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열등감 극복하기 - 2

아이루다 2018. 7. 5. 08:42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대응할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나는 잘났다' 라는 우월감이다.

 

그리고 이 우월감은 이후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눠진다첫째는 나름대로 잘난 부분이 많아서 별다른 열등감 없이 살아가는 경우이고둘째는 잘난 부분과 못난 부분이 어느 정도 비슷하게 섞여 있는데, 해석을 부정적으로 해서 못난 부분에 집착해 강한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이다.

 

셋째는 두 번째와 같은 경우이지만 못난 부분에 집착하기 보다는 잘난 부분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서 가진 것에 어느 정도 만족한 채 별다른 열등감이 없는 경우이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는 잘난 부분보다 못난 부분이 훨씬 더 많아서 아예 스스로 포기를 해서 오히려 우월감도 희미해지고 결국 열등감까지도 희미해진 경우이다.

 

그래서 결국 열등감에 관해서는 두 번째의 경우가 가장 심각하다하지만 네 번째 경우는 열등감이 문제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문제가 되고 만다시체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려움과 싸울 우월감조차 약해진 상태라서 평소에 언제나 두려움 속에서 억눌린 삶을 의미한다.

그러니 지금 현재 자신에게 딱히 열등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내면의 두려움에 너무 억눌려서 삶 자체가 망가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착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열등감을 느껴진다는 것은 오히려 좋은 신호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변화의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열등감을 제대로 다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난 글에서 열등감을 극복하려면 결국 우월감을 없애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두려움 앞에 제대로 설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다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아니, 사실 가능성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럼에도 지금부터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그것을 시도해볼 것이다. 그리고 희망적인 소식도 있다. 분명히 방법은 있으니까 말이다. 단지 그 과정이 그리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한 시작점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과연 두려움이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어찌되었건 간에 지피지기인 것이다. 두려움을 알아야 두려움과 대적해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두려움을 사전적 의미로 정의하면, 앞으로 닥칠 일을 걱정하고 꺼리거나 염려스러운 상태 정도를 뜻한다의미는 단순하다. 그런데 이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 당연히 걱정과 염려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라는 단어이다. , 두려움은 언제나 미래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지나간 과거는 후회의 대상일망정 두려움의 대상은 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미래의 특징은 무엇일까? 바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은 바로 이렇게 정의가 될 수 있다. 두려움의 본질은 바로 미 확정이다.

 

두려움은 나쁜 감정이다. , 기본적으로 감정이다그런데 감정은 기본적으로 즉시성을 가지고 있다. , 감정은 언제나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 감정은 어느 한 순간에 느끼는 것이지 감정을 느끼는 것을 미리 땅겨오거나 나중으로 미룰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 어떤 면에서 보면 미리 땅겨온 감정인 셈이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치기에 감정을 땅겨오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두려움의 감정이 생각을 통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 두려움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생각을 통해서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없다면 두려움도 사라지게 된다.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은 자신의 똥을 가지고 놀 수 있다. 하지만 네 살이 되면 똥이 더럽다고 느끼면서 두려워한다. 열 살짜리 아이는 장전된 총을 가지고도 놀 수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어른이 보면 두려움으로 인해서 기겁을 하게 된다.

 

두 살짜리는 똥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열 살짜리는 총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장전된 총의 위험함을 느끼지 못한다. 사실 그들에게는 똥이나 장전된 총이란 인식조차 없는 것이다.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느끼는 많은 감정들이 비슷한 원리로 생성된다. 오감을 통해서 당장 경험되는 감정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다 그렇다.

 

피부의 상쾌함, 맛난 음식, 좋은 음악, 예쁜 것을 보는 것, 좋은 냄새를 맡을 때는 즉시적으로 좋은 감정이 생겨난다. 하지만 기대, 인정, 두려움, 우월감, 열등감, 실망, 만족감 등은 대부분 생각을 통해서 생성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있어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생성되는 감정들보다 오히려 생각을 통해서 생성되는 감정들이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불편한 자리에서 맛난 음식을 먹어봐야 채 할 뿐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더라도 아주 비싸고 몸에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 좋게 먹을 수 있다.

 

누군가 자신에게 떡을 줬을 때, 미각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은 동일할지도 모르지만, 그 떡을 준 이유를 알아야 최종 감정이 결정된다. 누군가 자신이 먹기 싫어서 줬다면 약간 실망의 감정이, 자신을 배려해서 줬다면 따뜻한 감정이, 불쌍해 보여서 줬다면 무시를 당했다는 감정이떡이 약간 쉰 것 같아서 준 것이라면 분노가 치밀 것이다.

 

떡을 받은 것과 그것을 먹은 맛은 동일한데,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줬느냐에 따라서 최종 감정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감정은 그냥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고 산다. 사실 그렇긴 하다. 그냥 생겨나긴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생성과정을 잘 뜯어보면 생각보다 많은 감정들이 생각을 통해서 생성되고 있다. 그리고 두려움도 그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만약 생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감정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것에 대한 유명한 경구가 바로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 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마음먹기이다. , 사람들은 마음먹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제는 생각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 생각에 대해서 이해를 하다 보면 어쩌면 해결책을 찾을 수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대책 없는 감정보다는 생각이 좀 더 다루기는 쉬울 것 같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결국 문제가 있다. 그것은 생각보다 생각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상 생각은 오히려 감정처럼 제 멋대로 생겨난다. 그 증거들을 보자.

 

첫 번째 증거는 그 누구도 생각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 생각은 끝없이 머리 속에 떠돌아다닌다. 키우던 강아지 생각부터, 10년 전 헤어진 첫 사랑에 대한 생각까지 정말로 뜬금없고 연관도 없는 생각들이 외부 자극에 의해서 끝없이 부유하고 있다. 생각은 잠을 잘 때도 꿈을 통해서 계속 이어진다.

 

 번째 증거는 아무리 어떤 특정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일년 전에 당했던 아주 기분 나빴던 일이 일단 머리 속에 떠오르면 좀처럼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그나마 할 수 있는 방법은 집중 가능한 것을 찾아서 그 생각에 대한 흐름을 끊거나 술을 먹어서 머리가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들 밖에 없다하지만 절대로 능동적으로 끊을 수는 없다.

 

세 번째 증거는 어떤 생각을 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생각은 갑자기 훅하고 들어온다. 길을 걷다가 본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10년 전 헤어진 연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고, 그 기억은 곧 이어서 같이 마셨던 커피로 이어지며, 결국 그 커피에 대한 생각은 갑자기 빵집에 들러 초코머핀을 사게 만들 수 있다. 이 과정 중에서 당사자가 결정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생각이 생각으로 이어진 것뿐이다.

 

그렇다면 생각에서도 결국 답을 찾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다행스럽게 그것은 아니다.

 

앞에서 떡을 받은 예를 들었을 때, 최종 감정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무슨 의도로 떡을 줬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었다. , 이때 상대가 무슨 의도로 준 것인지 딱히 말해주지 않는다면 - 대부분은 말해주지 않는다 - 이때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유추해 낼 수 있을까?

 

이것은 일종의 추리이다. 그리고 추리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얼굴 표정, 말투, 태도, 상대의 평소 성격 등이 모두 정보가 된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경험도 필요하다. 과거에 비슷한 사례를 겪은 적이 있다면 좀 더 정확하게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낼 것이다.

 

이런 흐름을 이해한다면 생각이란 과정엔 반드시 경험과 지식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똥을 가지고 놀거나, 장전된 총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경험과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 지식이 충분하더라도 총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면 그럴 것이고, 경험이 충분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럴 수 있다.

 

여기까지 정리해보면, 두려움은 생각을 통해 생성되는 감정이고, 생각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종 적으로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두려움을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을 통해서 희망이 보인다. 분명히 경험과 지식은 능동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말이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선택 가능한 행위이다.

 

두려움은 없앨 수 있지만, 더 많은 지식을 쌓고 더 경험을 함으로써 두려움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두려움에 대응하기 위해서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과는 전혀 다른, 실체적인 대응책이다.

 

번개가 왜 치는지 모르는 시절에 번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우스의 무기라고 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번개가 왜 치는지 아는 현대인들은 번개가 위험하다는 것은 알아도 번개 자체에 큰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힘이다수영을 열심히 오랫동안 배운 사람은 물을 훨씬 덜 무서워한다. 이것이 바로 경험의 힘이다. 이렇게 지식과 경험은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왜 외국을 여행 다녀야 하고, 가능하면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하는지 이해가 간다. 또한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문학 작품들과 영화를 봐야 하며, 지나간 이들이 남긴 생각이나 말을 주의깊게 바라봐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말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경험과 지식이 잘못 쓰일 경우 또 다른 잘남의 증거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더해서 경험과 지식이 편협적으로 쌓이게 되면 오히려 생각 자체를 고정시켜서 없던 문제까지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지식과 경험을 쌓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잘 나려는 목적도 아니고, 그것이 자신 확신을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 그런 목적으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그저 두려움에서 도망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두려움을 대응하기 위해서 또 다른 우월감을 만들어내거나 혹은 끝없이 자기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식과 경험이 가지는 최악의 단점인 편향성과 고정성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열등감을 없애려다가 더 큰 혹을 만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식으로 자기 열등감을 해결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다. 무엇인가에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두려움에 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두려움과 대적이 아니라 두려움을 거기에 맡겨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를 믿어서 자신의 삶이 좀 나아졌다면 설령 그것이 착각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편법적인 결론을 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것이라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경험에 관해서는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크라테스가 한 말씀처럼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려움 때문에 어딘가에 고정되는 순간 그것들은 독으로 작용한다. 파도가 치는 바다가 두려워서 부두에 메여 있는 배는 당장은 안전하겠지만 결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여전히 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일단 여기까지 이해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지에 대한 기본적인 방법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 그것은 바로 사람들은 두려움의 원인인 고통보다 오히려 두려움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원래 두려움은 고통에 대한 생각, 즉 고통에 대한 염려로부터 생겨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실체적인 고통보다 자신이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을 더욱 더 두려워한다.

 

,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두려움이 실제로 현실화 되었을 때 자신이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실체화 되지도 않는 두려움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사람을 치었을 때 어떤 두려움을 경험하게 될까? 과연 그 두려움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생겨난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자신이 그런 두려움을 버텨낼 수 있을까 두렵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생각하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에 대한 끝없는 외면이다.

 

원래 두려움 자체는 큰 문제지만, 두려움은 그것에 대응해서 싸울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 두렵기에 공부하고, 두렵기에 힘든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두려움을 외면해버리고 나면 그것과 싸울 어떤 에너지도 생겨나지 않는다.

 

경험을 쌓고 지식을 얻는 과정을 진행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것을 하기 위한 어떤 의지력도 절박함도 생겨나질 않으니 결국엔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된다.

 

아니, 하긴 한다. 외면해야 하기에 두려움 그 자체를 없는 듯 군다. 그리고는 간혹 두려움이 느껴지면 '나는 남들과 달라서 암 따위가 걸리지 않아' , '나는 타고난 운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거야' 라고 주문을 외운다. 그리고 그 생각이 결국 근거 없는 우월감으로 연결이 되고 만다.

 

이것은 참 황당한 흐름이지만 그럼에도 이해가 간다. 두려움을 두려워하게 되면 또 다른 두려움이 생겨나고, 그것은 결국 두려움이 계속 증폭되는 현상으로 이어지니까 말이다.

 

사실 이런 경험을 다들 한번씩은 한다.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점점 더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잠을 잘 못 자고 잘 먹지도 못한다. 그러면 더욱 더 두려워지고 만다. 그리고 나중엔 그 두려움에 눌려서 뭔가 해볼 생각조차 나질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러니 가끔은 두려움이 없는 듯 생각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가끔만 이용해야 한다. 언젠가는 두려움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당장은 두려움 자체를 없는 듯 취급하면 마음이라도 편하기에 그 방법을 선호하게 된다.

 

이것을 위해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방법은 바로 두려움을 상기시킬만한 곳에 가질 않는 것이다. 죽음이 두려우니 피를 보지 않으려고 하거나 시체 옆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좀 웃기는 해결책이긴 한데, 놀랍게도 이 방법은 꽤나 효과가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사는 동안 죽음이라는 것이 자신과는 너무도 먼 어떤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다가 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게 되면 크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기도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두려움을 생각할 시간을 없애는 방법이다. 그것을 위해서 뭔가 끝없이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영화, , 여행, 놀이 공원, 친구들과 수다, 게임, 취미 생활 등등 너무도 많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평생 도망칠 수는 없다. 몸이 늙어가고,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일 수록 두려움은 점점 더 실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언젠가는 두려움 앞에 강제로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두려움 앞에 서면 사실 답이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두려움 앞에 서보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를 정리하면,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월감을 없애야 하고, 우월감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두려움 앞에 제대로 설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두려움 앞에 제대로 서려면, 두려움을 두려워해서 외면하지 않아야 하며 두려움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쌓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정리가 된다.

 

일단 이 정도만 되어도 별다른 열등감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완벽한 답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싸울 수는 있지만 결국 두려움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과 지식을 쌓는다는 것도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일단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럴만한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이 그리 여의치 않다.

 

그러니 좀 더 근원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행이 그 방법이 있다. 이제 다음 글에서 그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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