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이루다 2018. 4. 17. 08:42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에서 생겨난 사회현상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토리 세대' 라고 불리는 특정한 스타일의 삶을 사는 젊은이들이 대거 등장한 사건이다.

 

일본말인 사토리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대략 '득도' 정도의 말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토리 세대는 득도한 세대인 셈이다. 이 단어는 흔히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들으면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한다.

 

원래 득도라는 말은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을 때 쓰는 불교적 용어이다. 그런데 스님도 아닌 한참 젊은 나이의 사람들이 그런 칭호를 듣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스님과 같은 삶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소유로써 최소화 된 삶을 살아간다. 일은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기 위해서 한다그러니 힘들게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적당한 돈만 벌 수 있으면 된다.

 

집을 가지고 싶어 하지도 않고, 차를 소유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젊은이들의 단골 메뉴 중 하나인 해외여행과 같은 것들도 아예 전혀 하지 않는다. 연애, 결혼, 육아 등도 모두 하지 않는다. 초식남을 넘어서 절식남 수준으로 나타난다.

 

생활 반경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기껏해야 5km 안에 머문다. 직장도, 친구도, 평소 즐기는 것들도 모두 그 안에서 해결되도록 환경을 꾸민다. 친구를 만날 일도 별로 없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이나 집에서 보낸다.

 

이런 상황이니 그들을 사토리 세대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평생 절에서만 살면서 도를 닦는 스님들의 삶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사토리 세대가 나온 이유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소위 잃어버린 20, 이제는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일본이 장기 불황을 겪었다는 점이다

 

턱없이 좁아진 취직 시장에서는 오랫동안 경쟁이 치열했고, 그 경쟁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 중 일부가 좌절과 포기의 과정을 거쳐서 사토리 세대로 변화해 간 것이다. 더해서 일본 특유의 운명론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요소이기도 하다.

 

사토리 세대가 등장한 과정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정규직에 취직하기가 너무도 힘든 젊은이들이 아르바이트처럼 불안정하지만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했고, 하고 살다가 보니 살만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더해서 일본의 최저임금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꽤나 높은 편이라서 그런 삶이 유지될 수 있다.

 

당연히 문제는 있다. 아무리 최저임금이 높아도 그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토리 세대는 소유를 포기하게 된다. 타의적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최근 몇 년 전부터 연애, 결혼, 육아를 포기한 삼포 세대에서 추가로 집과 경력까지 포기하는 오포 세대가 나타나고 있느니 일본의 사토리 세대가 그저 남의 일만은 아닌 셈이다.

 

사실 사토리 세대를 단순한 시점에서 보면 경쟁에서 밀려서 찌그러진 채 살아가는, 일종의 실패자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단순히 판단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삶의 만족도는 그 여느 때 보다 높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본의 황금기였던 70년대를 살았던 젊은이들보다 더 높다.

 

이것은 목표를 향해 힘들게 가는 것보다 포기하고 현재를 즐기면서 사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토리 세대에 속한 젊은이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복잡해지고 만다.

 

요즘은 일본 경기가 많이 풀리면서 직업을 구하는 사람의 수보다 사람을 구하는 회사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누군가 취직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취직을 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하지만 사토리 세대에 속한 젊은이들은 여전히 정규직에 취직을 할 생각을 안 한다고 한다. 엄격한 조직생활이 싫고, 야근과 경쟁이 싫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해는 간다. 누가 조직생활을 좋아하고, 야근과 경쟁을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속에는 미묘한 물음표가 남는다. 과연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그러다 보니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은 사토리 세대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평생 마음 속에 지니고 사는 질문이다. 물론 한참 잘 살고 있을 때는 잠시 잊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평생 동안 잘살고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 놓은 이 질문이 스믈스믈 솟아 오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토리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젊은이들이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젊다는 것은 도전을 할 수 있는 시기이며, 삶을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는 시기라는 관점에서 나오는 의견일 것이다. 취직도, 결혼도, 자녀도 갖지 않는 젊은이들의 삶이 답답해서 하는 소리일 것이다.

 

또 하나의 의견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현재를 즐기면서 사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의견일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것은 삶이라는 것이 지금을 사는 과정이니 미래를 위해서 끝없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삶을 망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관점일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떠오르면 가능하면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토리 세대의 문제처럼 단순하게 그 답을 낼 수 없을 때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답은 낼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토리 세대를 현실에 안주하는 낙오자로써 정의하거나, 반대로 현재에 만족하고 사는 현실적이고 현명한 젊은이들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어떤 의견이 더 맞을까?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히 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답을 내야 한다면 오직 한가지뿐이다그것은 바로 그 어떤 종류의 답이 없다는 것이다. , 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이며,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낼 수 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움직여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가만히 있어야 할 때가 있다. 도망쳐야 할 때도 있고 맞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그냥 포기해야 할 때도 있으며 적극적으로 경쟁해서 이겨내야 할 때도 있다.

 

삶은 결코 한 가지 태도로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이다. 정말로 득도를 한 사람이거나 완전히 미친 사람일 것이다.

 

모든 것을 경쟁하고, 모든 것을 가만히 있고, 모든 것을 도망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이렇게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끝없이 변화하는 존재인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을 찾고 싶어한다.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해야 하는지를 묻고는 답을 찾고 싶어한다.

 

그 질문은 원래부터 끝없이 정답이 변하는 문제이다. 마치 지금 며칠몇 시인지 묻는 질문과 같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일 매 시간 변한다. 그럼에도 끝없이 정답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답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찾은 정답과 비교하고는 서로가 옳다고 싸운다.

 

왜 그럴까? 그 원인은 단순하다.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다.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 확신이 없으니까 그렇다. 뭔가 더 잘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그래서 잘살고 있을 때는 그런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다잘 살다가 갑자기 삶이 정체된 느낌이 들 때 생각난다.

 

그런 순간이 되면 불안하기 때문에 빨리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하고는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정답은 매 순간 변한다. 그러니 어떤 특정한 시기에 내린 답이 계속 유효한 답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냥 아무런 대책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없으니 매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일까?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커다란 흐름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나이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삶은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 살아야 할 때가 있고, 뒤로 물러서서 가진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 시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육체적 에너지가 넘치고 시간이라는 기회가 주어진 젊은 시절에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고, 반대로 힘도 떨어지고 죽을 때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늙은 시기엔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단순한 흐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통 젊은 시절을 적극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다. 하지만 나이를 먹은 후 가진 것에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은 정말로 상대적으로 무척 적다. 사실 사람들이 삶이 힘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물러날 때를 모르니까 그렇다.

 

그리고 사토리 세대는 너무 일찍 물러난 상태이다. 그것도 문제가 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한계 속도는 대략 100Km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속도에 맞춰서 운전을 한다. 하지만 가끔 그 속도를 훨씬 뛰어 넘어서 가는 사람들이 있다. 과속이며, 사고 유발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운전하는 사람들은 과속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욕한다. 위험하기도 하고 자신이 놀래서 그렇다. 그러면서 욕을 할 때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설명하려고 한다.

 

그 말을 언뜻 듣기엔 당연히 옳다.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자식이 금세라도 죽게 생겼을 때 앰블런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달리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할까?

 

애초에 규정속도는 누가 정한 것일까? 독일의 아우토반은 무제한 속도가 보장된 고속도로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교통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니 그 고속도로의 무제한 속도가 보장되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규정속도는 사람들이 정한 것이다. 어느 정도 근거는 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짧은 예를 통해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현명한 답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뭔가 하지 않고 사는 삶이라면, 그것이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할 수는 있지만 하지 않고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토리 세대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경쟁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다. 경쟁을 할 수 없기에 경쟁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삶의 태도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찾아야 한다면 바로 이것이 된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고 사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화를 낼 수 없어서 착한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낼 수 있지만 화를 내지 않고 사는 것이어야 한다. 경쟁에 밀려서 마음의 평화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 수도 있지만 마음의 평화를 선택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질 수 있지만 갖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갖지 못하니 갖지 않고 살면서 스스로를 합리화 하는 것인 그저 변명일 뿐이다. 사람은 원래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면 병이 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인해서 시속 200km로 달릴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타고난 능력들이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한 경우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처음부터 할 수 있기가 불가능한 사람들 말이다.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삶의 태도에 대한 두 번째 원칙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제대로 하고 사는 삶이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도 병이 나질 않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할 만큼 했는데도 갖지 못했을 때 그렇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면 비록 그것을 얻는데 실패를 했더라도 아쉬움 정도만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후회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그것을 갖기 위해서 충분한 노력을 하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정말로 그것을 갖지 못해서 불만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자신 이외의 문제에 불만을 터뜨리게 된다.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면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다.

 

제대로 노력하지 못한 일은 아쉬움을 넘어서 미련과 후회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후회를 없애기 위해서 결국 합리화를 해야 한다. 포도를 먹기 위해서는 나무를 올라야 하는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여우는 그저 그 포도가 신 것이 확실하다고 여기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고속도로는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달려야 한다. 하지만 시간을 다투는 앰블런스처럼 어쩔 수 없을 때는 시속 200km로 달릴 수도 있어야 한다. 시속 200km로 달리지 못하면서 100km를 지키고 사는 것은 그저 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슬프게도 사람은 자신이 갖고 싶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오히려 갖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현재의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사는 것도 일종의 요령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사토리 세대가 그런 모습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할 수 없으니 포기한 것이다. 또한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포기했기 때문에 당연히 내면에 깊은 상처가 생기게 된다.

 

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다그저 해볼 때까지 해보면 된다해봤는데 안되면 그때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이런 질문도 나올 수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해봤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힘들 것 같지만 생각보다 답은 단순하다.

 

시작을 해보면 된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그만큼 시작이 힘들다. 사토리 세대로 살던 누군가가 정장을 입고 정규직 면접을 보러 가는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시작하기 전에 실패한 남들을 바라보면서 괜히 했다가 실패할 것을 두려워한다. 또한 하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정말로 하지 못하는 것으로 확정될까봐 두려워서 물러선다.

 

그런데 시작해서라도 어디쯤까지 버텨야 할까? 새로 취직한 회사라면 며칠을 다녀봐야 해봤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각자가 이미 알고 있다. 그만두고 나서 마음에 남아서 자꾸 자신이 그만 둔 이유를 설명하고 싶고, 괜히 자꾸 그 일이 생각난다면 아닌 것이다. 그만 둔 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면 그때가 비로소 된 것이다.

  

이 시기는 누구에게는 하루, 누구에게는 10년이 될 수 있다. 그러니 각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것은 오직 자신만의 기준이다. 누군가 하루 10시간 공부를 한다고 해서 누구나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은 그저 하루 한 시간이 최선이다.

 

10시간을 공부하지 못할 바에는 한 시간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최초의 문제를 만들어 낸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마다 고유한 한계지점이 존재한다. 그러니 나는 나의 한계점으로 최선의 경계를 정하면 된다. 설령 그것이 남들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상관없다.

 

시도를 하고나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할 수 있는 삶, 그것을 통해 자신의 한계점을 정할 수 있는 삶,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삶, 이 세 가지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의 삶을 살든지 상관없이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신이 가진 능력치의 80% 정도만 써서 살아가는 것이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 능력의 80%만 발휘해도 관계를 맺는 것에 별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만나 살아갈 때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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