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잃어버린 능력, 공감

아이루다 2018. 3. 20. 07:58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혹은 작은 규모로 , 셋이 모이는 경우도 있다. 남녀가 함께 모이기도 하고, 남자만 혹은 여자면 모이기도 한다모임 내의 구성원들 사이에 나이 차이가 많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행복한 자리는 또래의 사람들이 모이는 편이다. 그렇지 못하면 대화 주제가 한쪽으로 쏠려서 일부만 즐겁게 되기 때문이다.

 

수 많은 만남과 관계는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행복한 자리에는 즐거움과 재미가 있고 유쾌한 농담이 터져 나온다. 쉼 없는 말들이 오고 가며 커다란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그래서 행복한 자리이다. 그런 장소에 있을 때면 삶은 참 단순해진다. 맛난 것을 먹고, 흥미로운 얘기를 나누며 크게 웃으면 그것이 삶이 된다.

 

하지만 그런 행복한 자리는 결국 끝난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한 자리는 결국 지루한 자리로 바뀌고 나중엔 불행한 자리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해석도 있긴 하다행복한 것이 끝나야 불행한 것도 끝날 수 있다고 보노보노에 나온 야옹이 아저씨가 설명해주기도 했다.

 

크게 웃고 떠들고 나면 여운이 남는다. 여흥이라도 한다. 하지만 이 여흥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지고 사람들은 다시 차분함 속에 놓인다. 하지만 이런 차분함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크게 웃고 떠드는 동안 잊은 채 한쪽 구석에 처박아 뒀던 수 많은 현실 속 문제들이 바로 눈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번 크게 웃었던 기억으로 힘을 낸다. 그리고 또 다시 크게 웃을 수 있는 그날을 꿈꾸며 눈 앞에 놓인 문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실패도 많이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일수록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중요한 것은 보통 남들에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들은 경쟁자가 많다. 그러니 성공하는 사람 숫자보다 실패하는 숫자가 더 많다.

 

결국 성공한 사람들은 또 한번 크게 웃을 기회를 얻지만, 실패한 사람들은 웃기는커녕 울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만다. 그렇게 또 하나의 상처가 가슴 속에 새겨진다. 하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 패자의 상처를 바라봐 주지 않는다. 바라보면 같이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마음 속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희미해지긴 한다. 망각이 주는 힘이다. 하지만 그 상처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번이라도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다친 경험이 있으면 높은 곳에 올라갈 때마다 식은 땀이 나게 만든다. 마음의 상처도 그처럼 동작한다.

 

한번 실패한 기억은 이후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있어서 겁이 나게 만든다. 또한 누군가와의 경쟁에서 졌던 경험은 자신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부정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어쩔 수 없으니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런 흐름을 깨고 뭔가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할 수록 답답한 마음이 든다.

 

다행이 방법이 있다. 분명히 있다. 그것은 쉽기도 하고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저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바라봐주면 되기 때문에 방법 자체는 쉽지만, 바라봐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다른 사람의 숨겨진 상처를 이해하고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워낙 드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바라봐주는 능력은 원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사용하지 않은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거의 잊었다. 그래서 이제는 할 생각도 안 나고, 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는다.

 

바라봐 주지 않는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다.

 

넘어져서 다친 아이는 누군가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눈빛을 보면 그제서야 눈물을 터뜨린다. 그리고 상처가 치유가 된다. 하지만 누구도 바라봐주지 않아서 울지 못한 아이는 비록 그 상처가 다 낫더라도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생기게 된다. 더군다나 마음의 상처는 더 심각하게 남는다.

 

삶은 상처의 과정이다. 그런데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다. 그러니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쌓이기만 한다모두가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된 채 마주선다.

 

그러니 말은 좋게 나가질 않는다.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이다. 상처로 인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도 아니고, 쓰고 싶은 단어들 아닌 것들을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향해 던져 버린다. 그리고 한번 내뱉어진 말들은 주어 담을 수가 없다.

 

그 말들을 들은 사람들은 또 다시 상처를 입는다. 이렇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또 다시 자신을 상처입한 사람들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더욱 더 크게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상처는 끝없이 확장된다.

 

그러다 보니 작은 시비거리 하나로 시작한 싸움이 서로를 죽이고 싶다는 감정이 들 정도로 번져간다. 입 밖으로 나오는 나쁜 말들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어서 서로를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서로를 죽이고 싶어할 정도로 미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그저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아서 치유되지 못한 각자만의 상처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리 아파서 그랬던 것뿐이다.

 

그나마 크게 웃고 떠드는 시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가끔 그런 행복한 시간들이 찾아온다. 그러면 그날은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는 듯 멀쩡하게 군다. 착하게 군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금세 끝나고 끝나고 또 다시 상처투성이 자신으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함께 요란하게 떠들던 많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다. 즐거운 자리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지만, 우울한 자리엔 아무도 같이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가 상대의 상처를 깊은 공감으로 바라봐주면 끝날 것들이 무관심과 외면으로 인해서 끝나지 않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상처를 치유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는 처음부터 상처를 입지 않을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상처를 입지 않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하다. 인간의 운명의 끝이 바로 죽음이기에 그렇다. 죽음이 존재하는 한 상처는 반드시 생겨나기 마련이다. 죽음은 고통이며, 고통은 두려움이다. 그리고 두려움을 가진 존재는 두려움이 느껴질 때마다 상처를 입게 된다. 뭔가를 잘하지 못할 때, 인정받지 못할 때, 승부에서 졌을 때, 누군가 자신의 단점을 지적할 때마다 두려움이 느껴지면서 상처를 입는다.

 

잘못된 해결책을 손에 쥐고는 어떻게든 그것을 따라 해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저 얻은 것이라고는 관계의 단절과 알량한 자존심뿐이다.

 

원래 진짜 해결책은 단순했다. 서로 진심 어린 태도로 바라봐주면 된다. 진정한 공감을 느끼게 해주면 된다.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이해를 해주면 된다. 판단이 아닌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면 된다.

 


내가 아프듯이 너도 아프니까 말이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이해해 주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상처를 이해해주는 일이다. 상처의 크기를 재고는 내가 더 힘들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힘들구나 하고 이해해주는 것을 말한다.

 

내가 그렇듯이 너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상대에게 내 말이 옳다고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랬냐고 책망하는 것도 아니며, 어떻게 해야 그런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는지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같이 울어주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따지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해하고 꼭 안아주는 것을 말한다.

 

불만을 늘어 놓지만 사실은 이해하고 공감해달라는 의미이다. 아쉬움과 후회를 말하지만 사실은 이해하고 공감해달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설득하기 위해 각종 사실과 논리를 늘어놓지만 사실은 이해하고 공감해달라는 의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상처 주는 말을 내뱉지만 사실은 이해하고 공감해달라는 의미이다.

 

공감은 각자의 생명 정당성에 대한 타인의 인정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네가 사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다들 그것이 없어서 그리 힘들다.

 

그러니 인정받으려고 하고, 확인 받으려고 하고, 잘 나려고 한다. 삶의 정당성 그것 하나 때문에 그렇다.

 

그저 "미안해", "고마워", "힘들었지?", 이 세 마디면 모든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음을 모른 채 그렇게나 힘들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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