상, 성별 등등 분명히 서로 반대 입장에 서서 상대편을 비난하고 자신의 편을 옹호하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과 쓰여진 글들의 표현들은 서로 그리 차이가 없는 상황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좀 이상한 일이긴 하다. 아니, 많이 이상한 일이다. 도대체 왜 양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는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분명히 좌와 우는 다르고, 위와 아래는 다르다. 그런데 왜 양쪽 끝으로 최대한 간 사람들은 결국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사람들과 닮은 꼴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일까?

 

누군가의 표현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의 본질은 원형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래서 지구처럼 둥근 물체를 각각 좌측과 우측 방향으로 출발하게 되면 결국 출발지의 반대편 지점에서 만나는 것일까?

 

그럴 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것보다는 진짜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명시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와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단지 사람들이 그 영향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지금부터 극과 극이 왜 통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키우던 개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누군가 버린 개를 주어서 기르는 사람도 있다. 철저하게 남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평생 남을 도우면서 헌신하는 사람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어느 정도 극단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개를 버리지도, 버려진 개를 데려다가 키우지도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남을 적당히 이용할 뿐, 철저하게 이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남을 도우면서 헌신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중간에 걸쳐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특이한 현상 하나가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개를 버리거나 철저하게 남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 사회 통념상 허용되기 힘든 비도덕적 행위를 하고 살거나 심지어 범죄에 해당되는 행위조차도 거리낌없이 하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품게 된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의롭거나 보편적 상식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엔 크게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매우 인간적인 사람들과, 남을 철저히 이용해 먹는 정말로 비인간적인 사람들, 그리고 그 중간에 끼어서 적당히 남과 맞추면서 사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일반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비인간적인 사람들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유형 중에서 과연 어떤 유형이 극과 극을 이루게 되는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극과 극이 통하는 원리를 아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언뜻 보기엔 개를 버리는 사람과 버려진 개를 키우는 사람이 극과 극으로 보여진다. 당연하다. 서로 정 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하지만 실제로 극과 극은 그렇게 쌍을 이루지 않는다.

 

이 네 가지 유형 중에서 실제로 극과 극을 이루는 쌍은 바로 개를 버리는 사람들과 개를 버리는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 버려진 개를 기르는 사람들과 누가 개를 버리든 말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빠진다. 이들은 그저 방관자로써 머문다. 자기가 좋아하고 행복한 일을 하느라 남이 어떻게 살든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전혀 짝이 맞지 않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극과 극이 되는 것일까? 그것의 시작점은 바로  개를 버린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개를 버린 사람이지만, 설령 그들이 원인 제공자였다고 해도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서로 극과 극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의 네 가지 유형 중에서 개를 버리거나, 개를 키우거나, 그런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선택을 했든 간에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이들 중에서는 버려진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을 희생하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그저 개에 대한 연민으로 인해서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를 키움으로써 보람도 얻으면서 행복하기도 하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일을 오랫동안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스트레스로 인해서 죽고 마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머지 한 유형, 개를 버리는 사람을 비난하는 유형만은 나머지 셋과는 다르다. 이들만이 유일하게 남을 신경 쓴다. 자신이 행복한 일은 홀로 할 수 있지만, 남을 비난하려면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

 

이들은 무엇인가가 좋아서 그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반대 편이 너무 싫어서 그쪽으로 간 경우이다.

 

이것은 어딘가에 끌리는 힘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밀어서 가는 힘이다. 그래서 쉽지가 않다. 무엇인가가 좋아서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싫어서 반대 편에 있는 것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뭐든 억지스러울 수 밖에 없다.

 

소소하게 남을 돕기는 하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버려진 개를 보고 가엽다고 느끼긴 하지만 키울 수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생각들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양심을 건들고 결국 삶에 대한 만족도를 떨어뜨리게 만든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사람과 그 자신이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개를 버리는 사람을 비난하면서도 개를 키우지 않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하는 생각은, 자신은 적어도 적극적으로 나쁘게 살지는 않았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황이 좋을 때나 유지가 될 뿐, 언제라도 위기가 닥치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 불안함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리고 그 불안함으로 인해서 더욱 더 큰 비난을 만들어 낸다. 원래 두려운 개가 더 크게 짖는 법이다. 하지만 이 비난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원래 두려움은 사람을 비이성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비난의 강도가 거세지고, 그럴수록 비난의 대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비슷해지고 만다. 괴물을 쫓다가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모비딕의 에이허브 선장의 삶이 겹쳐진다이 과정이 바로 극과 극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통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흐름이다.

 


일본 만화 중에서 '데스노트' 라는 것이 있었다. 노트에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저 선한 것이 좋아서 선한 사람과 악이 미워서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각자 이 노트를 갖게 되었을 때 어떤 차이가 생겨날까?

 

선한 것이 좋은 사람은 살인이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고 해도 결국 그 노트에 사람의 이름을 적지 못한다선한 것이 좋아서 선하게 사는 것이니 살인과 같은 악한 짓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악한 것이 미워서 선하게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노트에 이름을 적을 수 있다. 악을 처벌하는 것이 선을 이루는 것이니 당연하다처음엔 어쩔 수 없이 떨리겠지만, 나중엔 오늘 학교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친구의 이름도 적을 수 있게 된다.

 

결국 범죄자를 너무 증오하다가 보니 그 자신이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극과 극이 통한 순간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이 밉고 싫고 증오스러워서 그 반대 편의 길을 가기 때문에 그렇다.

 

기본적으로 최초에 그들이 반대편에 느낀 감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것은 범죄와 같은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차별이나 무시와 같은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일 수도 있다. 억압이나 강요와 같은 누군가의 삶을 무척 힘들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 그것에 대해 반대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악한 것을 몰아내고, 차별과 무시가 없는 세상을 꿈꾸고, 억압과 강요가 사라진 세상을 원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것은 점점 뒤틀리고 변형될 수 밖에 없다. 싫다는 것은 증오로 확대되고, 나중엔 도저히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한다.

 

더군다나 비난의 대상이 된 당사자들, 사실은 그저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았을 뿐인데, 그것이 그저 사회 통념상 매우 이기적이었을 뿐인데 누군가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나올까? 비난을 받으면 미안하다고 하면서 사죄를 할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비난 받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또한 별 것도 아닌 것으로 큰 비난을 받게 되면 오히려 반발을 하게 된다. 그러니 그들 역시도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왜 자신을 비난하냐고 한다. 사람은 원래 다 이기적인 존재인데, 왜 이기적을 사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스스로를 비호한다. 그리고 너 역시도 다를 바 없다고 날카롭게 찌른다.

 

그리고 이런 반응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더욱 더 자극한다. 그러니 그들이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억지 논리로 자신의 혐오스러운 삶을 합리화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과정은 끝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반복될 때마다 서로는 각자의 끝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극과 극이 완성된다. 거기엔 서로를 끝없이 과도하게 비난하는 말만 남아 있게 된다

 

결국 그 둘은 절대적으로 서로가 필요한 한 쌍이 되고 만다. 당연하다. 좌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라는 개념도 없어지게 된다. 빛은 어둠을 통해 빛이라는 개념을 얻게 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이란 책을 통해 이 말을 남겼다그는 무엇인가를 혐오하는 감정이 어떤 위험성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던 것이다. 누군가를 너무 오랫동안 싫어하게 되면 그 자신도 그런 모습이 되고 만다.

 

, 그러면 그 위험성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과연 누가 그것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을까?

 

당연히 혐오를 당한 쪽이 아니라 혐오를 한 쪽이다. 왜냐하면 혐오를 당한 쪽은 그냥 개를 버리거나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해서 산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한 것이니까 그렇다. 사람은 원래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바꾸지 못한다.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 바꿀 수 있다. 자신을 좀 더 깊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품은 혐오나 증오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이해할 수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 어렵지만 충분히 가능하긴 하다.

 

또 다른 상황 하나를 더 보자. 키우는 개의 간식을 사주려고 한 달에 천만 원을 쓴다는 어느 개 주인의 사연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고 해보자. 앞에서 말한 네 종류의 사람들 중에서 누가 이 사람을 비난하게 될까?

 

개를 버리는 사람일까? 버려진 개를 키우는 사람일까개를 버리든 말든 관심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면 개를 버리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일까?

 

흥미롭게도 이때도 개를 버리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이 비난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개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것은 보편적 가치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를 버리는 사람을 비난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

 

 비난에는 나름대로 근거도 있다사람도 제대로 못 먹고 사는 세상이라서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는 매일 굶어 죽는 아이들이 넘쳐나는데 어떻게 개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쓸 수 있냐고 한다그 천 만원이면 굶는 아이들 천 명은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 이들은 원래 처음부터 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개를 빌미 삼아서 사람을 비난하는 용도로 쓴 것이다. 정말로 개에게 관심이 있다면 천 만원 어치 간식을 먹고 사는 개도 좀 과하긴 하지만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 개만큼은 행복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극과 극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나 자신하고는 별 다른 관련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분명히 상관이 있다. 정도가 약할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 사람이 싫은 이유를 설명하고, 자신의 기분이 상했으면 기분이 상하게 된 원인이 된 사람을 비난하고,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나면 자신이 화를 낸 이유가 정당하다고 설명하려고 애쓴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이다. 그 정도가 극단적이지 않을 뿐, 그 형태는 비슷하다. 그리고 그런 비난과 험담들이 자꾸 반복되게 되면 비록 그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결국엔 어느 한쪽으로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이 싫어서 반대편으로 가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사는 삶이 되고 만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행한 것을 피하는 삶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미워하면서 사는 삶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사는 삶의 극과 극처럼 보인다그래서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결국엔 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이다.

 

이것은 각자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한 가지 중요한 판단 기준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를 할 때 그것이 좋아서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의 것이 싫어서 하고 있는지를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집안이 깨끗한 것이 좋아서 청소하는 사람과, 집안이 더러운 것이 싫어서 청소를 하는 사람의 차이점이다. 일반적으로 보통 때는 이 두 사람의 행동은 그리 차이가 나질 않는다. 각자 열심히 청소를 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른 나쁜 일들과 겹쳐지는 순간 둘은 완전히 서로 다르게 행동한다예를 들어서 누군가 집에 놀러 와서 실수로 컵을 깼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깨끗한 것이 좋은 사람은 잠시 난감하겠지만 그저 치우면 된다. 하지만 더러운 것이 싫은 사람은 그런 상황에 몹시 화가 난다. , 더러운 것이 싫은 사람은 조금만 나쁜 일이 겹쳐도 폭발을 한다.

 

평소에 사람의 배신이 두려운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가 조금만 수상한 짓을 해도 바로 의부증이나 의처증에 시달리게 된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배우자가 배신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삶 속에서 아주 자주 발생한다.

 

일등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남들에게 뒤쳐지는 것이 두려워서 노력하는 사람의 차이와 같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과 욕먹기 싫어서 뭔가를 하는 사람의 차이와 같다.

 

건강해지고 싶어서 운동을 하는 사람과 병에 걸릴까 봐 불안해서 운동을 하는 사람의 차이와 같다. 좋은 몸매를 가꾸거나 더 맛난 것을 먹고 싶어서 살을 빼려는 사람과 뚱뚱해 보이는 것이 두려워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차이와 같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면에 도달하고 싶어서 그것을 하려는 것과 부정적인 면이 두려워서 그것을 피하려는 삶의 차이이다. 원래 열정과 집착은 같은 말인데, 그것이 긍정적인 면에 도달하고 싶어할 때 열정이라고 부르고, 반대로 부정적인 면을 피하려고 할 때 집착이라고 부른다.

 

그러다 보니 열정과 집착은 평소엔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삶에서 언제나 좋은 일만 생길 수는 없다. 그래서 부정적인 면이 두려워서 피하려고 사는 사람은 조금만 뭔가 꼬여도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것과 결론적으로는 비슷해지고 만다. , 불행해지고 만다.

 

더러운 것이 싫은 사람은, 처음엔 더러운 것이 병을 걸리게 하고 그로 인해서 불행해질까 봐 그것을 싫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더러운 것을 너무 싫어하다 보니 결벽증에 걸려서 오히려 불행해지고 만다원인은 정 반대이지만 결벽증은 더럽게 사는 것과 똑같은 불행을 가져다 준다이것 역시도 결국 극과 극이 통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하고 있는 것, 자신이 하고 싶다고 믿고 있는 것, 자신이 뭔가 집착하는 것들에 대해서 깊은 되돌아 봄이 필요하다.

 

그것이 그 반대편에 있는 무엇인가가 두려워서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결말로 이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집착은 그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남기지만, 집착의 대상이나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좋아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외로운 것이 두려워서 사람과 만나려고 한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상처, 집착, 배신은 모두 거기에서 생겨난다.

 

아는 것이 좋아서 책을 읽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남들에게 무식해 보일까 봐 두려워서 책을 읽는 것은결국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해도 책을 많이 읽었다는 우월감만 만들어 내고 만다. 지식이 지혜로 발전되지 못하고 머문 것이다.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

 

무엇인가가 좋아서 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자부심이나 우월감을 갖지 않는다. 좋아서 한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다. 하지만 뭔가가 싫어서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자부심과 우월감이 반대 편에 있는 상대를 더욱 더 멀리 밀어내고, 심지어 중간에 있는 별 생각 없는 사람들조차도 같이 밀어 내고 만다. 그리고 나중엔 조용히 버려진 개를 키우거나 남에게 헌신하기만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왜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냐면서 화를 낸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일명 깨시민이 되어가는 상황이다.

  

사람들의 믿음과 달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리석다. 기준점이 모호하긴 하지만 사실이다. 인간이 감정의 존재인 이상 인간이 현명하기란 매우 힘들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경험과 지식이 쌓인다는 것은 그나마 그 어리석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가망성을 갖게 만들어 준다.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지 않게 살려면 자신이 삶을 되돌아 보고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살고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삶의 긍정적인 면을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이 오늘 하고 있는 남에 대한 비난이 스스로를 상처입고 있는지 바라봐야 한다.

 

사실 개를 버리든, 개를 키우든, 개에게 관심이 없든, 개를 버리는 사람을 비난하든, 모두가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단지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자신에게 해가 되지는 않게 해야 한다.

 

적당한 비난과 비판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극으로 치닫는 것은 오히려 사회를 망치는 지름길이 된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 꼭 괴물이 될 필요까지는 없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성의 가격  (0) 2018.06.22
나의 행복 그리고 너의 행복  (0) 2018.06.18
자기 주도적 삶  (0) 2018.06.09
내가 가장 젊은 날  (0) 2018.06.02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0) 2018.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