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열등감 극복하기 - 3

아이루다 2018. 7. 6. 09:35

 

앞의 장문의 글 두 개를 통해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답을 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딱히 묘수는 아니었다많이 들었던 대답들이었고, 단지 그 이유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을 뿐이다.

 

해결책이라고 설명된 답은 겨우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조금 새롭게 안 것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부정하지도 외면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점 정도였다.

 

그런데 이 단순하고 일반적이며 평범하기까지 한 설명을 뭘 그렇게 긴 글을 통해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일까?

 

그 이유는 그 단순한 설명들이 현실 속에서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을 하고 지식을 쌓는 것을 두려움과 싸우는 과정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을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과정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경험과 지식은 생각을 바꾸는 수단이어야 하는데결국엔 최종적으로 잘난 자신에 대한 만족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경험과 지식이 또 다른 우월감의 불쏘시개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것이 두려움과 싸우는 과정이었다면 그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행복이 되기에 자부심의 원료로 쓰인다.

 

소방수가 타오르고 있는 불을 자신의 불 끄는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순간 그는 불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된다그리고 마치 자신이 두려움을 갖지 않은 존재인 냥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언젠가는 재앙을 불러온다. 불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한 소방수만이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 즉 어떤 자부심을 가지고 우월감을 가진 채 사는 삶이 더 좋기 때문에 끝없이 그쪽 방향을 향한다. 그래서 다들 행복하기 위해서 여행을 가고, 행복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행복하기 위해서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그것들이 행복한 것은 맞다. 하지만 처음부터 행복이란 말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 행복은 따로 어떤 것이 아니다행복은 어둠과 같다. 빛이 없는 상태가 어둠이듯이,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바로 행복이다.

 

두려움이 없어지고 있는 중간에는 기쁨, 즐거움 등의 밝은 감정이 생겨나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난 후에는 평온함, 안정감과 같은 긍정적 감정 상태에 놓인다.

 

행복을 행복의 관점에서 보느냐 두려움의 관점에서 보느냐는 결국 같은 것이지만 이후 생각과 행동에는 아주 큰 차이점을 만들어 낸다.

 

일반적으로 행복해서 하는 일들은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어진다. 하고 싶은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선택 가능하다는 말은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단 마음의 부담이 적어지는 것이고, 하다가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 있으며, 스스로 자유 의지로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같은 일이라도 스스로 선택해서 할 때와 누군가의 지시로 할 때 기분이 다르고, 느끼는 행복도 다르게 된다. 특히나 부담이나 책임감을 덜 느끼는 것이 아주 큰 차이로 작용한다.

 

하지만 결국 그 차이가 계속 하느냐,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냐를 결정하게 된다.

 

두려움과 싸우는 일은 대부분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행복과는 달리 선택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할 때 두려움의 관점보다는 행복의 관점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행복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낫기도 하다. 하지만 계속 하기엔 곤란한 문제들이 생기는 상황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쁜 것을 해결해야 할 때이다. 열등감을 극복하는 일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때 그것을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언제든 포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두려움의 관점에서 보면 절대로 중간에 포기할 수 없다.

 

그러니 행복의 관점에서 두려움의 관점으로 바뀌는 순간 모든 것이 필수적으로 변한다. 반드시 여행을 가야만 하고, 책도 읽어야만 한다. 경험과 지식을 쌓는 일이 선택이 될 수 없다. 죽을 힘을 다해서 해야 한다. 적어도 열등감을 극복하고 싶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쉬운 방법을 찾고 싶어한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만능 해결책을 찾는다. 그때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들이 바로 시중의 흔한 책들이다. '나를 사랑하라', '나를 소중히 여겨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라' 등을 적어 놓은 책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조언들은 결국 또 다시 우월감을 높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꾸 접하게 되면 잠시 동안은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결국 더욱 더 깊은 열등감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공부를 잘하려면 열심히 공부하는 수 밖에 없다. 공부에 왕도가 없다는 말은 그냥 있는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의 변화는 생각지도 못한 긍정적 역할을 한다. 그것은 바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돈 낭비,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가 될지도 모르기에 자꾸 망설이게 되는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원래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좀 망설이게 된다. 그렇게 돈을 써야 할지, 그렇게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걱정되니까 그렇다.

 

하지만 행복이 아닌 두려움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는 사라진다. 반드시 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무조건 하면 된다. 더해서 그렇게 몇 차례 하다가 보면 서서히 자신감도 붙고 훨씬 더 편해진다. 시작이 어려울 뿐, 해보면 별 것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일단 행복한 일조차도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하든 자신이 가진 생각만 바꿀 수 있다면, 그것에 투자된 돈, 시간, 에너지는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니다하지만 슬프게도 여기엔 문제가 있다. , 시간, 에너지가 무한정 공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경험을 쌓고 지식의 습득하는 과정 없이 오직 생각 그 자체로만 열등감을 극복하는 법을 알아볼 것이다.

 

,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경험과 지식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많은 생각을 통해서 생각 자체를 바꾸는 방법이다. 이런 과정을 사유나 사색 등의 단어로 표현하기 하지만, 사실 별다른 차이는 없다. 그리고 이 방법은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며 영구적인 해결책이다.

 

물론 지금부터 설명하는 방법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은 거기에 이를 수 있느냐가 초점이 아니라, 그런 목적지가 있음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길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살아 생전에 비록 최종 목적지에 도착은 못하더라도 평생 거기를 향해 걸어갈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그 답을 찾아보자.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다 내 것인가?

 

물론 처음 들으면 웃기는 질문이다. 내 얼굴, 내 키, 내 몸매, 내 돈, 내 능력, 내 지식, 내 지능, 내 운동능력, 내 인간관계 등등내가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이 맞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가진 것은 다 내 것인가? 두 번째 반복해서 물으니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생각에 별다른 변화는 없다하지만 지금부터 그것이 아님을 설득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의 존재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는 사상이나 종교 이론이 존재하지만, 그냥 현재의 밝혀진 사실만은 근거로 판단해보자. 그 누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수십 억의 정자 중 한 마리가 난자와 우연히 만난 결과가 각각의 자신이다.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는 말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부모부터 물려받는 외모, 지능, 운동능력 등이 전혀 자신의 것이 아니란 점을 의미한다. 그냥 주어진 것일 뿐, 자신이 노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은 어떨까? 부모로부터 받는 돈은 온전히 자신이 것일까?

 

만약 그 돈을 가진 것이 본인이라면 그렇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남이라면 그저 부모 잘 만난 덕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 요즘 금, , , 흙수저론에 의하면 그것도 각자의 능력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어도 납득이 되질 않는다면, 이번엔 부모로부터 받게 된 나쁜 것들을 생각해보자. 단점들 말이다. 자신이 정말로 싫어하는 자신의 신체적 특징못 생긴 얼굴, 나쁜 머리, 심지어 부모의 유전자 문제로 물려받은 수 많은 질병들까지,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탓일까?

 

유전 질환으로 태어나자마자 죽는 신생아는 신생아 본인의 탓으로 죽은 것일까?

 


이미 고정되어서 바꿀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살겠지만, 단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런 것들에 대한 불만이 가득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자신이 갖기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질투가 생겨나고 열등감이 가득해지는 것이다.

 

결국엔 장점이 많은 사람들은 그럴수록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되고, 반대로 단점이 많은 사람들은 그럴수록 그것을 부모나 사회 탓으로 돌리게 된다. 그리고 장점은 감사함보다는 당연함을, 단점은 당연함보다는 불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장점이 많은 사람들이 밝고 원만한 성격이 되는 반면 단점이 많은 사람들이 화나 신경질을 잘 내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단점이 많아 남 탓을 많이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다. 피해의식이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에 아주 작은 손해에도 크게 반발하거나 화가 나기에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부모로부터 받은 것은 내 것일까? 아니면 부모의 탓일까?

 

하지만 결국 둘 모두 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내 것도 아니고 남의 탓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냥 우연히 생겨난 결과일 뿐이다. 지금의 부모가 내 부모인 이유는, 정서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실제로는 우연이란 뜻이다. 그러니 나 자신 역시도 우연의 산물이다.

 

부모만 그런 것이 아니다. 태어난 시기와 태어난 장소도 그렇다. 그래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조선시대에 태어났느냐 아니면 지금의 미국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광대가 되었거나 마이클 잭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결정할 수 없이 타고난 것들이 이후 내 삶의 거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도대체 사람들이 가진 것들 중에서 도대체 자신이 온전히 가진 것은 얼마나 될까?

 

열심히 공부를 해서 사시에 합격했더라도 그 머리는 이미 부모로부터 온 것이다. 머리가 나빴다면 사시 공부를 할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노력을 해서 무엇인가를 이뤘다고 해도 그 시작은 그저 운으로 얻어진 것들이 된다.

 

물론 자신이 가진 장점들에 대해서 이런 관점을 갖는 것은 무척 힘들다. 그것이 우월감의 근원이고 두려움과 상대해야 하는 힘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 순간부터 단점 역시도 자신의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 열등감도 시작되는 것이다.

 

아주 어렵지만 방금 설명한 내용까지를 어느 정도만 이해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도대체 왜 느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부랑자가 무서운 이유는 잃을 것이 없어서 그렇다. 부자가 담을 높게 세우는 이유는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잃을 것이 많아서 그렇다.

 

내 것이 많은 사람은 두려움이 커질 수 밖에 없다. 반대로 내 것이 없는 사람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내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내 것이 아니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자신의 생명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물론 처음부터 말도 안되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두려움으로부터 완벽히 벗어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미 설명했듯이 모든 두려움은 살고 싶다는 생존본능에서 나오니까 말이다.

 

이것이 최종 답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최종 목적임은 맞다. 그래서 이 설명에 앞서서 상상을 초월하는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는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이다. 내 삶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 논리가 아주 특별하거나 처음 듣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도 각 개인의 삶은 신이 준 것이라고 이미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한다. 그저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불교도 비슷하다. 아니 훨씬 더 직접적이다. 나를 버리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니까 말이다.

 

종교에 상관없이 결국 이 말은 진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 정말로 냉정히 객관적으로 말하면 일단 내가 받은 것은 내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기존의 생각에 내가 타고난 것들, 그 타고난 것들을 이용해서 가질 수 있었던 것들,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최초의 변화만 있다면 희망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을 완벽히 도달한 단계를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표현한다. , 불교에서는 나를 버릴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이천 년이 넘은 종교들에서 이미 그 방법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그 설명들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변화는 단지 열등감을 해결하는 수준이 아니다. 사실상 근원적 변화이다그것은 모든 종류의 나쁜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고뇌에 가득 찬 사람들이 그 고뇌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식의 해결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물론 완벽한 해결책을 찾는 것도 좋지만, 적당한 선에서 타협도 괜찮아 보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개인적으로는 두려움은 가지고 살되,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사는 삶이 가장 좋아 보인다.

 

어떻게 해야 적당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시작점은 바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나를 나 자신으로 보지 말고 제 삼자를 보듯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과정은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내 것으로만 여겼던 과거의 패턴을 끊을 수 있는 최초의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나를 제 삼자의 시선을 볼 수 있게 되면 비로소 그때 처음으로 나도 한 명의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남들처럼 똑같이 두려워하고, 남들처럼 똑같이 욕심 내고, 남들처럼 똑같이 비겁한 자신이 보인다.

 

감정이라는 짙은 안개 속에 평생 휩싸여서 잘 보이지 않던 나의 실체가 드러난다. 핑계를 대고, 합리화를 하고, 남을 비난하고, 남 탓을 하고, 도망치고 난 후 변명하고, 잘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고 못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모두 그런 것들을 목적으로 채워진다. 내 감정을 설명하고, 상처받은 자신을 위로하고 상처를 준 상대를 비난한다. 자리에 없는 사람을 뒷담화하고, 자리에 없으면 뒷담화를 당한다.

 

이것들이 누구나 매일 하는 일이다. 남을 낮춤으로써 나를 높인다. 남을 비난함으로써 나를 변호한다.

 

그러니 남에게는 내가 낮춰지는 대상이 되고, 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첫 번째 통과할 관문이다.

 

나를 제 삼자의 입장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남들을 바라볼 때는 더욱 더 그것이 수월해진다. 나도 보는데 남을 보는 것을 쉬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을 눈 앞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만 보지 않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감정 너머에 있는 숨겨진 그 사람의 진짜 본질을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두렵듯이 그 사람도 두렵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욕을 하든, 나를 비난하든, 나를 협박하든, 나에게 폭력을 쓰든 모두 마찬가지 이유이다. 두려워서 그러고 있다. 내가 그렇듯이 그 사람들도 그러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말과 행동을 견디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참으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해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이 상처를 주든, 같이 치고 받고 싸우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그들의 그런 것을, 내 자신의 그런 것을 이해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우월감을 느꼈던 못난 사람들도, 내가 열등감을 느꼈던 잘난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다들 불쌍하다. 나도 불쌍하다. 다들 겁쟁이이다. 나도 겁쟁이이다. 다들 어리석다. 나도 어리석다. 모두가 두려워서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럼에도 살고 있다. 매일 그렇게 두려워하면서도 열심히 살아간다. 책임을 다하고, 해야 할 일들을 해내려고 한다.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은 최선을 다해서 뛴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쫓는다. 도망치는 사슴이 두려움으로 인해서 심장이 쉴 새 없이 뛰는 것은 사슴이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 두려우면 당연히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리고 그래야 살 수 있기도 하다. 잘 도망친 사슴으로 인해서 실패한 사자가 자신을 자책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의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보다 상대의 두려움이 더욱 컸을 뿐이다.

 


우리들 모두도 그렇다. 엄마의 젖을 빠는 신생아도, 이제 살 날이 많이 남지 않는 어느 노인의 힘없는 손놀림도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 때 변화가 생겨난다두려움 때문에 나를 잘나고 싶은 존재로만 여기고 싶은 생각을 거둬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연민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런 약한 존재로써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사는 모습에 경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사실 나는 대단한 존재이다. 그 수많은 죽음의 순간들을 견뎌내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는 약하게 태어났지만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잘나서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약하기에 오히려 대단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나에 대한 깊은 받아들임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세상은 싸우고 경쟁하고 비난하고 경계하고 회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감싸주고 다독여야 할 곳이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사랑과 자비를 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거기에 삶에 관한 진정한 답이 있다. 그것을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본질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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