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결코 이타적일 수 없는 인간

아이루다 2018. 4. 10. 08:14

 

며칠 전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몇 해 전 이미 본 영화인데, 기회가 되어서 또 다시 보게 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은 '파이 이야기'이다. 인도의 한 소년이 태평양에 표류하면서 겪은 신비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며 개인적으로는 한번쯤 볼만한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다.

 

두 번째 봐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그사이 뭔가 변한 것인지 모르지만, 예전에 봤을 때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던 장면이 머리 속에 남았다.

 

그것은 바로 작은 구명정에 같이 탄 리차드 파커라는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호랑이에게 주인공인 파이가 물고기 먹이를 잡아서 주는 장면이었다.

 

평생 채식주의자로 살았기에 무엇인가를 죽인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해봤을 법한 주인공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같이 배에 타게 된, 그것도 호시탐탐 자신을 먹이로 노리고 있는 호랑이를 위해서 커다란 물고기를 잡아서 죽이는 경험을 한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물고기에게 미안하다고 외친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 도끼를 쥐고 파닥거리는 커다란 물고기의 머리를 내려친다. 이후 물고기는 배고픈 호랑이의 먹이가 된다.

 

이 장면에서 뻔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주는 생각이 떠올랐다.

 

파이는 그 순간에 호랑이를 위해 물고기를 죽였다. ,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생명의 목숨을 끊는 결정을 한 것이다이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여기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호랑이는 무척 배가 고파서 고통스럽다는 점이다그러니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그리고 호랑이의 배고픔은 파이에 대한 실제적인 위협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는 어쨌든지 호랑이는 파이의 자산이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같이 커온 아는 사이였다. 물론 그렇다고 둘이 친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 처음 만나게 되는 물고기보다는 더 친한 사이였다. 그러니 덜 친한 동물을 죽여서 더 친한 동물에게 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란 생각이다.

 

세 번째는 포유류와 어류 사이의 차이점이다. 포유류는 일단 많아야 두어 마리의 새끼를 낳지만 어류는 한번에 수천에서 수만 마리의 새끼를 낳는 존재이다. 또한 포유류는 어미가 젖을 먹어서 키우는 존재인 반면 어류는 대부분 외부 생식에 머무른다. 더해서 두뇌적 차이도 크고 상품적 가치도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러니 고등동물인 호랑이를 살리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하등동물인 물고기를 죽여서 주는 것은 당연하다.

 

네 번째 호랑이가 배가 고파서 죽게 되면 그것은 단순한 호랑이의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파이의 절대적 외로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이는 훗날 자신이 호랑이를 돌봄으로써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따라서 파이는 그 자신을 위해서 호랑이를 살려야 한다.

 

그럴듯한 네 가지 관점을 살펴보았지만 한번 생긴 의문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도대체 그 물고기는 왜 호랑이를 위해서 죽어야 했을까?

 

물고기를 먹는 주체를 주인공인 파이로 바꿔보자. 갑자기 의문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당연해진다인간은 먹어야 살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서 물고기를 잡아 먹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고 의문을 가질 일도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을 해보자. 파이의 엄마가 살아서 같이 있었다면 어떨까? 파이가 엄마를 위해서 물고기를 잡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 역시도 파이가 직접 물고기를 먹는 것과 거의 같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존이나 또 다른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물고기를 죽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호랑이처럼 인간이 아닌 동물을 위해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이상한 것인가? 이 의문은 꽤나 어려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

 

그저 호랑이를 오래 키워서 정든 개나 고양이로 바꾸면 되기 납득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반려동물들을 위해서 물고기를 잡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개나 고양이를 먹이기 위해서 물고기를 잡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그 존재가 바퀴벌레나 쥐라면 어떨까? 그러면 또 다시 의문이 생겨날 것이다. 왜 바퀴벌레나 쥐를 위해서 물고기가 죽어야 하는 것일까 라고 말이다.

 

이 차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부모나 자식, 반려 동물, 호랑이, , 바퀴벌레, 물고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분명히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해서 다른 존재의 삶이 또 다른 존재를 위해서 희생되는 당위성이 생겨난다.

 

그 기준점은 바로 파이의 감정이다좀 더 자세히 말하면, 다른 존재로 인해서 흔들리는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큰가 여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존재의 생존이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되거나 혹은 불행하지 않도록 해준다면 그렇지 못한 존재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 있다.

 

파이는 엄마를 위해서 물고기를 기쁜 마음으로 잡을 수 있다. 호랑이를 위해서는 슬퍼하면서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바퀴벌레나 쥐를 위해서는 잡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행복해지지도 않고 오히려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이는 바퀴벌레를 물고기의 먹이로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이 가진 이타심이 과연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파이가 자신도 먹을 것이 마땅치 않은 마당에 호랑이인 리차드 파커를 위해서 물고기를 잡아 먹이는 것은 매우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생존에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호랑이를 살리려는 마음만큼 이타적인 것이 있을까?

 

하지만 파이는 호랑이를 위해서 물고기를 잡은 것이 아니다. 호랑이를 잃었을 때 자신의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란 두려움을 막기 위해서 물고기를 잡은 것이다.

 


호랑이는 모르는 사람으로,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으로, 아는 사람은 가족으로 변해갈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점점 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지면서까지 자식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부모들의 모습까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이타심은 없다. 그저 자신의 행복에 대한 소중함과 불행을 피하고 싶은 두려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의 원래 자기 자신 밖에 없다. 감정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남의 감정은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결국 남의 감정이다. 남의 다리에 난 상처는 결국 남의 다리인 것이다. 감정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기에 그 누구도 타인의 위하는 마음이 존재할 수 없다. 어떤 결정을 하든지 모두 자신의 감정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남을 위해 죽는 것조차 그렇다.

 

명백하게 타인을 위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거기엔 오직 자신의 감정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 존재에게 자신의 감정을 던진 것이다. 그래서 그 상대에게 잘해주는 것이 기분이 좋다면 잘해줄 것이고, 기분이 나쁘다면 잘해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손톱만큼도 남을 위한 결정을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 결정한 것이며 이것이 우연히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살아가다가 보면 자주 헷갈려 한다. 그래서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서 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해준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상처를 입거나 원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행복했던 일을 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 대가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상처를 받게 된다. 준 것이 아깝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니 준 것을 바로 뺏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결국 말에 가시가 돋는다.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도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만들어 낸다. 사실 이것이 정말로 큰 문제이다. 분명히 오직 감정에 의해서 말하고 행동했지만 결국엔 모두 이성적으로 해석한다.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해서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나를 위해 물고기를 잡는 것은 정당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확대되면 결국 호랑이를 위해 물고기를 잡는 것도 정당화 된다.

 

삶은 처음부터 정당할 수 없는 과정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하는 과정이 어떻게 정당할 수 있겠는가? 각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숨은 무엇보다도 정당하겠지만, 그것이 객관적으로 옳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끝없이 정당성에 대한 객관적 근거가 떠오른다. 그래서 결국 갈등이 일어나고 각자의 정당성이 서로 강하게 충돌한다.

 

이것이 인간관계를 힘들게 만드는 가장 흔하고도 어려운 문제이다. 정당성을 가진 기대는 상처를 낳고, 상처는 실망을 낳으며, 실망은 정당성에 근거한 상처 입히는 말을 내뱉게 하고 결국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단절을 불러오게 된다.

 

상대가 준 만큼 돌려주지 않아서 거기에 따른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돌려받지 못할 것 같으면 더 이상 안주면 된다. 문제는 그 동안 줬던 것이 그리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억울한 만큼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러니 화가 난다.

 

 순간을 잘 넘겨야 한다.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상대를 화나게 할 필요도 없다원하는 것을 받지 못해서 화를 내기 시작하면 그저 재정립만 해서 적당히 유지될 수 있는 관계조차도 깨져 버리고 만다.

 

이것은 행복의 기회를 잃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저 그 자신을 위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 즉 이타적인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인식만 제대로 된다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함으로써 관계를 망치는, 그래서 스스로 불행해지길 선택하는 모습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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