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불행을 대하는 방식

아이루다 2018. 6. 5. 08:25

 

누구나 다 매일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불행해야 하는 날들이 온다. 그리고 불행이 찾아오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그 불행을 대처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불행을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많은 차이가 난다.

 

일반적으로 가장 흔하게 불행을 대처하는 방법은 바로 그 불행의 원인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쉽게 말해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된다. 입을 옷이 없으면 옷을 사고, 심심하면 TV를 보고, 외롭다고 느껴지면 친구들을 만남으로써 해결한다.

 

삶이 너무 지치면 여행을 떠나거나 신나는 놀이공원에 가기도 한다. 주말이 되면 주중에 일을 하느라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각종 취미생활을 즐기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매일 불행과 싸운다. 그리고 나름대로 이겨낸다. 그리고 이길 때마다 행복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한 가지 곤란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불행이 해결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렇다. 몸이 매일 늙어가는 것이나, 원하는 만큼 돈을 가질 방법이 없는 경우나, 신체적으로 복구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을 때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렇고, 직장에서 잘렸을 때도 그렇다. 소중한 사람이 많이 아프거나 혹은 죽을 때는 그 자신이 미칠 정도로 불행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감당해야 할 해결 불가능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죽음이다. 기술 문명이 훨씬 발달한 미래엔 인류가 죽음조차도 넘어 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 시대까지는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불행이다.

 

일반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불행들 중에서는 그 불행이 죽음에 가까울 수록 치명적이다. 치료 불가능한 병을 얻었거나, 사고로 사지가 마비되거나, 사기를 당해 가진 돈을 모두 잃었거나, 사업이 망해서 살던 집까지 경매로 넘어갔거나, 상대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했을 경우는 모두 큰 불행이며, 당장 해결이 불가능한 불행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는 치료 불가능한 병을 얻었을 때가 가장 치명적이다. 그나마 나머지 경우엔 그래도 살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 파급력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이 해결 불가능한 불행 앞에 선 사람들은 커다란 좌절과 심각한 수준의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말 그대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당연히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적적할 대응책이다당장 해결 불가능하니 그 불행이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시키려는 노력인 셈이다. 그리고 이 대응책은 사람마다 무척 다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은 누구나 비슷한 해결책이지만, 두 다리를 잃었을 때 사람마다 반응은 천차만별이란 뜻이다.

 

첫 번째 유형은 의지와 노력형이다. 여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삶을 매우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특징을 가졌다. 이들은 평소엔 죽음과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서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하고, 혹시 매우 심각한 병에 걸렸더라도 매우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한다.

 

큰 돈을 잃어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어도 10년 아니 20년 이상 열심히 일만 해서 극복해 내기도 한다. , 당장은 전혀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오랜 시간 노력을 통해서 실제로 해결하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해결 불가능한 불행들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해결 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물론 죽음만큼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들은 그 시기를 늦추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타고난 성향이다. , 노력해서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혹시나 만약에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런 성향을 가졌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훨씬 더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에서 그 정도의 의지력을 가지고 노력을 할 수 있는 성격을 타고난 사람이 극히 드물다.

 

그래서 두 번째 유형이 나타난다그리고 이들은 정반대의 대응을 한다자신의 앞에 생겨난 그 불행을 그냥 두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대응책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가만히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들은 자신이 해결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불행이 다가오면 그냥 체념하고 포기해버리고 만다.

 

이 방법의 장점은 아주 쉽다는 점이다. 의지나 노력 같은 것은 처음부터 필요가 없다. 그냥 불행이 닥쳐오면 그 불행을 그대로 경험하면 된다. 아프면 아프고, 돈을 잃으면 돈이 없는 대로 산다.

 

하지만 쉬운 만큼 위험성은 크다왜냐하면 그런 불행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원래 해결 불가능한 불행 앞에 섰다고 해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다면 마음만큼은 편할 수 있다. 특히 최선을 다해 그 불행에 대처하고 있다면 오히려 행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일수록 점점 마음이 불편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당장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타인의 위로이다.

 

그래서 다가온 불행을 포기한 사람들은 말이 많아진다. 이것을 다른 말로 신세타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주변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해결 불가능한 불행 앞에서 선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처지에 놓이지 않는 자신의 상대적 행복에 대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세타령을 잘 들어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한계는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불행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다가 보면 너무 부정적인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에 결국 상대적 행복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버틸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상대가 그런 불행한 일 앞에서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체념과 포기로 일관하면서, 결국 끝없는 자기 합리화와 주변에 대한 불만만 늘어 놓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점점 연민에서 혐오로 바뀌어 간다.

 

, 처음엔 안됐고 불쌍하다고 느끼다가 나중엔 도대체 왜 저러고 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그리고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상대방이 하는 불행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점점 두 사람 사이의 만남이 뜸해지고 그러다가 결국 관계 자체가 깨지는 경우로 간다.

 

결국 이런 식으로 자신의 앞에 닥친 불행을 체념과 포기로 일관한 사람들은 의도와 상관이 없이 관계로부터 고립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온다. 바로 외로움과 우울함이다.

 

그래서 해결할 수 없는 불행이라고 해도 그냥 멍하게 대했다가는 삶이 망가져버릴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대처는 하지 않더라도 크게 힘들지 않는 수준으로 노력을 한다.

 

세 번째 유형이 바로 이것이다, 이들은 해결 위한 노력을 하긴 하는데, 실제로는 적당히 흉내를 내는 것이다.

 

비록 흉내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효과는 있다. 마치 직장인들이 영어 공부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서 짬을 내서 전화 영화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열심히 공부를 한다. 하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영어 공부를 위해서 전화 영어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만족한다. , 실제로 영어를 잘하겠다는 생각보다 그저 마음 속에 있는 불안함을 줄이고자 일종의 공부를 하고 있는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공부 시간이 시간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평소에 노력한 것이 있어야 대화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매일 지정된 시간에만 의무적으로 하려고 하니 그것이 부담스럽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그만두게 된다. 헬스장 회원권도 비슷하다.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일들은 꽤나 많다. 심지어 여행을 떠나는 것조차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여행을 떠나는 것이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뭔가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를 얻고 싶어서 가는 경우이다.

 

, 여행을 형식적으로 간다남들처럼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흉내를 내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맞닥뜨리는,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힘든 노력을 해야 하는, 그래서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불행일 경우, 그것을 해결하려면 너무 괴롭고 힘드니 그냥 해결하는 척만 하고 살아간다. 그렇게 마음의 위로만 얻으면서 사는 것이다.

 

이것 역시 체념과 포기만큼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은 낫다. 하지만 오히려 나쁜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전화 영어, 헬스장, 여행을 가는 것에 불필요하게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는 네 번째 유형이 나타난다. 네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의지적으로 극복하지는 않지만, 포기하거나 체념하지도 않으며 해결하는 흉내도 내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불행을 해석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자신은 이런 불행을 감당할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하려고 애쓴다.

 

이 태도는 두 번째인 체념과 포기와 비슷하긴 하지만, 많이 다르다. 포기가 아닌 수용이기 때문이다. 비록 포기와 수용은 그 결론은 똑같지만, 이후 마음의 상태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포기를 할 경우 끝없는 불안증에 시달리지만, 수용을 하게 되면 마음만큼은 편해진다.

 

그리고 수용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 , 왜 그런 불행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식적 그리고 경험적 근거가 필요하다. 이때 주로 그 역할을 하는 것들이 바로 철학적 사상이나 종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사상과 종교는 결국 그 목적이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해결 불가능한 불행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해서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더 흔한 방법이 바로 종교이다대부분의 종교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불행을 어떤 큰 흐름의 일부로 해석하거나 혹은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주려는 신이 준 시련 등으로 해석해준다.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주고 더해서 자신에게 그런 불행을 주지 말라고 기도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다른 방식으로는 운명론으로 삶을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많은 불행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엔 체념이나 포기 같지만, 그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으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된다. 그래서 적어도 남들 앞에서 자신의 신세타령은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운명론으로는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생년월일로써 사람의 운명을 봐주는 사주팔자가 있고, 이름, 손금, 관상 등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예측하는 방법도 있다서양에서는 별자리를 통해 사람의 운명을 보는 점성술이나 타로카드와 같은 방법도 유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주의 생성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불행을 이해하는 방법도 있다. 특히 동양에서는 음양오행설이나 윤회론과 같은 것들이 바로 거기에 속한다.

 

이런 것들은 종교와 철학 중간쯤에 속해 있는데, 딱히 어느 쪽으로 구분하기가 힘들다하지만 그 근거가 너무 애매하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이 우주를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사이비 종교나 사이비 철학으로 인식되기가 쉽다.

 

기본적으로 이런 식의 해석은 주로 별다른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거라고 제시하는 것들조차도 논리적으로 검증이 힘들다. , 철학이나 종교 모두 동일하게 그것에 관련된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은 거의 없고, 대부분 그저 누가 처음에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거나 혹은 누가 썼는지도 모를 책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그것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믿지 않는다면 모두 헛소리에 불과한 것들이다. 하지만 반대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믿고 싶어하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네 번째 해결책은 사람들마다 크게 입장 차이가 난다. 누군가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누군가는 절대적 진리로 믿기도 한다. 또한 믿는 절대적 진리라고 해도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해서 그들끼리도 자신이 진리를 믿고 있다고 서로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해결 불가능한 불행에 대한 대책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들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후세계에 대한 설명이다. , 죽음이라는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두렵고 커다란 불행을 어떤 식으로든 설명도 해주고 더해서 죽음 이후의 삶을 설명해줌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준다.

 


여기까지 정리해보자. 어떤 해결 불가능한 불행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해결이 되지 않더라도 최대한 노력하는 유형, 포기하고 체념하는 유형, 적당히 해결하는 척 흉내를 내는 유형,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의 힘으로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유형으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 사실상 불행을 제대로 대하는 방식은 노력하는 유형뿐이고, 다른 세가지는 그 방식은 조금 다르더라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즉, 체념하고 포기하거나, 뭔가 하는 척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거나, 그저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불행이 더 이상 불행만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은 결국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불행을 회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각자 작은 문제들은 가지고 있지만 큰 문제는 없다. 어차피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불행이라면 괜히 노력했다가 실패하는 것보다 그냥 그렇게 대하는 것이 낫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한 가지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불행이 가진 진정한 힘이 발휘될 기회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은 삶을 있는 기회를 놓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행하기에 움직인다. 이것은 진리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찾는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직장을 다닌다.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은 움직여서 다가갈 목적지가 지금 이 자리보다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혹은 덜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움직이다가 보면 그 행복감으로 인해서 나중엔 행복하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최초에 불행하다는 것은 무척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그 힘듦 때문에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래서 불행이 결국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이 될 수 있는 불행을 그냥 체념하고 포기해버리거나, 해결하는 척 흉내만 내거나, 불행에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받아들여 버리고 말면 그 힘은 그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 움직여지지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변화가 없게 된다.

 

삶의 정답은 없지만, 다들 행복하고 살고 싶어는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 행복할까? 아니다. 움직여야 한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앞에 놓인 불행은 온몸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최초에 움직일 힘이 생겨난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 흉내, 해석 등으로 처리해 버리게 되면 움직일 힘 따위는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만다.

 

불행은 분명히 견디기 힘들고 절대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을 억지로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 당연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다.

 

불행을 해결하는 것은, 특히나 해결 불가능한 불행을 대처하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 죽는다고 해서 오늘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은 적절하게 삶을 사는 방식은 아니다. 죽더라도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들이 그렇다. 어떤 노력들이 완벽한 해결책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 그 자체에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삶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삶은 회사의 일이 아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삶의 결과가 죽음인데, 어떻게 결과가 더 중요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삶은 오직 과정만이 중요하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위해 노력을 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을 반짝이게 할 수 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 위로 먼지만 차곡차곡 쌓인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삶과 먼지가 쌓여서 어떤 광택도 보이지 않는 삶은, 그 끝이 똑같은 죽음이라고 해도 반짝이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비교도 안될 만큼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니 오늘부터라도 가능하다면 불행을 정면으로 맞서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조금씩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한번이라도 더 만나며, 뭔가 배울만한 것이 있으면 배우려고 노력해봐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하든 자신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하는 것이 좋다.

 

이런 노력들은 비록 목적달성은 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허공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쌓여서 각자마의 삶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물론 그래도 절대로 해결 불가능한 불행들이 여전히 눈 앞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마다 한숨을 쉴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해결 하려고 노력하는 행위 그 자체임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살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불행 앞에서 비겁하게 숨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는 것, 그것이 결국 행복한 삶이란 결론을 가져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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