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도구화된 인간

아이루다 2018. 2. 7. 07:13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유능한 존재 이길 바란다. 단지 개인별 차이라면, 어떤 분야에서 유능하고 싶은지 정도 이다.

 

누군가는 회사에서 일을 잘하는 것으로, 누군가는 집에서 살림을 잘하는 것으로, 누군가는 축구를 잘하는 것으로, 누군가는 글을 잘 쓰는 것으로, 누군가는 말을 잘하는 것으로, 누군가는 고장 난 것을 잘 고치는 것으로 유능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때 사람은 마치 하나의 도구와도 같다. 못을 박는데 특화된 망치처럼,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오직 유능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망치처럼 한가지 목적에만 유능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양한 분야에서 유능하길 바란다. 마치 스위스 아미 나이프 처럼 말이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받을 수록 삶의 만족도도 높고 행복해지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유능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그와 반대되는 한가지 마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유능하긴 하지만, 결코 도구로 취급되지 않고 싶은 마음이다. , 유능한 도구가 아닌, 유능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노래 재생 기계로 취급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암산이 빠른 사람을 계산기로 취급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여기엔 묘한 경계가 있다.

 

평소엔 노래를 잘하거나 계산을 잘하기에 그 능력을 잘 쓰는 것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심지어 주변에서 저 사람은 노래를 남달리 잘하니까 노래를 하라든가, 계산을 잘하니까 어떤 숫자들을 암산해달라든가 하는 말을 들으면 즐겁게 그것을 한다.

 

하지만 그런 취급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는 날이 있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을 어떠한 감정도 없는 도구처럼 취급할 때거나 혹은 그 자신이 기분이 나쁜 날에 그렇다. 그리고 그럴 경우 화를 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내가 노래만 하는 기계냐고 화를 내고, 내가 암산이나 하는 기계냐고 따진다. 그리고는 mp3 파일이나 들으라고 하거나, 계산기를 쓰라고 하고는 상대의 부탁을 거절해 버리고 만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그 경계는 아주 애매하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을 그 역할로써 정의해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생긴다. , 유능한 것은 보통은 기분을 좋게 해주지만, 어떤 경우엔 그로 인해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주 유능한 학원 강사는, 그 유능함으로 인해 많은 돈도 벌고 사람들에게 유능함에 대한 인정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학원 강사는 결국 잘 가르치는 도구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 많은 돈을 내고 그 사람의 강의를 듣는 사람은 결국 그 돈만큼의 효과를 보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많은 돈은 벌 수 있지만, 인간적인 가치가 잘 쌓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학교의 선생님은 돈은 적게 벌지만 훨씬 더 인간적인 가치를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상황마다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사람이 아닌 도구로써 평가될 때 왜 그렇게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일까? 그 스스로 그렇게 유능하길 바라면서도, 실제로 유능한 존재로써만 바라보게 되면 왜 그런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비록 인정은 받았지만 이해를 받지를 못해서 그렇다.

 

인정을 받는 것과 이해를 받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인정은 있는 그대로 평가를 받는 것인 반면, 이해는 별로 상관도 없어 보이는 주변 상황까지 다 고려가 되어서 평가를 받는 것이다. , 평가 자체에 그 대상이 인간이란 점이 고려가 된다.

 

사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 면이란 말에는 뭔가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실수를 할 수 있고, 착각도 하는, 바로 그런 면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정은 이성적이지만, 이해는 감정적이다. 그러니 싫어 하는 사람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좋아 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줄 수는 없지만 이해해 줄 수는 있다.

 

이 세상에 어떤 존재도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완벽한 존재도 없다. 사람은 원칙적으로 타고난 불완전성의 존재이다. 그래서 다들 조금씩 불안하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그 내면은 다 동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정받기를 원하는 순간이 있기도 하고 이해 받기를 원하는 순간도 있다.

 

어떤 결과물에 자신이 있을 때는 인정만을 원한다. 반대로 자신의 결과물에 자신이 없을 때는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엔 그저 유능한 도구로써 취급되어도 어느 정도 만족하고 살지만, 개인적인 문제가 있거나 감정적으로 좀 힘든 상황에 놓이면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서 매우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집안의 가장은 평소엔 돈을 벌어오는 유능한 도구로써 충분히 만족하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회사에서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왔는데 집에서 자신을 그저 돈만 벌어오는 도구로써 취급을 하게 되면 폭발을 하는 것이다.

 

그 가장도 그 자신을 인간적으로 이해를 받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정확한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공감'이 된다.

 

사람들은 평소엔 그저 유능한 존재로써 인정받기로 만족하지만,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인간적으로 공감을 얻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을 바란다고 해서 언제나 공감을 얻을 수는 없다. 특히 평소에 자신을 유능한 존재로써 증명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요리를 아주 잘하는 주부가 가족들에게 요리로써 유능함을 인정받았다면, 어느 날 운이 나쁘게 요리에 실패하게 되었을 때, 가족들은 왜 이런 맛없는 요리를 했냐고 따지게 된다. 평소에 칭찬한 만큼 따진다.

 

평소에 가족들과 인간적인 부분으로 소통했다면, 가족들도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 그 자신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점이 이미 공유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실패에 대한 공감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요리에 자신이 있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스스로도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그 어떤 순간에도 완벽한 요리를 해 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바로 인간이란 요소가 빠지게 된다. , 보통 때는 불완전함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니 문제가 생겨도 인간적으로 공감해주지 않는다.

 

마치 요리 기계처럼 취급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계가 어느 날 맛없는 요리가 나오게 되면 누가 짜증이 나질 않겠는가? 그것은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고 음료수를 선택했는데, 엉뚱한 음료수가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니 스스로 유능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만큼의 유능함에 대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저 유능한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을까? 왜 도구로써 취급을 받게 되면 그렇게 기분이 상하게 되는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도구화된 인간은 대부분 언제든 대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한 명의 인간은 절대로 대체가 불가능하지만, 특정 역할로 정해진 존재는 언제든지 대체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커다란 두려움이다.

 

두 번째 이유는, 유능하려는 목적이 바로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렇기 때문이다. , 유능함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정이 목적이란 뜻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정을 받으려는 목적은 바로 내면에 존재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

 

망치나 로봇이 완벽히 도구로써 취급되면서도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들은 두려움이란 감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람들은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 유능한 존재가 되길 바라면서도 자신이 도구로써 취급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상처를 받는다.

 


그럼 여기에서 한 가지 역발상을 해볼 수가 있다.

 

사실 사람이 유능하다는 것은 매우 좋은 장점이다. 그리고 그 유능한 역할로만 만족할 수 있다면, 즉 대체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인정을 받으려는 목적을 버릴 수 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까?

 

첫 번째상처 받을 일이 별로 없다. 물론 아무리 스스로를 도구화 시켜도 결국 상처는 받을 수 밖에 없긴 하다. 하지만 그럴 일은 가능성이 훨씬 줄어든다. 사람을 그렇게나 심하게 도구로 다루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자신을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써 대접해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자신은 이미 도구인데, 누군가 자신을 인간적으로 이해를 해주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세 번째, 상처를 받을 일이 드물기 때문에 도구로써 역량이 최대한 발휘가 된다. 원래 사람은 감정의 변화가 크면 클수록 일을 할 때 영향을 받게 된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그렇다결국 급격한 감정 변화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가능하면 평온한 상태에서 일을 할 때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업무능력은 대체 가능성을 많이 줄여줄 수 있다. 그러니 두려움이 줄어든다.

 

네 번째,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원래 사람들과 만날 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상처이다. 그런데 이런 상처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기분 나쁘지 않고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 이것은 밝고 명랑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행복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을 하나의 도구로써 받아들이는 일은 무척 어렵다. 자존심도 상하고, 두렵기도 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짜증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은 이용당할 때 행복한 존재이다. 엄마는 아이들이 자신을 찾을 때 행복하지, 자신을 버거운 존재로 느낄 때 행복하지 않다.

 

어쩌면 인간은 이용당할 가치가 없을 때 가장 불행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이용당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된다.

 

, 최대한 유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대신 유능한 존재가 되었을 때 감당해야 할 위험, 즉 자신에게 인간적인 위기가 왔을 때 그 상처를 감당해야 할 문제만 잘 처리해 내면 된다.

 

바로 자신의 유능함에 대한 그 어떤 기대치도 갖지 않는 것이다. , 유능한 것으로만 만족하고 더 이상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유능한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유능함이 보상을 원하게 될 때 불행의 씨앗이 된다. 그러니 그것만 버릴 수 있다면, 그저 하나의 유능한 도구로써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동차나 책상과 같은 진짜 도구에도 공감을 할 수도 있다. 추억을 부여하고 무엇보다도 아끼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스스로 완벽한 도구가 되더라도 언제든 공감은 가능하다. 그러니 그저 도구로써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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