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내가 가장 젊은 날

아이루다 2018. 6. 2. 07:41

 

하루는 아침으로부터 시작된다. 적당한 시간이 되어서 눈을 뜨든 아니면 자명종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든 상관없이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면 하루가 시작된다.

 

마침 오늘 신나는 나들이가 있는 날이라면 아침부터 무척 기분이 좋겠지만, 중요한 시험을 보는 날이거나 갑질하는 고객사를 방문하는 날이라면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경직된다. 그래서 그럴 때는 오늘 하루가 별 탈 없이 빨리 지나가서 퇴근 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마다 월요일이 찾아온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혹은 그 전의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을 다녔던 시절부터 월요일은 주말이 끝난 첫 날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에게 있어서 별로 반기고 싶지 않은 날이 되어 있다. 특히나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월요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싫은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월요일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주말을 기다린다.

 

매년 봄이 되면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가을이 되면 풍성하게 자라서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가을을 기다린다. 그것을 위해서 봄부터 여름까지 많은 노동을 해야 하지만, 그 노동이 있기에 가을의 풍성함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제 15년 정도 일을 한 직장인은 가끔 자신이 정년 퇴직을 한 후의 삶을 생각한다특히 일이 힘든 날이면 퇴직 후 어느 한적한 시골에 가서 집을 짓고 살 생각을 하거나, 배우고 싶었던 악기를 배우는 삶이나, 시간이 없어서 못했던 해외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최소한 30년은 일을 해야 아이도 다 키우고 자신의 노후도 보장될 것 같기에, 이제 겨우 반정도 왔지만 그래도 또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다 마무리가 되는 때가 분명이 오긴 할 것이란 희망을 가진다.

 

사람들은 누구나 희망을 가진다. 그리고 그 희망이 이뤄지는 시기는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아침엔 저녁에 이뤄질 희망을 품기도 하고, 인생의 시작 부분인 청소년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희망들은 지금 당장 힘든 상황을 버티게 해주는 너무도 중요하고도 귀한 존재이다.

 

과거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나서 모든 나쁜 것들이 다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간 후 유일하게 그 안에 남아 있던 것이 바로 희망이었다. 그러니 희망은 그야말로 마지막 보루이다.

 

현재가 힘든 사람은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힘듦은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자극이 된다. 하지만 미래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은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멀쩡하더라도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지금을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희망에 대해서 대충 '좋은 것' 정도만을 인식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희망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된다. 자신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 키우던 아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희망,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통이 사라지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등이 바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희망은 삶 그 자체를 결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희망은 정말로 그렇게 좋은 것일까? 이상한 질문이지만, 그리고 희망이 분명히 좋은 것이지만, 희망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는 좀 더 깊게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착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에 대한 기대이다. 운이 좋다면 이뤄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뤄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믿으면서 현재의 힘듦을 버티는 것이다.

 

, 불행을 버텨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실제로 그것이 이뤄지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현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역할로써 더 중요할까?

 

당연히 사람들은 이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렇게 믿고 있어야 희망을 기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렇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지는 좀 더 냉정히 생각해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뭔가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행복을 느낀다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것은 행복의 한쪽 면만 본 것이다. , 정신적인 면만 본 것이다.

 

행복은 또 다른 면인 바로 육체로부터도 생겨난다. 추운 밖에서 떨다가 집으로 들어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할 때 행복,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는 행복, 나무로 가득 찬 숲 속을 걸을 때 느껴지는 상쾌함의 행복, 맛난 것을 먹는 행복, 푹 잠을 잔 후 일어난 아침의 행복, 아픈 곳이 다 나았을 때 행복 등등 사람들이 매일 경험하는 수 많은 종류의 육체적 행복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정신과 육체는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최종 적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는데, 누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상호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실제로 몸이 아파지기도 하고, 몸이 너무 아프면 정신 자체에도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스스로 잘 인식하지 못할 뿐, 사실 매일 자연스럽게 반복되고 있다.

 

간 밤에 잠을 잘 못 자면 그 다음 날 회사에 가서 괜히 더 짜증을 낼 수 있다. 단지 그것을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몸이 아픈 사람들은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아주 큰 병에 걸린 사람들은 성격 자체가 변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장시간 과도한 스트레스에 놓인 사람은 암이나 기타 아주 위험한 병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실제로 스트레스는 1급 발암물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육체와 정신은 서로 큰 영향을 미치면서 결굴 행복이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떨까? 희망은 정신적인 영역일까 아니면 육체적인 영역일까?

 

희망은 기본적으로 거의 정신적 영역에만 해당된다. 그나마 희망이 육체적인 면에 관련된 경우는 바로 현재의 병을 완치해서 건강한 몸을 되찾거나 혹은 딱히 병은 없더라도 열심히 운동을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건강한 몸이 되었을 때 정도가 해당된다. 그 외에는 거의 다 정신적이다.

 

희망은 기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것이다. 과거는 희망할 수 없다. 희망은 좋은 것이면서, 그것은 정신적이면서, 미래를 향한 것일 때 한가지 아주 중요한 인식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미래엔 육체가 늙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알고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도 미래에 늙음을 미리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희망을 품을 땐 현재의 육체 상태 그대로 미래로 갔을 때 이뤄진 상황을 가정한다. , 20대에 취직을 앞두고 60대의 퇴직 후 삶을 상상할 때는 늙은 60대에도 20대의 건강하고 젊은 몸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희망은 무조건 좋은 것이 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미래엔 더 늙고 더 병든 몸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젊은 날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앞에서 말했듯 병을 치료하는 중이거나 혹은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일 경우 조금 다른 입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장시간으로 보면 결국 늙는다.

 

사실 늙는다는 것은 너무 천천히 진행되는 과정이라서 한참을 지나봐야 자신이 늙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자신이 어울리는 사람들도 모두 같이 늙기 때문에 자신이 늙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기가 쉽지가 않다.

 

하지만 늙음은 명확하다. 체력이 부족해지고, 산에 오르는 것이 힘들어 진다. 무거운 것을 들 수 있는 힘이 줄고, 조금만 뛰어도 숨이 가쁘다. 매일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나고, 머리 속엔 순간적으로 자주 쓰던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으며, 점점 책을 멀리 둬야 보인다. 노안이 온 것이다.

 

흰머리가 조금씩 늘어나고, 머리 숱이 서서히 줄어들며, 아침에 일어날 때 상쾌함보다는 피곤함이 더 자주 느껴진다. TV에 나오는 젊은이들은 이제 점점 자식 뻘이 되어가고, 아는 사람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은 없어지고 그들의 부모님 문상을 가는 일이 더 잦아진다. 그러다가 결국 지인들 자식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다.

 

하고 싶은 것들은 점점 줄어들고,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막상 하려면 귀찮다는 생각이 들며, 뭔가 새루운 것들이 생겨나기 보다는 지금 이 상태라도 유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변화를 싫어하게 되고, 자꾸 과거에 머무르려고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늙음의 정체이다. 희망에 빠져 있는 아주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다.

 

행복은 정신과 육체의 조화에서 나온다. 그런데 미래는 육체적으로 좀 더 문제가 생기는 시기이다. 그러니 정신이 동일한 상태라면 오늘이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과거로부터 많은 현자들은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지난 과거를 붙잡거나, 오지도 않은 미래를 상상하지 말고,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들의 말씀엔 실제로는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긴 하지만단순히 생각했을 때 내가 가장 젊은 오늘이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날임은 부정할 수 없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가능성이 높은 날이다. 그러니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것은 어쩌면 오늘 행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함과 억울함을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고 싶은 착각일 수도 있다.

 


운이 없다면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10년 후의 미래를 희망으로 삼고 산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현실적인 일일까? 더군다나 사람들의 희망엔 육체의 변화가 빠져 있다. , 늙거나,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점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결국 시간이 흘러 미래가 되어서 그 희망이 이뤄지는 순간 기쁠 수도 있다. 순간적으로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모든 행복은 금세 적응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행복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결국 예전에 비해서 더 늙고 여기저기 아픈 육신만이 남아 있다.

 

미래의 행복한 희망이 이뤄지길 바라면서 살아왔는데 정작 미래가 되니 그다지 행복하지 않는 삶이 되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서서히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자신이 한참 잘나가던 시절을 말하고 싶어한다그런데 거기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실제로 그 경험들을 할 때 자신이 경험한 고통이나 스트레스의 기억은 지워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결국 자신의 과거엔 지금을 희망으로 가졌다는 것을 잊어 먹는다. 그저 과거를 이야기 하면서 행복하고 싶으니 그렇다.

 

왕년에 자신이 회사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 자랑하느라 그 당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퇴직한 후에 전원 생활의 희망을 가졌던 것은 잊어 먹는다. 아니 그런 힘듦을 겪는 기억조차도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는 식으로 좋게 치장하려 한다.

 

입대의 순간부터 제대의 순간만을 희망했던 군생활의 힘듦도 늙으면 모두 그리운 기억들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보정된 기억은 추억이라는 별도의 명칭이 되어서 늙은 육신에 남은 정신적 위로를 담당한다.

 

이렇게 다들 젊은 시절엔 미래를 희망하고, 늙으면 과거를 회상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여기엔 지금 당장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출근길에 퇴근길을 희망하고, 월요일엔 주말을 희망하고, 개학이 되면 방학을 희망하고, 너무 더운 여름이 되면 눈이 오는 겨울을 희망하고 사는 존재이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로 제대로 사는 것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나는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기에 조건적으로는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상태이다. 내 인생의 남은 그 어떤 날보다도 오늘이 가장 젊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 존재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왜 우리는 누구나 오늘 행복하지 못하고 미래의 행복을 희망으로 삼아서 살아가고 있을까? 도대체 오늘 행복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하루 힘들게 출퇴근 하고 있지만, 과연 20년 후에 퇴직 후 노는 삶과 지금의 삶 중에서 어떤 삶이 더 나을까? 물론 오늘 아침엔 일찍 일어나는 수고스러움도, 회사에 가서 스트레스를 받는 힘듦도 있지만, 과연 20년 후 훨씬 늙은 몸으로 깨어나 하루 종일 딱히 할 일이 없는 삶보다 그것이 더 나쁜 것일까?

 

어쩌면 지금 우리들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그저 각자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너무 높여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행복해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더운 여름에 에어컨이 나오는 대중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행복이 있고, 타고 내릴 때 표를 끊거나 잔돈을 거스르는 불편함도 없다. 기술의 발달은 각자의 삶을 매우 편하게 해주고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고, 게임도 할 수 있으며, 뉴스나 책을 볼 수도 있다. 제철이 오기도 전에 각종 과일이 나오고, 매달 고정적으로 적은 비용을 지불하면 웬만한 영화쯤은 집에서 다 볼 수도 있다.

 

수많은 외국 드라마들이 번역되어서 방송이 되고 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하거나 채팅을 하는 것이 거의 공짜이며, 매일 재미있는 사연이나 동영상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LP, 카세트 테이프나 CD를 통해 듣던 음악은 mp3 형태로 바뀌어서 수천 곡을 담아서 들을 수 있고, 앞 사람 뒤통수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영화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들이 상영 중이다.

 

예약을 할 때는 꼭 그 장소에 가서 할 필요가 없이 인터넷을 통해서 가능하며, 그 장소에 가보지 않아도 인터넷 지도를 통해 대략 모습을 확인할 수도 있다. 딱히 지도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초행길을 불안함 없이 운전을 할 수도 있고, 언제 어디에서든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다지 행복해지지는 못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과거에 비해서 현재는 분명히 물질적으로 나아졌는데, 삶은 그다지 행복해지지 못했다. 각자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그럴까?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 더 나아지면, 그 나아진 것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다. 특히나 돈에 대해서 그렇다.

 

수입이 늘어나면 늘어난 대로 지출을 늘어난다. 근처 산에 가면 될 것을 유명한 산에 가서 단풍을 보려고 한다. 국내 여행만 해도 될 것을 해외로 나가야 한다. 그저 밥 한끼 먹으면 될 것을 유명한 식당에 가서 비싼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근처 학원을 보낼 아이를 멀리 비싸고 좋다는 학원에 보내야 하고, 시장에서 사 입던 옷을 백화점에 가서 사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하고, 조금이라도 더 비싼 차를 타고 싶어한다.

 

돈이 생기면 생길수록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들은 늘어난다. 그러니 돈은 평생 부족하다. 그리고 새로 얻은 것들을 누리는 행복은 금세 사라지기에, 자신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대적 행복감만 남게 된다.

 

각자가 희망했던 미래는 현재의 자신이 그대로 미래에 갔을 때만 그 목적이 달성된다. 월급 200만원을 받던 사람이 미래에 400만원을 받는 삶을 희망할 때는 현재 씀씀이나 건강이 그대로 미래로 가길 바라기에 그것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미래가 되었을 때는 이미 자신은 최소한 월 400만원은 있어야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있다. 더해서 몸도 더 늙어있고 말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만족하고 언제 행복해야 할까?

 

도대체 우리들 각자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오지 않은 미래에 있는가? 아니면 지난 간 과거의 기억 속에 있는가? 이것을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때 오늘 내가 사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삶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이 아니다. 삶은 그저 보내는 과정이 아니다. 삶은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고, 내가 그것을 제대로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불행하다면 오늘 당장 그것을 뜯어 고쳐야 한다.

 

문제의 해결을 미래로 미루는 것도, 과거를 기억하며 버티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오늘 내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희망이나 추억으로 버텨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이들의 위로나 공감을 통해서 대충 넘기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움이 온 몸을 관통하도록 두고는 그것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 두려움이 나를 채찍질 할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그러니 오늘 행복하지 못해서 생긴 두려움을 미래에 해결될 것이라고 미루지 말자. 그것은 그저 더 늙고 불행한 나를 상상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때는 오히려 지금의 나를 회상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과거 그 가난했지만 젊고 행복했던 그 시절이 좋았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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