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와 너의 벽

아이루다 2018. 5. 22. 07:38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언제였던가? 우연히 사진 한 장 속에서 이렇게 적힌 위로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니, 이 원래 문구 자체가 위로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누가 그 위로의 문구를 보냈는지, 또 누가 그것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갑자기 코 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어서 지금은 오래된 옛일 같지만그 사진이 찍힌 2015년도는 참으로 참담한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예전에 감정이입과 공감이 차이에 대해서 나름대로 명확하고 체계적인 정리를 했던 나였지만, 현실 앞에서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런 단어들의 정의는 실제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지도 모른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듯 갑자기 변화되니까 말이다.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분석해봐야 무엇이 그리 달라질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 자신은 얼마나 다른 이들로부터 공감 받고 있으며 또한 누군가를 제대로 공감하고 있을까?

 

공감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보니 외로움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왜 일까? 공감 받지 못하면 외롭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이 세상에 홀로 있는 듯한, 아니 많은 이들이 있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외로운 것일까? 그 외로움이 한 문장의 글귀를 보고 눈물이 나게 만든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도 모두 외로운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그렇고 그들도 외로워 보이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다들 크게 웃고, 다들 으스대고, 다들 겁이 없고, 다들 별다른 고민이 있어 보이질 않고, 다들 자신감 있어 보이고, 다들 거침없고, 다들 행복해 보이지만 내 눈에는 자꾸 외로움이 보인다.

 

내가 외로우니 남들도 외로워 보이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무엇인가에 대한 부족함일 것이다. 적어도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외로움이 있는 사람들은 자꾸 뭔가를 찾는 것 같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는 것처럼 내면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자꾸 뭔가를 찾아서 채우려고 하고 있다.

 

내가 사람들에게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 이유인 것 같다. 캠핑카를 매달고 어딘가 신나게 달려가는 차 안의 사람들이나, 네 바퀴가 달린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나, 어느 식당에 모여서 왁자지껄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나, 커피가게의 한쪽 구석에서 노트북을 켠 채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모두 비슷해 보인다.

 

아마도 비어있다는 것이 그런 채움을 위한 행동들을 만들고 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채워질 것 같기는 하다하지만 문제가 보인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배가 고픈 것처럼 명확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 도대체 무엇을 채워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돈, 권력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책과 여행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관계와 성장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취미와 오락거리를 추구하겠지만, 결국 모두 같은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

 

바로 내면의 빈 곳을 채우는 것이다. 아마도 잠시 채워진 듯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아주 작은 공감만 느껴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비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비어있음은 여전하다. 과연 무엇이 부족하기에 그리 노력해도 차지 않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것은 밑 빠진 독인가? 그래서 아무리 물을 부어도 차오르지 않는 것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무엇이 비어 있으며 또 얼마나 빠르게 채워야 그것을 넘치도록 할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한다. 머리 속이 복잡해지고 혼란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내 안의 빈 공간은 도대체 왜 생겨나는 것일까?

 

결론이 난다. 그것은 '다른 이의 온기' 이다. 물론 다른 표현도 많다. 인정, 관심, 집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서 결국 공감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인정을 받고 온기를 느끼는 것에 대해서 목마름을 느낄까? 왜 이것들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 답은 쉽다. 우리 인간은 원래 그렇게 서로 모여서 살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로 각자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듬고, 서로 등을 지켜봐 주며, 서로 바라보면서 살았어야 했다.

 

사람은 마주볼 때 가장 따뜻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 분리가 되었을까?

 

함께 사는 세상은 온기가 넘치고 인정도 받기 쉽지만 반대로 아주 차가울 수도 있고 무시를 받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넉넉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어딘가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그 상처를 주변에 전달한다. 화가 난 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하고, 신경질이 난 사람들이 사람을 무시한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난하고, 열등감을 느낀 사람들은 있지도 않는 사실로 음해를 하기도 한다.

 

결국 이런 나쁜 감정들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또 다른 누군가를 상처를 주고, 그 상처를 받은 사람 역시도 나쁜 감정이 생기면서 행동을 반복한다.

 

서로 연결된 사람들에게 나쁜 감정은 전염되듯 퍼져 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끊고 싶어 했다. 누군가의 기분이 자신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을 막고 싶었다. 좋은 감정들은 언제든 환영이지만, 나쁜 감정들이 오는 것은 막고 싶었다.

 

그래서 뭔가 도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이다.

 

벽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두 존재한다. 물리적 벽인 개인의 사생활과 안전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정신적인 벽은 다른 이들의 나쁜 감정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벽을 만든 사람들은 그곳에 작은 문을 만들어 둔다. 그래서 자신이 원할 때만 그 문을 열길 바란다. 누군가 들어오고 싶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 노크를 하고 응답을 해줄 때 비로소 누군가 그 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은 뭔가 선택적이기에 매우 좋아 보인다.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자유로움의 극치처럼 느껴진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벽은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단절' 이다. 벽은 분명히 나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 벽은 남과 나를 분리 시키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분리와 단절이 결국 마음 속에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만다.

 

우리는 벽에 뚫려 있는 작은 문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의 감정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속상했던 일, 상처받은 일, 기분이 상했던 일, 걱정되는 일 등을 서로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 역시도 나와 같은 종류의 문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가 한 말들은 상대의 문 앞에서 튕겨나간다. 물론 상대는 마치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나를 위로하지만, 사실 그 사람은 내 말을 튕겨내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랬듯이 그 사람 역시도 나쁜 감정들이 자신의 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상대의 감정이입을 통한 어느 정도 위로는 받지만, 결코 공감은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니 아무리 오랫동안 말을 해도 결국 내면의 비어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다들 그렇게 자신의 벽 안에서 서서히 메말라 간다. 그 벽 안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체온만으로 버텨내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각자 벽을 뚫고 나와서 서로 부둥켜안으면 훨씬 더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고, 가슴 벅찬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벽이 주는 편안함과 더해서 분리 자체에 너무 익숙해져서 벽이 없어지는 두려움을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아니 처음부터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

 

결국 타인과의 단절이 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오래된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절의 주지승이었던 노스님은 절에 들어온 조폭들에게 밑동이 깨진 항아리를 물로 가득 채울 수 있으면 절에 계속 있어도 된다는 일종의 자격시험 문제를 낸다.

 

조폭들은 그 시험을 통과하고자 열심히 물을 날라서 채우지만, 깨진 항아리를 채울 방법은 없어 보인다. 시험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조폭들은 갑자기 항아리를 들어서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대로 연못 속으로 넣는다. 그러자 항아리는 그제서야 물로 가득 찬다. 그러자 노스님은 웃으면서 그들이 시험에 통과했다고 선언한다.

 

밑이 빠진 무엇인가를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뭔가를 부어서는 해결 불가능하다.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그 자체에 완전히 파묻혀야 한다. 항아리가 연못 속에 들어가서 물로 가득 차듯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벽을 만들어서 말라버린 사람들이 그것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은 벽을 깨고 서로가 만나는 방법뿐이다. 그것 이외의 모든 방법은 그저 잠시간만 채울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나 혼자 이 방법을 안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내 벽을 깨고 나가는 순간 다른 이들도 같이 그 벽을 깨고 나와야 원하는 것을 제대로 얻을 수 있다. 나 혼자 깨봐야 결국 분리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나라도 먼저 깨고 나와야 그 분리의 간극이 조금이라도 좁아질 수 있음을 알긴 한다.

 

하지만 여기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렇게 홀로 글을 쓴다. 언젠가 혼자라도 그 벽을 깰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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