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존심과 자존감

아이루다 2018. 5. 14. 08:55

 

자존심과 자존감, 이 둘은 같은 "자존" 이란 글자로 시작되는 단어이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한 글자에 의해서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변하고 만다.

 

하지만 이 두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해서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자존감이나 자존심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고, 혹은 시중의 책 등에서 자존감이 아주 엉뚱한 의미로 해석되어서 소개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둘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까?

 

왜 이것을 제대로 구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보다 꽤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존감과 자존심을 가능하다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편이 좋다. 그래야 삶의 방향을 정확히 정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단 한글자만 다르지만, 이 두 단어는 행복에 관해서 전혀 다른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자존감은 행복한 삶에 큰 도움이 되지만 자존심은 오히려 불행을 불러오는 원흉이 되기 쉽다.

 

기본적으로 자존감은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불행을 견디는 힘으로써는 가장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불행을 견디고 결국 행복해질 수 있을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어떤 것에 지고 싶지 않은 마음,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 자기 자신을 어떤 수준 이상으로 생각하고는 그 밑으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바로 자존감인 것이다.

 

반면에 자존심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수준 이상이라고 상상하는 마음이다. , 현실이 아니라 판단이나 상상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렇지 못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해진다. 그 불안함은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결국 주변 사람과 관계를 힘들게 만든다.

 

삶이 불안해지고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과도한 자존심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만다.

 

왜 이런 큰 차이가 생겨날까? 도대체 자존심과 자존감은 어떻게 동작되기에 이렇게 정 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일까?

 

그 동작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원래 두 가지 판단 주체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머리와 가슴이다.

 

사람들은 흔히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 머리는 이성을, 가슴은 감정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의 외부를 경험하고 판단할 때 언제나 머리와 가슴, 즉 이성과 감정을 통해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이성은 과거의 경험과 지식적 판단을, 감정은 본능적 판단을 주로 한다. 그래서 이 둘은 적절하게 조합이 되어서 최종적으로 가장 자신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결론을 낼 수 있게 돕는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다.

 

이 둘이 늘 같은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 상반되는 판단을 하는 경우가 벌어지면 사람들의 내면에서 갈등이 시작되고 만다. , 생각은 반대를 하는데 감정은 찬성을 하거나, 반대로 생각은 찬성을 하는데 감정은 반대를 하는 경우가 흔하게 벌어지고 만다.

 

눈 앞에 있는 만난 것을 먹고 싶지만, 상황상 먹으면 안될 때 그렇다. 절대로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짝사랑할 때도 그렇다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의 행운에 질투를 느껴서 기분이 나빠질 때도 그렇다. 공부를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을 때도 그렇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생각과 감정이 따로 노는 일은 매우 잦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면의 불일치는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했을 때 그 결론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어느 한쪽이 반대를 하는 결론을 어떻게 확신있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생각을 따르면 당장 그것이 맞아 보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거부했기 때문에 불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정확히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찝찝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눈 앞의 모든 정보는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데, 마음 한 구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존재하게 된다.

  

반대로 감정을 따르고 생각을 거부하면 마치 자신이 절제력이 부족하고, 나약하며, 심지어는 동물 만도 못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루 종일 놀고 나면 그렇다.

 

이런 식으로 생각과 감정이 서로 다른 판단을 할 때 그것을 통합하지 못하고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되면 반드시 뭔가 마음 속에 남게 된다.

   

원래 사람은 뭔가가 확실할 때 남는 것이 없다. 반대로 뭔가 의심스러우면 자꾸 머리 속에 생각이 난다. 더해서 불안해지고 걱정이 생긴다. 그런데 생각과 감정이 따로 놀면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도대체 둘 중 누가 옳은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생각과 감정을 일치시키야 한다. 그래야 혼란스럽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감정의 고유한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생각은 상황에 따라서 바꿀 수 있지만 감정은 바꾸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과 감정의 불일치가 일어나서 불안함을 느끼거나 혹은 기분이 상하게 되면 감정을 바꿀 수 없으니 생각을 바꾸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정당성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행위가 된다. 누군가를 왜 싫어하는지, 누군가가 왜 재수가 없는지, 자신이 왜 상처를 입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해도 그것은 결국 감정을 이성적으로 해석해 낸 결과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남들 앞에서 설명을 하고 위로나 공감을 받고 나면 당장은 기분이 편해지긴 하다. 하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다. 왜냐하면 생각을 감정에 맞춰서 바꿨다고 해도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기존의 경험, 지식 등은 변화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장 마음은 편해졌지만 마음 속 깊이 여전히 불안함이 존재하고, 그 불안함은 후회나 걱정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많이 쌓일수록 불안한 사람이 되고 만다.

 

, 사람들이 불안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말에는 생각과 감정이 자주 따로 노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은 모두 불행의 조건이 된다.

 

그러니 생각과 감정의 결맞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된다. 감정과 생각이 결맞음이 확실하면 확실해질수록 어떤 일들은 기억 속에 남지 않기 때문에 후회도 생기지 않고 걱정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지나간 길은 다시는 되돌아 볼 필요가 없어진다. 삶이 단순해지고 명확해진다. 그럼으로써 불안하지도 않고 판단을 할 때도 그다지 혼란스럽지도 않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가 바로 사람들의 이런 특징으로 인해서 생겨난다.

 


단순히 표현하면, 자존심은 생각과 감정이 각자 다른 방향을 보는 상황이고, 자존감은 생각과 감정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상황이다. 그래서 자존심으로 대하게 되면 뭔가 남게 되고, 자존감으로 대했다면 아무 기억조차 남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자신의 뺨을 때리고 백만 원을 줬을 때, 머리 속의 생각은 받으면 안되지만 가슴 속의 감정은 그 돈을 갖고 싶다고 느끼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때 어떨까바로 자존심이 엄청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서 돈도 받지 못하고 크게 화만 내고 만다. 혹은 돈을 받으면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반대로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감정적으로도 그 돈이 전혀 끌리지 않는다면 자존심을 부리는 사람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물론 동일하게 화는 나겠지만 아주 단순하게 결정할 수 있다. 받지 않든가 아니면 받든가 모두 결정이 가능하다.

 

내면에 아무런 갈등이 없기에 완벽히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받지 않고 상대를 경찰에 신고하거나, 돈을 받고 상대를 그냥 보내는 것, 이 둘 중 뭐든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 사람은 화가 나서 상대를 같이 때리거나 아니면 결국 어쩔 수 없이 화를 참으면서 기분 나쁘게 돈을 받고 만다.

 

, 그러면 지금까지 알게 된 사실을 근거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알아보자.

 

답은 쉽다. 자존심을 경험하는 경우를 가능하면 자존감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 서로 다른 방향을 보던 생각과 감정을 최대한 같은 방향을 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사람들은 대부분 감정이 앞서 가면 생각이 그 뒤를 따랐다. , 어떤 식의 감정이 생겨나면 이성이 그 감정을 해석하여서 정당성을 찾으려 했다. 그러니 나쁜 감정이 들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 하소연을 해왔다.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면서 그 정당성을 확인 받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문제였다. 감정은 원래부터 정당성이란 것이 없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이나,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나, 해외 여행을 가고 싶은 욕구는 그냥 감정이다. 거기에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설명하는 것은 그저 다른 사람의 동의나 위로를 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처음부터 화가 나는 것이나속상한 것이나, 상처를 받은 것은 그저 감정이 움직인 것일 뿐, 정당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판단의 두 축인 생각과 감정이 다른 방향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불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감정은 어찌 할 수 없으니 자꾸 생각을 억지로 감정에 맞춰온 것이다. , 감정 합리화이다.

 

이런 해결책이 사람들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이며, 결국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는 원인이 된다. 감정에 생각을 억지로 맞추면 당장은 편해지지만 한 번 느끼기 시작한 감정은 끝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디면 아무리 당장 억지로 감정 합리화를 해도 결국 계속 상처가 쌓이기 마련이다.

 

질투가 생겼다면 또 다시 질투가 생겨나고, 열등감을 느꼈다면 또 다시 열등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이 평생 반복되면 될수록 점점 더 자존감은 바닥을 향하게 될 수 밖에 없다.

 

회사에서 사장에게 크게 깨지고 나서 친한 친구를 만나 사장이 가진 문제점을 하소연하고 나면 잠시간은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또 다시 회사에 가서 사장을 보는 날에는 그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불편한 것이다. 이 감정은 사장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호감 있는 미소나 혹은 사표로써만 해결이 가능할 뿐, 아무리 친구가 공감해주고 위로해줘 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것은 잘못된 해결책이었다. 생각과 감정이 같은 방향을 보게 하기 위해서 이제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감정을 생각에 따라오도록 하는 방법이다.

 

물론 터무니 없는 소리 같다. 마치 감정을 조절하라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는 점이다. 단지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일단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감정에 생각을 맞춰왔던, 그 과거의 패턴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과거부터 해왔듯이 계속 생각을 감정에 맞추게 되면 당장 해결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합리화를 멈춰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생각이 감정에 따라가는 것을 멈출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감정이 생각으로 따라올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 일단 감정 합리화는 멈췄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정이 생각을 따라올 수 있을까?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이 도대체 왜 일어나는지 이해해야 한다. 감정을 이해하는 것 자체도 아주 복잡한 설명이 될 수 있지만, 단순히 말하면 감정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특히 나쁜 감정들은 그렇다.

 

두려워서 화가 나고, 두려워서 짜증이 나고, 두려워서 질투심이나 열등감이 생긴다.

 

그런데 왜 두려울까? 바로 죽기 싫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 때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감정적 판단이 들까? 바로 얻어야 하는 이득을 얻을 수 없을 때, 손해를 반복적으로 볼 때이다.

 

회사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으면 두려워진다. 계속 월급이 나오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은 안다. 회사를 옮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감정은 그런 판단을 못한다. 그냥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불안하다. 또한 회사를 옮기는 것도 부담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 감정은 복잡한 상황파악을 못한다. 그저 당장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이득을 포기해야 할 것 같으면 두려움을 느끼면서 불안한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월급이 안 나오면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를 울고, 누군가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있게 된다.

 

이런 감정의 특징을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감정이 생각을 따라오도록 만들 수 있는지 힌트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감정을 설득하는 것이다.

 

감정은 손해와 이득에 매우 민감하다. 그리고 이런 감정의 특징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손해를 입었거나 이득을 얻지 못했다는 느끼는 경우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다.

 

감정은 손해를 볼 때나 이득을 얻을 수 없을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 요동을 친다. 그런데 어떤 것이 손해냐 이득이냐를 판별하는 관점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작은 손해를 보거나 이득을 놓치는 것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매일 가던 마트에서 세일 시간을 놓치거나, 친구를 만나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을  찻값이 만원, 밥값이 이 만원이 나왔는데 우연히 자신이 밥값을 감당했을 때도 그렇다.

 

그러니 이득과 손해를 판단하는 관점이 사소하면 사소할수록 감정이 두려움을 느끼는 횟수는 많아질 수 밖에 없다. , 매일같이 나쁜 감정들이 요동을 친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감정이 생각을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설명은 틀렸다. 감정은 즉각적으로 생겨나기에 생각을 따라오게 만들 수 없다. 대신 나쁜 감정이 일어나는 경우를 최소화 시키면 된다. , 이득과 손해를 느끼는 순간을 가능한 한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그리고 답 자체는 쉽다. 바로 이득과 손해를 평가하는 상황을 줄이면 된다. , 가능하면 작은 이득과 손해는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최대한 큰 이득과 손해만 인식하고 살면 된다.

 

그것은 또 어떻게 가능할까? 사실 그 답은 분명하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이득만이 아니라 전체의 이득을 생각하고 사는 방법이다. 이것만이 거의 유일하다.

 

나 자신만 생각하고 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손해와 이득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사소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아닌 내가 속한 사회를 위해서라면 당장의 손해나 이득은 별다른 감정적 요동 없이 지나칠 수 있다.

 

자기밖에 모르던 아이도 학급의 반장이 되면 빵을 나눠줄 때 자신이 빵을 먹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빠짐없이 전체에게 빵을 공평하게 나눠줄 수 있는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 전체를 바라보는 순간 개인의 손해와 이득은 사실상 별 것이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최대한 넓은 범위의 삶을 보려고 해야 한다. 나 자신만의 이득, 오늘의 이득, 당장 눈 앞의 이득에 연연해서는 삶을 크게 볼 수 없다. 내가 속한 사회의 이득, 10년 후의 이득, 눈 앞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도 이득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손해와 이득을 바라보는 관점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눈 앞의 작은 이득들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더해서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양심은 이득과 손해에 민감한 감정을 억제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을 지키지 않으면 않을수록 이득을 얻기는 쉽지만 사소한 손해와 이득에 점점 더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양심적으로 살면 살수록 이득과 손해의 관점이 넓어진다.

 

, 이제 정리를 해보자.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 동안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감정 합리화를 멈춰야 한다. 그리고 이득과 손해에 민감한 감정의 요동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느끼는 이득과 손해의 관점을 최대한 넓혀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 조건이 충족된 사람은 자존감이 낮고 싶어도 낮을 수가 없다.

 

기존의 자존감을 높이는 많은 방법론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 그런 방법들은 대부분 그저 자신감을 높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감은 자존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행복해지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래서 많은 책들에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거짓말은 아니다.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은 원리로, 행복하면 대부분 너그러워져서 작은 손해와 이득에 별로 연연해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법엔 문제가 있다. 운이 나쁘게 불행해지면 다시 원래 모습인 작은 이득과 손해에 연연해지는 모습으로 금세 되돌아 가기 때문이다. 즉, 행복해서 자존감이 높아졌다면, 불행해졌을 경우엔 자존감이 하락할 수 밖에 없다.


원래 자존감은 불행을 견디는 힘으로써 가장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불행해지면서 자존감까지 같이 하락하게 되면 자신이 가진 자존감으로 불행을 견뎌낼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은 사실상 자존감이라고 부르기가 힘들다. 그저 자신감이나 긍정적 태도 정도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


결국 행복을 통해서 자존감을 높인 경우는 불안하다. 또한 행복해지는 것 자체도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좀 더 큰 시야의 손해와 이득 그리고 자신의 양심껏 사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훨씬 안정적이면서 쉽다.


어떤 방법으로 자존감을 높일지는 각자 선택할 몫이다. 자존감을 높여서 행복해질 것인지, 행복해져서 자존감을 높일 것인지를 결정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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