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열등감 극복하기 - 1

아이루다 2018. 7. 4. 09:39

 

소극적인 사람과 적극적인 사람, 수동적인 사람과 능동적인 사람존재감이 없는 사람과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사람, 별 다른 특징이 없는 사람과 무척 매력적인 사람여기에 각각 속한 사람들은 서로 정반대의 특징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눈에 띄고, 매력적인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잘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그렇지 못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존재감이 없고, 별 다른 특징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사람에 따라서 겉으로는 그렇게 표현할 지도 모르겠다. 좌절감으로 인해서 자기비하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좌절감은 분노를 일으키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잘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과 못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 이 종류의 사람들의 내면은 정말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표면을 뚫고 내려가서 그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면 과연 거기엔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거기엔 그 어떠한 차이점도 없다. 그리고 누구나 공통적으로 한가지 생각이 깊고 깊게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잘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다.

 

겸손하거나 나서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틈만 나면 잘난 척 하거나 매일 자기혐오나 자기비하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잘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자기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그저 자신의 깊은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뿐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나야 더 오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잘났다는 생각은 생존에 관련된 문제이다. 잘난 존재일수록 당연히 더 행복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채 살아가기 때문에, 그 두려움과 싸울 가장 근본적인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남들보다 못난 존재라면 그것은 언제든 바로 도태되거나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니 잘난 존재가 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사람들이 평소에 그토록 잘나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런 욕구들은 그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나 남들보다 더 나은 존재임을 증명 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것들의 가장 깊은 내면의 욕구는 바로 생존 본능인 것이다.

 

사실 잘남에 대한 대상은 아주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어느 한 구석은 잘났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런 것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만, 더 많을수록 더 두려움을 줄일 수 있기에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모든 분야에서 잘나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진 것이 문제일 뿐이다.

 

머리가 좋다, 운동신경이 좋다. 게임을 잘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농담을 잘한다,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 공감능력이 좋다, 키가 크다, 몸매가 좋다, 상황 파악이 빠르다, 길눈이 좋다, 뭐든 잘 고친다, 손재주가 좋다, 성실하다, 책임감이 있다, 돈이 될만한 것을 잘 찾아낸다, 잠을 잘 잔다, 운전을 잘한다.

 

건강하다, 요리를 잘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다, 잘 웃는다, 책을 많이 읽는다, 책을 빨리 읽는다, 여행을 많이 한다, 취미생활을 열심히 한다, 월급이 많다, 성공한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다,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아이를 낳았다,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얼굴이 예쁘다, 성격이 좋다, 등등이 모두 그런 것들에 해당된다.

 

잘남의 대상은 이것들 말고도 한참이 더 많을 것이다. 아무튼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하기는 힘들고, 결국 각자 자신만의 뭔가가 있을 것은 분명하다. 이런 것들을 다른 말로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엔 한가지 본질적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좋다, 잘한다 등의 판단에는 반드시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 뭔가가 자신의 잘남의 되려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상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잘났다는 말 자체가 비교에서 출발하니 어쩔 수 없다.

 

머리가 좋다면 머리가 나쁜 사람이 필요하고, 성격이 좋다면 성격이 나쁜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를 잘 키웠다면 아이를 잘 못 키운 다른 부모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같은 맥락으로, 무엇인가를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그 평가를 객관적으로 해줄 수 있는 제 삼자도 필요하다. , 자신이 잘난 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결국 이런 문제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매일 경쟁을 통해 '인정'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인정은 인간의 본능적 수준의 욕구가 되고 만다. 스스로 왜 그것을 원하는지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본능적으로 그것을 원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사람들은 정반대가 되는 욕구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으로 똑바로 가길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보면 흔히 자존감이 높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서 자신의 잘남을 증명 받고 싶은 욕구,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 바로 그 두 가지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는 그저 잘남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반대 급부일 뿐이다. , 잘남을 인정받고 싶은데 자꾸 그렇지 못해서 상처를 받다가 보니 스스로 증명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주체적 삶에 대한 욕구는 일반적으로 대안이거나 회피일 뿐이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충분히 인정을 받아서 더 이상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는, 아주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이나,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잘나고 싶다는 욕구에 대해서 완벽히 이해를 하고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대부분의 자기 주도적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저 승부에서 자꾸 지기 때문에 승부 자체를 피하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 사람들은 남들에게 모두 맞추면서도 그들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이 정도로 잘나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적이다. 그것이 채워질 때 오히려 본능적 행복을 뛰어넘는 수준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 잘나고 싶다는 욕구는 정말로 수 많은 상황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정말로 하찮은 것에서도 그렇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에서도 그렇고, 뜨거운 것을 빨리 먹는 것에서도 그렇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하찮은 것을 잘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만약 어떤 장소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위바위보를 잘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보이고 자신처럼 못하는 사람을 불쌍한 눈초리로 쳐다보게 되면 생각이 또 달라진다.

 

두 눈을 가진 채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빼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일까?

 

답은 단순하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은 하지만, 거기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보다 더 잘난 사람들을 봐왔기 때문에 그렇다. 더군다나 꼭 직접적으로 보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서 축구를 아주 잘하는 아이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잘남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물론 아직 어리기에 희망이 있으니 좌절하지는 않겠지만, 나이를 먹어도 실력이 원하는 만큼 늘지 않게 되면 국내에서 최고의 선수 취급을 받더라도 결국 그 내면엔 자기 확신이 약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확신이 약하면 약할수록 인정에 대한 욕구가 더욱 더 강해지게 된다. 그나마 어려서부터 어느 정도 주변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강한 확신이 있어서 인정에 대한 욕구가 덜하긴 하다. 하지만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확신이 강하든 약하든 상관없이 두 사람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사실상 없다. 그것은 그저 강약의 문제일 뿐이다.

 

사람들은 최대한 오래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기에 살지 못할 가능성들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난다. 질병, 사고, 큰 불행재난 등등 그 대상은 다양하다. 이렇게 생겨난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는 남들과 다른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진다.

 

남들과 비슷하거나 남들보다 못하면 당연히 평균 나이도 살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 두려움과 싸우기 위해서 자신의 잘난 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 대상과 종류가 다양할 뿐, 누구나 그렇다.

 

하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주관적이다. 그러니 그것을 객관화 시켜 줄 수 있는 절차가 필요하다결국 자신보다 못난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들과 자신을 비교해서 잘났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필요해진다.

 

사람들이 인정받는 행복 못지않게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상대적 행복을 얻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타인의 불운은 아무런 이유가 없이 자신의 행복이 되고, 타인의 행운은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의 불행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인정이든 상대적 행복이든 모두가 잘난 것을 두고 벌인 비교의 결과인 셈이다. 심지어 행운과 불운처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조차도 비교하고 상대적인 불행과 행운을 경험한다.

 

기본적으로 장점을 많이 타고난 사람은 인정을 받는 것이 수월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좀처럼 확신을 갖기 힘들기 때문에 삶이 많이 힘들어진다. 특히 타고난 능력이 부족해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 사람들은 틈 만나면 인정을 받으려 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계속 흔들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삶의 태도가 결국엔 정작 본인은 행복하지 못한 삶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가 끼어든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잘났음을 인정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남보다 못난 것만 더욱 더 잘 알게 되었을 때이다. 일등을 목적으로 나간 대회에서 꼴등을 한 경우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지만 더 머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더 예쁜 사람을 만나고, 농구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더 잘하는 사람을 만나고, 돈이 많다고 생각했으나 돈이 더 많은 사람을 만날 때 그렇다.

 

그러면 사람들은 잘남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기에 기분이 나빠진다. 자신의 잘남을 인정받을 때는 두려움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는데, 반대 상황에 놓이게 되면 오히려 두려움이 더 커져 버리고 만 것이다. 원래 두려움이 커진 것을 기분이 나쁘다고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각자만의 깊은 내면에서 두려움과 싸우기 위해서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으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을 '우월감' 이라고 부르고,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는 분야에서 더 잘난 사람을 만나 인정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그 잘남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 때 느끼는 불안한 감정을 '열등감' 이라고 부른다.

 


두려움의 크기가 클수록 그것에 버틸 수 있는 더욱 큰 우월감이 필요하고, 그럴수록 더 많은 주변의 인정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을 때 열등감이 폭발적으로 늘어가게 된다.

 

그런데 우월감은 뭐 그렇다고 쳐도,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순간 매우 기분이 나쁘다고 느낀다그러니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자신의 열등감을 없애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미 설명했듯이 열등감은 혼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열등감은 오직 우월감에서 시작된, 그야말로 완벽히 종속된 감정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사라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서 우월감을 없앨 수 있다면 열등감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최초에 내면의 두려움과 싸우기 위해서 자신이 잘났다는 우월감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선택하는 열등감을 상대하는 법은 비슷하다자신의 우월감을 최대한 확신 있게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의 인정받는 방법이다.

 

그래서 운이 좋다면 좀처럼 경쟁자를 찾아보긴 힘든 분야에서 우월감을 가진 채,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별다른 열등감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뭔가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설령 아주 탁월하지는 않아도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상위권에만 들어도 어느 정도는 인정을 받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엔 이상한 문제 하나가 끼어든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은 중간을 결코 잘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 사람들 대부분은 100명 중 중간에 해당되는 50등은 잘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불행의 고통이 행복의 기쁨보다 훨씬 더 크게 작용해서 그렇다. 사람들이 주식 투자를 해서 원금에서 10%의 손해를 보는 것과 10%의 이득을 보는 상황에서 느끼는 불행과 행복의 강도가 절대로 동일하지 않다. 대부분은 불행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결국 상위 20% 정도 안에는 들어야 인정받는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니 이 세상엔 적당히 자신에게 만족하고 사는 사람이 20%, 그리고 80% 정도의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상위 20% 안에서도 끼리끼리 모이면 끝없이 20%가 계속 다시 만들어지기 때문에 결국엔 최상위 1% 정도나 열등감이 별로 없이 사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운 없이 태어나 상위 20% 안에 들지 못했으니 평생을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 시작이 두려움이며 우월감이니 그냥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냥 견뎌내야 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다음 글에서 그것에 대해서 알아보자.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등감 극복하기 - 3  (0) 2018.07.06
열등감 극복하기 - 2  (0) 2018.07.05
삶에 관한 모든 것  (0) 2018.06.30
불행을 대하는 방식  (0) 2018.06.05
자존심과 자존감  (0) 2018.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