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두려움이 만든 단단함

아이루다 2018. 4. 28. 08:36

 

삶이란 무엇일까?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다그럼에도 아주 많은 종류의 정답의 후보들이 나온 질문이기도 하다. 그 많은 답들 중에 개인적으로 옳다고 믿는 답을 하나 더해 보겠다.

 

『삶이란 평생 동안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 싸우는 과정이다』

 

당연하지만 이 답이 옳다는 보장은 없다하지만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삶에 관한 많은 해석을 해왔다. 삶의 의미, 가치, 지향점, 목적, 의도,계획 등등, 삶에 관한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있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삶은 자연계의 삶과는 구분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인간은 인간만의 고유한 어떤 것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살기 위해서 산다. 다른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말이다. 사실 인간의 삶이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진화의 산물임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물론 지금도 진화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꽤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는 뭔가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사후의 일이다. 살아가는 동안은 그저 살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생각해보면 된다. 머리 속에 가득한 걱정, 해야 할 일들, 뭔가 불안한 것들 등등, 그 모든 것이 바로 두려움의 다른 형태들이며, 두려움이 생기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죽을 수 있기에 그렇다.

 

, 인간은 다른 모든 종류의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죽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살기 위해서 매일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면 안도감과 평화로움을 느끼고 행복해진다. 반대로 나쁜 일들이 일어나서 죽음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불안해지고 두려움을 느끼며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이것이 삶의 본질이다. 물론 죽음 이후의 삶은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삶 자체는 이렇다.

 

그런데 이렇게만 정의하면 뭔가 부족해 보인다. 왜냐하면 언제나 두려움을 멀리 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오히려 두려운 쪽으로 다가가기도 한다그래서 삶의 정의가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움은 그저 착각일 뿐이다.

 

살다 보면 불행한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마치 못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 같고, 행복보다는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혼란스러움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행복이 아닌 불행을 선택할 때가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불행과 불행 중에서 더 덜한 불행을 선택을 한 것일 뿐, 결코 행복과 불행 중에서 불행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엄마가 아플 때 아이는 놀러 가고 싶은 마음과 집에서 엄마를 간호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놀러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는 엄마 병간호를 한다. 이때 마치 아이가 불행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아이는 나가서 놀 때 감당해야 할 불편한 마음과 엄마를 간호해야 하는 번거로움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결코 놀러 나가는 행복과 엄마의 간호를 하는 행복과 불행 중에 선택한 것이 아니다그러니 눈에 보이기엔 행복과 불행 사이의 선택 같지만, 결국엔 불행과 불행 사이의 선택인 셈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사람의 경우는 훨씬 더 명확하다. 다리를 절단하는 것은 엄청나게 불행한 사건 중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더 큰 불행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르는 선택을 한다.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잃는 감당할 수 없는 불행 대신 스스로 죽는 불행을 선택한 것이지 결코 행복과 불행 중에서 불행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이해를 떨치고 진실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이며 그 안에 숨겨진 두려움에 대한 이해이다.

 

삶은 죽음으로부터 정의가 된다. 죽음은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두려움이 모든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두려움이 크거나 커지고 있을 때 불행에 관련된 감정들을 느끼고 두려움이 작거나 줄어들고 있을 때 행복에 관련된 감정들을 느낀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불행이나 행복은 그저 두려움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 결과론적 판단인 것이다.

 

사람은 평생 행복하기 살길 원하면서 살아간다. , 최대한 두려움을 줄이길 바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결국 삶은 평생 동안 두려움과 싸우는 과정이라는 설명이 맞을 수 밖에 없다.

 

죽음은 언제든 닥쳐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멀쩡한 얼굴로 출근한 아빠가 저녁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서 병원의 영안실에 누워 있을 수 있다.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간 아이가 아침에 숨을 쉬지 않을 수도 있따. 인간은 도대체 죽음은 언제 어디에서 찾아오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사람은 평생 동안 두려움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매 순간 두려움을 느끼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최대한 느끼지 않고 싶어하기에, 즉 행복하고 싶어하기에 두려움을 처리하는 다양한 방법을 익혀왔다.

 

두려움을 최소화 시키는 방법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바로 어떤 식으로든 미래를 대비해 놓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당장 오늘 먹을 것만 구했다고 먹거리 구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다. 사실 하지 못해서 그렇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것을 준비해 두고 싶어한다. 몇 살에 죽을 지 모르니,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준비한다.

 

보험을 드는 것이나, 가능하면 안전한 차를 타려고 하는 것이나, 안전하고 좋은 집을 사는 것이나치안이 잘 되어 있는 동네에 살려고 하는 것 등등, 이런 안전을 위한 행위들이 바로 두려움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다.

 

실제적으로 효과도 좋다. 건강 검진을 받고,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며, 새로운 지식을 쌓으려고 노력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등의 노력들은 분명히 더 오래 사는 목적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행복해지기도 쉽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멋진 발명품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돕고, 주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고, 불우한 이들을 위해서 기부를 하고, 뛰어난 예술 작품을 만들고, 멋진 연주를 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는 신체적 활동을 하고, 여행을 다니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모두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줄이는 목적을 품고 있다. 단지 그 형태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것은 가장 흔하면서도 중요한 두려움의 해결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대비를 한 것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고액의 보험에 들었다가 자신의 보험금을 노리는 아내나 남편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해서 몸을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지식을 쌓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잘못된 지식을 얻어서 손해를 볼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투자했다가 다 날려 먹을 수도 있다.

 

평생 매진한 연구가 실패할 수도 있고, 남을 돕기 위해서 어떤 단체에 주기적으로 돈을 기부했는데 해당 단체가 그 돈을 다 횡령했을 수도 있다. , 의도와 다른 결과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사실 머리가 좋다는 말이 가진 진짜 의미가 그것이다. 암기를 잘하는 것이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미래를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느냐가 바로 머리가 좋은 것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미래를 예측할까?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제대로 이해할 때 자신이 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예측 방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혹은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예측 대상의 패턴을 이해하는 일이다. ,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불확실한 미래가 가진 불안함을 줄이는 가장 큰 무기가 된다. , 패턴을 앎으로써 두려움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어제까지 매일 해가 떴기 때문에 내일 해가 뜨는 것을 예측 할 수 있다. 수십 년을 살았기 때문에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어제 출근한 회사를 오늘도 출근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퇴근할 수 있다. 방금 눈 앞에서 놓친 지하철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다.

 

사실 인간에게 패턴화 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인간은 모든 대상을 패턴화 시켜서 이해한다.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가 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사람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농담을 했을 때 사람들이 웃었다면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똑같은 농담을 했을 때 그들도 웃을 가능성이 높다. 어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한 사람은 오늘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할 가능성이 높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언제나 약속을 잘 지킨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의 원리가 바로 패턴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매일 보여주는 비슷한 유형의 반응의 패턴을 성격이라고 칭한다 , 성격이란 두려움에 맞서 싸우는 각자만의 고유한 패턴인 셈이다.

 

더해서 두려움과 싸울 때 각자마다 선호하는 무기가 다르다. 그 무기는 보통 타고난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편인데, 일반적으로 권력, 명예, , 관계, 매력, 강한 근력 등이 많이 선호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마다 자신이 그나마 얻기 쉬운 무기를 목표로 하여서 자신만의 패턴으로 삼아 두려움과 싸우면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나 중요한 패턴은 본질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언제나 맞는 패턴이라고 해서 언제나 맞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웃긴 농담이 어른들한테 했다간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질 수 있다. 어제까지 언제나 웃었던 사람이 오늘은 갑자기 화를 낼 수 있다. 약속에 매번 늦지 않고 나오던 사람이 연락도 없이 늦을 수도 있다.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패턴을 경험하게 되면 사람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낯선 장소에 가게 되면 느끼는 불안감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다정보 부족으로 인해서 패턴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판단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외국에 나가면 더욱 더 불안하다.

 

어떤 반응을 할지 모르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만큼 부담스러운 상황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성격의 사람을 불안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별로 안 좋아한다.

 

하지만 결국엔 그것조차도 패턴화된다. 낯선 곳이나 불안정한 것도 결국엔 어떤 흐름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어색하고 불편한 이유도 같다. 상대의 패턴, 즉 그 사람의 성격을 잘 알지 못하기에 말 한마디 할 때도 조심스럽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 편해졌다는 의미는 바로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패턴화 시켜서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대상이 패턴화 되었다는 말은 예측 가능하다는 말이 되고, 예측 가능하다는 말은 다음에 어떻게 나올 지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식으로 미래를 알게 되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설령 그 예측 결과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해도 대비를 할 수 있기에 큰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대상을 패턴화 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여기엔 명백한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패턴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인해서 일어난다. 결국엔 패턴은 확률일 뿐인데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간 언제 그 패턴이 깨질 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인도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 분명하지만, 언젠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들이닥칠 수도 있다. 그러니 언제든 주변을 잘 살피면서 다녀야 한다. 인도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주변을 살피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 언젠가 그 패턴이 깨지는 날 차를 피하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

 

패턴에 대한 신뢰는 빠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지만 결국엔 고집과 선입견 그리고 대상의 정형화라는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남자와 여자 중에서는 특히 남자에게서 이런 문제가 더욱 더 크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남자는 선택을 하는 최종 주체가 되는 입장에 자주 놓이기 때문에 그렇다.

 

일반적으로 많은 가정에서 아이와 아내는 의견을 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남편이 주로 최종 판단을 하고는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남자는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니 남자들에게 있어서 결정을 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사실 결정이란 말 자체가 미래를 예측한 결과이다. 그러니 당연히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패턴이 가장 중요하다. 이미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남자들이 그리 고집스러운 것이다. 최종 결정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최선의 결과를 예측해 내야 한다.

 

패턴은 여행을 갈 때도 어디로 갈지, 가서 어디에서 잘지, 무엇을 먹을지 결정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자신이 무엇인가 쓸만한 정보를 찾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잘 모르기 때문에 타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패턴화 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참조하는 패턴은 결국 어떤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게 된다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유행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패턴은 결코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저 어제도 그랬으니 오늘도 그럴 것이고 그럼 내일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뿐이다.

 

어제 간 식당이 오늘도 열었을 것이고 내일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식당이 쉬거나 아예 그만 둘 수 도 있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패턴은 언제든 깨진다. 그렇지만 두려움 느끼는 사람들은 패턴을 깨려고 하지 않는다. 예외 상황으로 인식하거나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아니면 엉뚱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이 정말로 큰 문제이다. 패턴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면 빠르게 거기에 적응해야 하는데, 고집스럽게 자신의 패턴을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당장 눈 앞에 일어난 사건조차도 부정하려고 한다.

 

남자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다른 가족들보다 더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 대한 안전함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남자가 감당해야 할 두려움의 크기는 훨씬 크다. 그러니 기존의 패턴을 깨고 새로운 패턴을 찾아야 할 상황에 놓이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래서 거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결국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패턴화 시킨 결과를 스스로 너무 신뢰하기에 다른 새로운 종류의 정보나 경험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매우 적대적으로 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즉, 두려움 때문에 패턴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패턴 자체를 가치화 시키고는 거기에 집착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더 심해진다.

 

자신이 과거로부터 해왔던 판단들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대상을 선입견과 정형화를 통해 이해하려고만 한다. 그러니 결국 여자들은 왜 남자들이 그렇게 고집스러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들이 스스로 결정자의 역할을 맡지 않아서 그렇다. 만약 본인들이 직접 결정을 하고 그것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되면 여자들도 남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고집스러워진다.

 

그 누구에게나 참고할만한 패턴이 없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이다. 그러니 자신만도 아니고 가족의 안전까지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명시적으로 패턴화 시키지 않고 그때마다 상황에 맞춰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패턴은 결국엔 확률에 불과하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도 안 된다. 또한 패턴의 시작이 바로 두려움이었음을 스스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옳은 것이라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 아니다. 두려움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아무리 어떤 패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언제든 그것이 깨질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하며, 자신이 최초에 패턴을 가진 이유가 그것이 옳거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그랬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움의 시작이다.

 

대상을 패턴으로 이해하는 것은 처음부터 지식적 접근이다. 과거로부터 일어났던 일들을 근거로 그것의 커다란 흐름을 찾아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패턴 인식의 결과물인 것도 같은 원리이다.

 

하지만 지혜는 패턴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지혜는 패턴을 보고 결정하지 않는다. 지혜롭다는 것은 겉으로 일어나는 모습만 보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진짜 의미를 기준으로 대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말을 하려고 하지 않고 반항하는 아이를 보고는 사춘기니까 당연한 모습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로 패턴이다. 그것은 아이에 대한 지식적 이해이다. 지혜로움은 그 아이가 가진 두려움이 무엇인지 이해해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해줄 때 아이는 그제서야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려고 한다.

 

지식은 패턴의 이해하는 것이고, 지혜는 그런 패턴이 생겨난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지식은 두려움과 싸우기 위해서 패턴을 이용하는 것이고, 지혜는 두려움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식과 지혜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유일하게 아는 것이 자신이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이 말이 진정한 지혜로운 자의 말이다.

 

지구는 매일 24시간 마다 자전하고 365일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하지만, 이 역시도 패턴이다. 지구의 자전은 매일 조금씩 느려지고 있고, 언젠가 하루는 25시간 될 수도 있다. 지구에게 영원히 에너지를 줄 것 같은 태양도 많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항성이다.

 

거의 절대적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이 그저 확률적으로만 존재하는 패턴일 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진실된 패턴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는 자만이 지혜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것들이 옳아서 그렇다고 믿고 싶어한다. 자신의 결정이 모두 두려움을 기반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지속적으로 단단해진다. 매일 패턴을 만들고 그것을 신뢰하는 것을 반복한다. 그렇게 단단해져서 결국 돌덩이가 되면 죽음이 찾아온다.

 

죽음이란 모든 것이 정지된 것이기 때문이다. 꼭 육체가 죽어서 죽음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완벽히 고정되는 순간 이미 죽음은 경험되고 있다.

 

두려움이 결국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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