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아이루다 2018. 5. 30. 08:21

 

작가는 눈을 들어 창문을 바라본다. 그곳을 통해 희미한 여명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은 어둠 속이다. 작가는 시선을 돌려 이제 막 탈고를 끝낸 눈 앞에 있는 노트북 속에 있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지난 밤의 마지막 사투의 순간들을 흐릿하게 기억해낸다.

 

지난 며칠간의 사투로 인해서 책상 위에는 여기저기 커피를 담았던 컵들이 널 부러져 있고, 재떨이는 넘쳐나도록 담배꽁초들이 꽂혀 있었으며, 24시간 이상 앉아 있던 자리는 축축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2년간 끌어오던 소설의 마지막을 완성했으니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긴장이 풀리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 온다. 사람들은 작가를 출퇴근이 없는 편한 직업으로 생각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 보다 힘든 직업도 드물 것이란 생각이 든다.

 

* * *

 

창작물들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작가, 화가, 작곡가디자이너 등등은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서 극심한 창작의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면발 뽑듯이 그것들을 아주 쉽게 만들어 내는 인물도 있지만, 대부분의 창작가들에게 그런 행운은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으니까 말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어떤 사업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겪은 치명적인 가난에 대해서 지금은 웃으면서 말한다. 돈을 훔친 기억, 먹을 것이 부족해서 구걸을 했던 기억, 가난한 부모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받은 모멸감 등등, 듣다 보면 참 가여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역시도 힘든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비인간적인 차별을 극복한 사람들에 대한 멋진 이야기들도 꽤나 많다. 특히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의 주인공은 주로 여자나 흑인들인데, 당연히 과거의 그들이 주로 차별을 받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흑인 군인,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최초의 흑인 복서 등에 대한 이야기부터 최초의 여자 마라토너, 최초의 테니스 선수, 최초의 여자 법관 등등, 아마도 이런 식으로 최초의 기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로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차별이 심했고, 그만큼이나 기득권의 저항이 심했었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런 세 종류의 전혀 달라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창작의 고통을 겪은 창작자, 어린 시절의 힘든 시간을 보낸 사업가, 차별을 극복한 많은 최초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감정의 흔들림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안타까움 일수도 있고, 대단함에 대한 존경심일 수도 있고, 용기에 대한 감동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 과연 나라면 그들처럼 할 수 있었을까생각해보면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현재의 자신이 그들처럼 힘든 시간들을 겪는다면 아마도 쉽게 포기했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노력과 의지가 더욱 더 빛나 보인다. 존경스럽기도 하고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 깜빡 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연 나에게 그럴 기회조차 있었냐 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창작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타고난 예술 능력을 가질 기회,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극복할 타고난 두뇌 능력을 펼칠 기회, 한 분야에서 차별을 극복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냉정히 말하면, 나를 포함한 우리들 대부분은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창작의 고통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며칠 밤을 세우더라도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글 한 편을 써낼 능력이 있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거부할까 싶다.

 

비록 어린 시절에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더라도 타고난 머리로 공부를 잘해서 결국 자신의 삶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거부할까 싶다.

 

미국의 최초 메이저리거가 된 흑인 선수는 잭키 로빈슨은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도 있지만그가 실제로 야구장 내에서 활동한 내용 자체도 정말로 최상급 활약이었다. , 그는 그저 피부색이 검었을 뿐, 최상급 수준의 선수였던 것이다.

 

그는 미국의 흑인 역사를 바꾼 사람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의 등번호 42번은 영구결번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를 기념하는 날인 매년 4 15일이 되면 LA다저의 모든 선수들 은 모두 같은 42번 등 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나오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그가 해낸 일은 대단하지만, 과연 그가 야구에 관한 그런 운동능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면 그런 일을 해 낼 기회라도 있었을까?

 

이 부분은 좀 냉정하게 봐야 한다. 그래야 전체가 보인다. 사람들은 그 동안 성공한 사람들의 결과물을 보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서, 그들의 성공에 있어서 다양하게 작용한 요소들 중 오직 노력한 부분만을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그때 강조가 되는 것도 바로 노력에 대한 부분뿐이다. 왜냐하면 타고난 것들은 어쩔 수 없지만, 노력은 후천적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태도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떠 것의 장점만 보는 것은 나쁜 버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오해를 낳는다.

 

이런 오해는 말 그대도 오해이지만, 그리 문제는 없다. 그저 자신의 의지박약을 스스로 한탄할 뿐, 적당히 자신이 타고난 대로 살아가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아주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만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만든 창작물에 들어간 노력과 그 고통의 시간들, 성공을 하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던 과거의 기억들, 차별과 편견에 벽에 맞서 싸운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과거의 나날들이 머리 속에 가득하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노력을 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한 아무런 인식 없이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었다면 그런 고통의 시간을 보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에 대해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당연하다. 누가 그것을 인식하겠는가?

 

사실 냉정히 말하면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재능을 인식하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그저 타고난 재능의 결과라면 사실상 그들이 이룬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룬 모든 것이 모두 노력의 결과이고 싶어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신의 삶이 가치 있어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천재 과학자 중 하나인 아인슈타인은 살아 생전에 한번 연구실에 들어가면 일주일 이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 시간들을 통해서 우주의 원리를 상상했고, 특수 상대성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에게 당신이 이룬 업적은 그저 타고난 능력의 결과물일뿐이라고 하면 과연 그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엄청난 시간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집요할 정도로 깊은 사고를 통해서 나온 그 이론들이 그저 타고난 재능의 결과라는 사실을 말이다.


절대로 인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알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두뇌능력만이 타고난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런 집요한 성격, 그런 끝없는 탐구심, 그리고 우주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지적 욕구 모두가 사실은 그가 노력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그가 그 시대에 태어났기에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그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저 평범한 이론 물리학자로 끝날 수도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말이다.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 역시도 비슷한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 정상에 서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 회고록을 쓸 수 있을 만큼의 힘든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얼마 전 뉴스에 슬픈 이야기 한편이 실렸다. 그것은 바로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젊은이의 이야기였다. 그는 노래, 연기, , 얼굴까지는 완벽했지만슬프게도 키가 작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 키를 크게 만들어 주는 수술을 받다가 결국 사고로 그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뉴스 기사로 나온 이유는 뮤지컬 주인공 배역을 맡아서가 아니라 어처구니 없는 의료사고의 주인공이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타고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것을 해볼 기회조차 없이 살아가야 하는데,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자리에서 설 수 있었던 것들을 모두 자신의 노력으로 돌리려고 한다. 그래야 그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잘남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오히려 타고난 재능으로 성공을 거둔 이들이 더욱 더 노력의 가치를 강조하게 된다. 타고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만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내와 노력은 모든 부족함을 다 메울 수 있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어라고 칭송한다.

 

그렇게 노력의 가치는 모든 가치를 뒤로한 채 최상단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과연 누가 불꽃같은 연기를 위해서 체중을 20Kg 감량할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거부할 지, 영화 속에서 노출되는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서 힘든 웨이트트레이닝을 거쳐 초콜릿 복근을 만들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노력을 해봐야 자기만족으로 끝난다. 물론 그것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체중을 감량하고, 복근을 만들 수는 없다.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보통은 돈이다.

 

, 그런 노력을 통해서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겠다고 거부할 것인가? 10억만 벌 수 있다면 감옥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이 줄을 섰는데 말이다.

 

소설로써 그리고 영화로 만들어진 마션에서는 사고를 당한 후 화성에 홀로 남게 된 주인공은 살기 위해서 화성의 지표면을 이동하면서 이런 말을 혼자 중얼거린다. 이 화성은 어디를 가도 자신이 모두 최초라고 말이다. 누구도 그렇게 장기적으로 그곳에서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또한 그리 멀리 이동한 적도 없으니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화성 최초라는 타이틀은 과연 얼마나 그의 것일까? 물론 그가 능력이 뛰어나기에 화성까지 임무를 하러 갈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고가 나고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전혀 그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거의 초인적인 능력과 의지를 발현하여 스스로 살아남았으니 화성 최초의 타이틀을 가지 않을 이유란 없다그런데 과연 정말로 그것은 모두 그의 몫일까

 

질문은 이쯤에서 멈춰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더 확대가 된다. 도대체 누군가가 만든 위대한 창작물이나 누군가 이뤄낸 대단한 업적은 과연 어디까지가 그들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말처럼 그런 힘든 노력을 통해서 얻은 것이니 온전히 모두 다 그들의 것인가?

 

세상 속에서 떠도는 이야기들 중에서 노력에 대한 가치는 수 없이 되풀이 된다. 참고, 인내하고, 버티고, 이를 악물고 노력하다가 보면 언젠가 새벽이 올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똑같이 칼로 찔렸다고 해서 똑같이 아픈 것은 아니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더 아프고, 둔한 사람은 덜 아프다. 어떻게 같은 자극을 줬다고 해서 동일한 반응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이쯤에서 우연히 들었던 한 문구가 생각난다. 요즘 세상은 노력의 질은 따지지 않고 노력의 양만을 따진다고 말이다. 그래서 같은 시간을 노력하지 못한 것만을 탓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양은 질을 따라갈 수 없다. 비싼 요리가 비싼 이유는 양이 많아서가 아니다. 질이 좋아서 그렇다.

 

머리가 좋은 아이가 한 시간 공부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아이가 열시간 공부하는 것 중 누가 더 나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머리가 좋은 아이는 공부가 재미있기에 하루 종일 공부를 해도 지치지 않을 수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삶을 결정하는 많은 조건들은 모두 우연히 선천적으로 주어졌고, 그것이 결정되는 과정에 있어서 개인의 의지나 노력은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당연하다. 누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스스로 계획하겠는가? 그리고 그 우연함 속에서 각자의 삶이 완성되어 간다. 그래서 그 길의 끝이 노벨상을 받는 것이거나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죽는 삶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성공한 사람들은 태어난 후 자신이 한 노력만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한 노력의 이야기는 일반인들에게 마치 '너희가 지금 나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노력이 부족해서'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노력하는 성격조차도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격도 일정한 환경이 갖춰지지 못하면 나타날 수 없다는 점이다매일 싸우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타고난 능력이나 노력의 여부와 상관없이 삐뚤어져서 조폭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오히려 재능보다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요즘은 서울대학교를 들어가려면 머리가 좋게 태어나는 것보다 강남에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성공한 사람들의 흔한 착각이자 자신이 잘나고 싶은 욕구로 인해 비롯된 것이니 대충 넘어갈 수 있다. 분명히 그들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는 나쁜 영향을 까치기도 하지만, 소수의 방향을 잃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한줄기 빛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문제는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 역시도 단지 성공하지 못했을 뿐 결국 사고방식 자체는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일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인식보다는 가진 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많은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아침마다 출근을 하기 싫은 직장인은, 출근을 하기가 너무도 싫다고 힘들어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출근의 기회조차 없는 많은 취업준비생을 생각하지 못한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주부는, 불임증으로 인해서 아이를 낳아서 키워 볼 기회조차 없었던 또 다른 부부들이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젊은이는, 고아로 태어나서 홀로 자라야 했던 어떤 사람의 삶을 생각하지 못한다.

 

지난번에 떠난 해외여행을 망쳤다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단 한차례의 해외여행조차 가보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것은 누군가 자신보다 불우한 사람의 삶을 보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봤다고 해서 내 손의 벤 상처에서 피가 멈추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은 각자의 몫이니 그것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감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감사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감사함이란 말 자체가 바로 누군가에게 받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준 사람이란 존재를 가정한다. 그리고 감사 자체에 숨겨진 의미가 바로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한 특혜를 의미한다. ,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선택되었음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뭔가 이룬 것이나, 자신이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처음부터 그것을 해 볼 기회나 혹은 불만을 가질 기회조차 없었던 수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잊은 결과이다. 자신이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면, 그것을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삶은 저주를 받은 것이어야 할까?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얼마나 상식적인 행위일까?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들은 감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가진 것들은 다행스러움의 대상이어야 한다그렇게 결국 자신이 이룬 그 모든 것은 운 좋게 얻은 결과임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자리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고, 그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현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고,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고, 이 정도 수준의 삶을 살 수 있어서 다행이어야 한다.

 

또한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원하지만 얻지 못한 것들은 불만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불운이어야 한다그것들은 너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이 이룬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같은 목적이다. 그래야 자신이 가치가 있어지고 자신이 잘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인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무엇인가를 실패한 단점도 자신의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경우엔 해 놓은 일보다 하지 못한 일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 끝없이 괴롭히게 된다.

 

왜 이런 불필요한 괴롭힘을 경험하려고 하는가?

 

장점이 운 좋게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되고, 단점이 운 없이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것이 된다면, 얻지 못한 것들이 아쉬울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생각의 변화가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기회이다. 만약 노력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면 오히려 이런 사고의 변화가 진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하되 자신의 잘남으로 여기지 말고, 할 수 없는 것들을 하지 못하되 자신의 못남으로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내가 어찌할 수 있었던 것들이 아니다.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은 운 없이 그렇게 태어난 것일 뿐이다. 또한 나보다 잘나 보이는 수 많은 사람들 역시도 그저 운 좋게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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