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감성의 가격

아이루다 2018. 6. 22. 08:03



<출처 : 사이언스온(http://scienceon.hani.co.kr/31296)>

 

이 두 그림은 하단에 영어로 쓰여있긴 하지만 대충 해석하면 둘 중 하나는 네 살짜리 아이가 그린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화가가 그린 추상화이다.

 

이 둘 중 어떤 그림이 화가가 그린 추상화이고 어떤 그림이 네 살짜리 아이가 그린 것일까?

 

, 글을 해석해보면 왼편이 아이가 그린 것이고, 오른편이 화가가 그린 것임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을 보지 않고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일단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없다.

 

이 내용은 2011년 사이언스온이라는 매체에 실린 기사로써, 기사는 전체적으로 현대 추상미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진 심킨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혹시나 기사에 나온 테스트를 해보고 싶은 분들은 http://reverent.org/true_art_or_fake_art.html 에 접속하시면 된다. 그러면 진짜 그림과 가짜 그림을 구분하는 테스트를 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눈이 얼마나 막눈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50%가 나왔는데, 그것은 50%를 맞췄으니 어느 정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확률은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데, 이 경우가 그렇다. 두 개 중 하나가 정답인 문제를 맞출 때, 아무 것도 모르고 찍으면 확률상 50%의 정답률을 가질 수 있다. , 50%의 결과라는 말은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이다.

 

결국 50%가 변별력의 최소한의 시작점이다. 그래서 나머지 50% , 그러니까 25% 정도를 더한 75% 이상은 나와야 뭔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더군다나 100%가 아닌 바에야 제대로 된 변별력을 가졌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모나리자로 알려져 있다. 아예 거래 자체가 되질 않아서 가격이 정확히 결정되지 않았지만, 대략 40조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단위를 잘 봐야 한다. 억이 아니고 조다.

 

그렇다면 어느 미술학과에 다닌 학생이 그린 잘 그린 그림과 이 모나리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천 배, 만 배, 아니 수천억 배 차이가 나는 두 그림 사이의 진정한 차이 말이다.

 

물론 모나리자를 그린 다빈치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에 다시는 그런 그림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 고려청자처럼 희귀성으로 인해서 원래 가치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술학과를 다니던 학생이 그 그림을 그린 후 갑자기 죽는다고 해서 그가 그린 그림이 모나리자처럼 값어치 있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가격은 왜 그리 높은 것일까? 그저 거품인 것일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과도한 가치가 부여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인류 역사상 천재라는 타이틀이 가장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그린 대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그림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나리자를 보고는 그 신비한 미소에 압도되고, 감동받고, 다빈치와 시대를 초월해 교감을 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나리자 같은 작품은 가격을 매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숫자이다. , 그럴 수 있는 심미안을 사람의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전체 인류 중에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비율의 어느 정도일까? 테스트에서 언제나 100%의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일단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정말로 후하게 쳐줘도 10%가 채 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10%에 속하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나리자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아주 비싼 그림일까? 어떤 평론가가 극찬한 그림일까?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림일까? 미소가 신비한 그림일까?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가 그린 그림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당연한 말이지만 나 역시도 모나리자가 왜 40조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나마 몇 십억 정도라면 희귀성 측면에서 이해가 가지만 40조는 좀 심했다.

 

그렇다면 10%에 속한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처음부터 왜 생겨나게 될까? 도대체 누군가는 저 그림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어떤 사람은 그저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 정도로만 보게 되는 것일까누군가는 그 그림 앞에서 압도되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반면, 누군가는 그 그림을 사진 찍는 배경으로만 활용하고 마는 것일까?

 

거기엔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하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서로 다른 감성적 능력일 것이다. 외부에서 전달되어 오는 감각을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경험과 지식을 통해 해석해낸 최종 결과인 감성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감성적 능력이 바로 모나리자의 가격을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 과정에 대해서 좀 알아보도록 하자.

 

사람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돈을 쓴다. 하나는 필요한 생필품 구입해야 해서, 둘은 게임이나 여행과 같이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서, 셋이 책이나 음악 그리고 공연과 같은 내면의 감성을 일깨워주는 일을 하고 싶어서 그렇다.

 

물론 여행이나 공연 등은 재미와 감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주기도 하기에 시간과 돈이 부족해서 더 즐기지 못할 뿐, 여유만 된다면 얼마든지 더 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돈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 셋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돈을 아끼려고 하는 영역은 어디일까? 생필품일까? 재미일까? 감성일까?

 

놀랍게도 생필품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삶에 가장 필요한 제품을 사는데 있어서 매우 돈을 아끼려 든다. 그래서 최대한 싸게 사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1%라도 더 싸게 파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산다.

 

그 다음은 재미이다. 재미있는 것이 좋긴 하지만, 너무 비싸면 재미가 반감되니까 그렇다. 재미에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마치 낭비를 심하게 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감성이다. 만약 정말로 감성을 제대로 건드려 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돈이 아깝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

 

아마도 난 아닌데 하는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저 감성이 메마른 사람일 뿐이다. 혹은 정말로 제대로 된 감성을 경험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어서 그런 것이다. 사실 좀 슬픈 일이다. 감성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행복 중에서 최상위급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반적인 경우라면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날까? 단순하다. 생필품에 비해서 재미에 비해서 감성이 가장 크고 깊은 행복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돈이 아까울 것이 없다. 원래 돈 자체가 행복과 맞바꾸기 위해서 버는 것이니까 말이다.

 

일반적으로 10년을 넘게 쓰는 냉장고의 가격이 200만원 정도라고 하고, 2주 유럽 여행은 500만원 정도가 든다고 했을 때이 둘을 단지 가격으로 비교하기는 그러지만, 과연 정말로 냉장고 없이 10년 사는 것과 2주 유럽 여행 안하고 10년 사는 것 중에 누가 더 견디기 힘들까?

 

당연히 냉장고 없이 사는 것이 힘들다. 이것은 처음부터 비교조차 되질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심리에서는 500만원에 2주 유럽여행은 그리 비싼 것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200만원짜리 냉장고는 비싼 것이 된다.

 

단순히 계산해보면 냉장고가 중요하지만, 사람의 심리는 그리 단순하게 동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냉장고를 사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결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 편리함보다는 감성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악한 기업들은 자신들이 만든 제품에 새로운 가치를 불어 넣기 시작했다. 바로 감성이란 개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브랜드이다. 인공적으로 만든 제품에 담겨 있는 감성에 지불해야 하는 가격, 이것이 브랜드인 것이다.

 

물론 브랜드는 품질에 대한 신뢰의 의미도 있다품질을 보장하지 못하는 제품은 제대로 브랜드화 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랜드의 가치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품질이 아니라 바로 그 안에 담긴 감성이다. 품질은 기본이다.

 

그래서 맥주 광고를 할 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흥겹게 대화를 하면서 맥주를 마시는 광경을 보여주고, 냉장고 광고를 할 때 부모님 집에 오래된 냉장고를 바꿔주는 딸의 행복한 얼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들은 모두 감성적인 접근이다.

 

그리고 제대로 감성이 들어갔다고 인식된 제품들은 소위 명품이 된다. 그리고 일단 명품으로 인정받은 제품들은 그때부터는 가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가 생긴다. 오히려 비싸면 비쌀수록 더 잘 팔리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비싸면 비싼 이유가 있다고 믿으니까 그렇다. 사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싸야 더욱 신뢰도가 높아진다는 시장 조사결과 말이다.

 

이것은 결국엔 거품이다. 기업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인간의 감성은 그런 것들로부터 생겨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감성은 그저 자연스러운 것들이었다. 밤에 타오르는 모닥불, 반짝이는 별 빛, 새벽의 고요함, 새의 지저귐, 이제 막 돋아난 새싹, 불타는 노을, 숲 속의 상쾌함, 아름답게 피어 있는 야생화 등등이 바로 감성의 대상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도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경험할 장소를 잃었고,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먹고 사는데 지쳐서 그것을 잊었다.

 


서로 돕는 사람들, 부모님의 사랑, 친구들 사이의 우정, 포기하지 않는 노력, 남녀간의 사랑, 도움을 잊지 않는 사람들, 함께 늙어가는 부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눈빛, 누군가를 위한 다수의 응원, 위험에 처한 사람을 살리고자 함께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 등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점점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서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밖에 없다. 좋은 일들은 줄어들고 나쁜 일들만 늘어난다. 탐욕의 시대가 되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성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그렇게 감성을 잃었다그리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감성에 대한 끝없는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

 

기업이 그 틈을 파고 든 것이다자신들의 제품을 사면 마치 잃어버린 감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처럼 광고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광고나 마케팅에서 인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쯤일 듯 하다

 

지금 시대에는 최대한 감성적 접근을 통해서 가격에 대한 저항력을 낮추려고 노력하는 것, 자신들의 제품을 사면 마치 많은 감성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지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광고의 진정한 목적이 되었다.

 


이것이 꾸준히 반복되자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특정 회사 제품을 사면 남다른 감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고, 프라하에 가면 그곳의 감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고, 모나리자를 보면 특별한 감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자신이 좀 더 행복한 존재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여전히 10%의 비율은 유효하다. ,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제대로 된 감성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은 10%를 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머지 90% 경험이 불가능한 감성을 느낀다고 착각하면서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결국 돈이 부족하게 된다. 사실 감성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기 시작하면 그 한계가 없다. 기업은 계속 돈을 벌어야 하기에 끝없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낸다. 그런 것들은 신상품, 특별판, 한정판, 고급형이란 이름을 달고 소비자를 얼마나 안달 나게 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 거기에 한번 빠져들게 되면 가진 돈을 다 쓰고 나서야 겨우 멈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은 감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모나리자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모나리자가 더욱 더 감성적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야구 선수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야구가 재미있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뭔가를 알면 알수록 흥미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지식적 즐거움이 감성이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지식적 즐거움은 그저 잘난 자신에 대한 자랑이다. 물론 그것도 행복이다. 들어주고 감탄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식이 감성을 방해를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저 별이 빛나는 이유가 수소의 핵융합 반응에 의해서 생겨난 빛이 초속 30km를 달려 우리의 눈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감성에 경험하는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알아야 감성이 생긴다는 것은 처음부터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듯 그렇게 말이다.

 

타오르는 불을 보면 처음 본 사람도 그 안에 빨려 들어간다. 높은 산에 올라 굽이치는 산세를 보면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 속에서 뭔가 꿈틀거린다.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상쾌해진다황금빛 물결이 넘실대는 추수를 앞둔 가을의 논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이런 것들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그것을 설명해줄 수는 없다. 그것들은 그냥 느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설명을 하는 것이 이상하다.

 

감성은 감정의 흐름이다. 하지만 외부 자극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자극으로 인해서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가 감응하는 것이다. , 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을 때만 감응이 가능하며, 그것이 비로소 감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감정은 그 어떤 경우보다도 더 강하게 결과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존재이기에 그렇다. 흔한 표현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감정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그래서 결국 감성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지불해야 할 비용에 대한 심리적 저항선을 확연하게 낮춰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야 한다. 그 감성이 정말로 내 것인지 말이다. 누군가의 설명에 의한 것인지, 그것을 경험하고 싶어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사전에 주입된 지식에 의해서 그런 것인지, 마음 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 이상으로 정의하고 싶은 허영심 때문에 그런지 깊게 성찰해봐야 한다.

 

그래야 감성에 불필요한 돈을 쓰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마다 모두 감성의 대상은 다르다. 누군가는 자연에, 누군가는 그림에, 누군가는 노래에, 누군가는 전자제품에, 누군가는 옷에, 누군가는 명품가방이나 시계에, 누군가는 사람의 몸에, 누군가는 여행에, 누군가는 책에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제대로 된 감성 대상을 찾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누구나 모나리자를 보고 눈물을 흘릴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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