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신의 목적

아이루다 2018. 5. 4. 18:35

 

세상엔 참 많은 신이 있다. 또 그만큼이나 많은 종교가 있다. 그리고 종교 자체는 주류가 분명히 존재한다.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규모는 작지만 지역별로, 시대별로, 문화 별로, 종족 별로 수 많은 신과 종교들이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야말로 신의 시대였고, 신의 시대이다.

 

신을 믿지도 않고 아무런 종교도 갖지 않는 사람들도 꽤나 있긴 한다. 하지만 신과 종교를 믿는 사람의 숫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다. 대충 비율을 보자면 신을 믿는 사람의 비율이 85%정도 나머지 15% 정도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과 종교를 믿는 것일까? 도대체 사람들은 어떤 목적으로 신을 믿는 것일까? 신의 목적을 알기 전에 인간의 신에 대한 목적을 먼저 살펴보자.

 

신에 대한 첫 번째 목적은 바로 '나와 내 가족을' 잘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혹은 좋은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쁜 일은 생기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목적은 과거에 어머니들이 달밤에 목욕재개를 하고 아들의 합격을 기원하면서 정한수를 떠 놓고 빌던 것이나, 굿을 하는 것이나, 비싼 돈을 들여서 부적을 써서 들고 다니는 것이나,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는 미역국을 먹지 않으려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이런 목적의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신은 기본적으로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이기에 아픈 사람을 살리고, 몸이 불구인 사람을 멀쩡하게 하며,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그리고 설령 죽었더라도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능력도 가졌다.

 

그러니 신에게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들을 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이뤄지느냐 보다 그런 행위를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신에 대한 두 번째 목적은 사후세계에 대한 기탁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 때문에 생겨나는 목적이지만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목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깊은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설령 나는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아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그렇다. 원칙적으로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있다면 두 부류이다.

 

하나는 죽음에 대해서 정말로 깊게 생각해 보질 않아서 그런 것이다. 혹은 특정 신과 종교를 믿음으로써 사후 세계를 보장받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특정 신에 대한 믿음에 깊게 빠져 있는 분들은 자신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은 처음부터 틀렸다. 그것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는 것일 뿐이다.

 

죽음은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두렵기에 더욱 더 신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 신을 깊게 믿으면 믿을수록 오히려 죽음에 대한 견디기 힘든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다면 왜 그렇게 신을 믿으려고 노력하겠는가?

 

인간은 신체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한다. , 사람들이 육체적 상처를 입을 때마다 느끼는 고통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런데 신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무시 받거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실수를 했거나 하는 등의 일들이 생기면 가슴이 철렁한다. , 이 역시 상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런 정신적 상처의 고통 역시도 근본적으로는 원인은 동일하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는 몸과 마음이 계속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데 오직 머리 속에서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다면, 몸도 마음도 지극히 평온한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불교와 같은 종교에서는 이런 단계로 올라 서는 것을 '깨달음' 이라고 하고 이때 깊은 환희를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매우 힘든 일이긴 하지만,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과 종교는 두려움을 맡기는 대상으로만 인식되고 만다. ,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주고, 죽은 후 자신의 영적인 영역에 대한 책임을 져주는 강한 존재로써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을 믿는 세 번째 목적은 삶의 목적을 알고 싶어서 그렇다. ,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에 의하면, 인간은 각자가 그저 유전자를 후대로 계승해주는 중간 단계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러니 어떻게 태어난 이유와 살아가는 목적 같은 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답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결국 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게 된다. 거기엔 불교처럼 결국 삶이란 원래부터 답이나 목적이 없다고 설명해주는 종교도 있지만, 기독교나 기타 종교들은 대부분 명시적이고 확실한 답을 준다.

 

그때 그 답은 딱히 이성적일 필요도 없고 합리적일 필요도 없다. 논리성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해주는 것만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리고 신앙이다.

 

유명한 천체 물리학자였던 칼 세이건이 쓴 소설 '컨택트' 에서 나온 여자 주인공은 자신은 신을 본 적이 없으니 신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녀의 연인으로 나온 남자는 여자에게 돌아가신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했냐고 묻는다. 여자는 확신 있게 아빠는 자신을 사랑했다고 대답한다

 

남자는 또 다시 묻는다. 아버지의 사랑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냐고 한다. 그러자 여자가 당황하면서 머뭇거린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말을 잇는다. 아버지의 사랑을 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믿냐고 한다.

 

신과 신을 믿는 종교는 처음부터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만약 어떤 신의 말씀이나 종교가 마음 속에 들어왔다면 그냥 거기에서 머물러야 한다. 불필요하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예전엔 지동설을 부정했고, 지금은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런 쓸데 없는 노력이다. 신은 신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찾는 목적을 가졌고, 종교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 목적을 가졌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 하지만 과학은 종교를 공격하고, 종교도 과학을 공격한다. 둘 모두 서로 두려워서 그렇다.

 

신을 믿는 네 번째 목적은 도덕적인 이유이다. ,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기심이나 혹은 실현 불가능한 과도한 욕망에 눌리지 않기 위한 목적인 셈이다. 물론 꼭 그렇게 양심적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양심을 편하게 하려고 신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회개가 대표적이다.

 

모든 신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신의 말씀은 도덕적이다. 기독교의 십계명도 도덕적 내용이 가득하다. 이것은 양심이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는지에 대한 한계를 정해준다.

 

이 세상은 너무도 많은 가치가 존재하고, 사람마다 각자 다 그것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또한 사라마다 추구하는 가치 기준이 너무도 다양하며 그로 인해서 매일같이 갈등이 일어난다.

 

지지하는 당도 다르고, 경제 정책도 다르고, 좋아하는 가수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상식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경계도 다르다.

 

그러다 보니 매우 혼란스럽다. 이때 신의 존재와 신이 한 말씀은 혼란함을 잠재우는데 있어서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신의 말씀에 의하면 술이나 담배는 하면 안 된다,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육식을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을 줄여야 한다,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등등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명시적인 답을 준다.

 

그러니 신을 믿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마음이 많이 편해진다. 하지 않는 것들이 혹시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후회나 걱정이 줄어든다. 추가적으로 책임감도 많이 줄어든다. 신이 시킨 일이라든가 신의 의지라는 핑계를 통해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신을 믿는 다섯 번째 목적은 사람을 사귀는 것이다. 사실 이 이유는 신과는 별로 상관없긴 한데, 아무튼 많은 종교 단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같은 신을 믿고 같은 종교를 가짐으로써 다수의 무리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원래 무리 속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함을 느낀다. 또한 그 무리가 자신을 선한 의지로 받아줄 때 그야말로 최고의 평화로움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신을 믿고 그 신을 추종하는 종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개인이 가진 두려움을 줄여주는 것에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오랫동안 특정 신이나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우연히 회의감을 느꼈더라도 그 종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신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가 된다.

 


여기까지 대략 신을 믿는 목적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과연 신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물론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신이 아니기에 그저 상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한번 해보자. 이것이 신에 대한 불경한 행동일 수 있지만,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이 역시도 신의 의지가 아니겠는가?

 

많은 종교적 입장을 통해 유추해보면, 기본적으로 신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을 시험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불교와 같은 종교는 조금 입장이 다르지만, 불교 역시도 오랜 시간의 수양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기에 비슷하다.

 

, 그냥 태어나고 살아가다가 죽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큰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열심히 신을 믿고, 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을 때 어떤 식으로든 타고난 결함을 채워서 삶을 완성 시킬 수 있다.

 

그러니 신이 목적의 첫 번째는 바로 인간의 완성이 된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출발한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모두는 원죄론과 구원을 교리로 삼고 있다. 불교 역시도 번뇌와 해탈을 가장 기본적인 교리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신은 왜 인간을 처음부터 완성시킨 채 만들지 않고 결함이 있는 존재로 만들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참 이해가 안가는 처사이기도 하다. 신은 인간을 분명히 완성된 존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없으면 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그랬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해답은 찾을 수는 없다. 그야말로 신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이것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자.

 

그런데 이 질문의 답을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힌트는 바로 삶 그 자체에서 나온다바로 '부족함' 이다.

 

삶은 끝없는 부족함의 연속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매일 먹지만, 또 매일 배고파진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존재 자체가 우주를 지배하는 중요 원리 중 하나인 엔트로피의 상승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명체가 매일 부족함을 경험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신의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생명체는 분명히 어떤 형체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생명체가 속해 있는 우주는 원래 무질서를 좋아한다. , 엔트로피는 무조건 상승 방향으로 흐른다. 그러니 생명체가 무질서하게 되지 않으려면, 즉 썩어서 그 형체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끝없이 외부에서 에너지를 채워야 한다.

 

방 청소를 하려면 인간의 힘이나 전기의 힘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매일 외부에서 에너지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끝없이 움직이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야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부족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나 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은 부족함이 없다고 해도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자신이 단 한번도 정말로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누구도 부족하지 않다는 상태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이 선호하는 모든 가치는 바로 부족함에서 나온다. 일을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는 돈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무엇이든 부족하고 모자라면 그것을 얻는데 들이는 노력이나 그 결과가 가치 있어진다. 반대로 차고 넘치는 것은 아무리 중요해도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산소는 삶에 있어서 너무도 소중하지만 부족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평소엔 산소의 존재에 대한 1초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미세 먼지가 자욱한 날이 오면 그제서야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다.

 

신이 인간의 삶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이유는, 부족함이 경험할 때 비로소 그것을 채우는 가치를 알게 해주려는 목적이다.

 

빛만 가득한 세상에 살면 빛의 소중함을 알 수가 없다. 빛조차 가치도 없다. 빛은 오히려 어둠을 통해서 소중해지고 가치 있어 진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다. 선은 악을 통해서 의미 있어 진다. 과연 이 세상에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삶은 힘든 시험의 과정을 겪음으로써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결국 신의 목적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 말고 신의 목적을 더 상상하기란 어렵다. 신이 변태가 아니라면 이 이유 말고 또 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서 다시 신에 대한 인간의 목적으로 되돌아가보자. 기복신앙, 사후세계, 존재의 의미, 인간관계, 도덕성,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신의 목적과 부합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기복신앙은 나를 잘 살게 해달라는 기원이다. 삶이 부족해야 하는데, 삶을 부족하지 않게 해달라고 했으니 이것은 처음부터 치트키가 된다. 그래서 이것은 결코 신의 목적이 아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역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달라는 요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함 자체를 줄여달라는 요구인 셈이다. 그러니 이것도 신의 목적이 아니다.

 

존재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은 이 중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 신의 목적에 부합한다

 

인간관계는 사실 신의 목적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순한 삶의 행위 중에 속한다. 그러니 이것에 대해서 딱히 더 고려할 필요는 없다

 

도덕성은 그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존재들이 그 기준점을 신에게 맞춘 것에 불과하다. 신은 삶의 본질을 알고 그것의 의미를 알기를 바랬는데 어떻게 도덕적으로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행위가 된다.

 

결론적으로 신에 대한 인간의 목적은 존재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 이 하나만이 유일하게 신의 목적에 따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가정이다. 그러니 결론이 맞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신을 믿고 종교를 가졌다면 자신의 믿고 있는 신과 자신이 속한 종교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그저 나를 잘 해달라고 하거나, 두려움을 줄여달라고 하거나, 사람을 사귀려는 목적이나, 도덕적 기준점을 정하기 위해서 신을 믿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 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될 테니까 말이다.

 

신은 인간을 무한대로 초월한 존재여야 할 것이다. 인간과 신의 차이는 단세포 생명체와 인간 사이의 차이 수준이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신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너무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려져 버렸다. 그래서 눈 먼 사람을 눈 뜨게 하거나,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거나,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적을 행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신은 이 거대한 우주를 만든 존재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먹어 살리는 태양을 수천 조개, 아니 거의 무한대로 만들어 낸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병을 낫게 해주거나, 복권에 당첨되는 일이나, 죽은 사람들을 천국에 보내주는 일들을 해주고 있어야 한다면 그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고 평생 느껴야 할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신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버리고 말았다.


신은 그렇게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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