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무소유 이야기

아이루다 2018. 1. 4. 08:33

 

"욕망", 무엇인가 하고 싶거나 갖고 싶다고 느끼는 욕구라고 정의한다면 대충 그 의미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욕망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면 반드시 느끼는 것이며, 가능하면 채워야 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모든 욕망은 바로 살고자 하기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보면 인간의 욕망은 살고자 하는 목적 그 자체를 뛰어 넘은 지 한참이 지난 듯 보인다. , 지금 시대의 욕망은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행복한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원래는 욕망이 생기면 그것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던 삶에서, 이제는 행복하고 싶으니 의지적으로 욕망을 만들어 내고는 그것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는 형태로 거의 영구히 바뀌었다.

 

원래 행복은 생존 활동을 제대로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이었다.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으면 행복했고, 졸릴 때 자면 행복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것들은 너무 당연한 것들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존 활동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될 것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을 욕망화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충족시킬 때마다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각자 어떤 행동이나 사물이 자신의 생존 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될수록 그것을 하고 싶다고 느끼고, 갖고 싶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 대상의 필요성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렬한 욕망의 대상이 되고, 그 욕망을 채우면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수천 만원을 하는 옷을 입으면 생존확률이 높아질까? 물론 조금은 높아질지도 모른다. 적어도 옷이 튼튼하긴 할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높아진 생존확률이 사람에게 우연히 찾아오는 불운에 비해서 과연 얼마나 크게 작용할 수 있을까? 비싼 옷을 입고, 비싼 밥을 먹고 산다고 해서 번개에 맞을 확률이 줄어들지는 않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끝없이 생존 가능성을 아주 조금이라도 높여줄 것같은 것들을 보면, 그것을 그토록 욕망한다. 그리고 그것을 채운다. 그리고 각자 그것이 가장 좋은 대비책이라고 주장한다. 가치라고 말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능력이 충분히 된다면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얻어진 행복들은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집안에 있는 어떤 물건들을 보면 반 정도는 거의 쓰지 않는 물건들이다. , 매일 쓰면서 실제로 필요한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행복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한 가지 문제가 커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그것들로 인해서 사실상 불필요한 책임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낡고 고장 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처리하는 것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돈도 들 수 있고, 때로는 귀찮기도 하다. 그러니 가진 것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오히려 행복을 갉아 먹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어서 집을 한 채 가지는 것은 괜찮지만, 집을 여러 채 갖게 되면 점점 더 집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돈도 더 들고 신경도 쓰이게 된다. 각각의 집을 전세나 월세로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엔 자신의 집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더 많은 집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집은 돈이라도 벌 수 있으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집안에 있는, 사실상 거의 쓰지 않는 많은 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심지어 버리는 것도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도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를 산다.

 

그나마 하는 것들은 경험이기에 남아도 그저 머리 속의 기억으로만 남는다. 하지만 사는 것은 분명히 실체를 남긴다. 그래서 먹어서 없애는 것 말고는 어떤 식으로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차를 사는 것에서 차를 사는 일 그 자체는 가장 쉬운 일이 된다. 차를 사는 것과 동시에 매년 차와 관련되어서 들어가는 돈이 생겨나고, 주차 공간이 필요하며, 때에 따라 꾸준히 차를 관리해줘야 한다. 세차도 해야 하고, 검사도 받아야 하고, 고장이 나면 수리도 한다. 운이 없어서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크게 다치거나 혹은 감방에 들어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를 하나 소유한다는 것은 행복을 얻는 과정일수도 있지만, 어쩌면 스스로 불행함을 불러오는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골에 100평의 전원주택을 지어놓고 관리가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 어떤 귀촌인처럼 말이다.

 

이런 소유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잘 지적해준 분이 바로 돌아가신 법정스님이다. 그 분은 무소유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소유를 통해 삶이 종속될 수 있는지를 짧은 글귀로도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개념은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삶에 필수적인 것만 가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앞에서 말한, 즉 생존 활동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 정도만 챙기고 살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이외의 나머지는 모두 행복 그 자체가 욕망화 되어서, 행복하고 싶어서 스스로 만들어 낸 가짜 욕망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시고 계신 것이다.

 

물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좋다. 하지만 행복이 욕망화 되는 순간, 인간의 욕망은 무한대로 뻗어나가게 된다. 그 누가 자신이 경험하는 행복에 100% 만족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아름답게 태어난 여자도 자신의 얼굴이나 몸에 한두 개쯤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사람은 반드시 늙기 때문에 원래는 없었더라도 생기기 마련이다. 오히려 완벽했을 수록 더욱 더 생기게 될 것이다.

 

세계 제일의 부자도, 가장 힘이 센 사람도, 천재적 두뇌를 타고난 사람도 모두 마찬가지다.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경험하는 행복에 대해서 100%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행복 자체가 욕망화 되는 순간 오직 완벽히 행복해져야만 그것이 온전히 충족된 상태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설령 잠시는 그럴 수 있지만, 오래지 않아서 권태와 지겨움이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진짜 본질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도 행복 자체를 욕망화 시키고는 100% 채우기 위해서 달린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것을 가지려고 애쓴다. 자신이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쥐꼬리만큼이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욕망화 시키고 실현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고, 갖는 과정 중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부작용을 '걱정' 이란 명목으로 들고 산다.

 

집이 생기면 집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차가 생기면 차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여행을 가면 여행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

 

무엇이라도 하나가 생기면 그것과 연관된 수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을 모두 각자가 또 다른 걱정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걱정이 많으니 불행하다고 느끼고, 불행하다고 느끼니 다시 행복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또 다른 욕망을 만들어 내고는, 그것을 통해 또 뭔가를 가진다. 그러면 또 다시 걱정이 생기고, 또 다시 무엇인가를 가져야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무한대의 고리는 죽기 전까지 끝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직접 몸으로 하는 것들은 줄어들기에 어쩔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모두 돈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니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돈이 소중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끝없이 쳇바퀴처럼 도는 삶의 부조리를 끊어 낼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돈보다는 다른 어떤 더 나은 것들을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

 

쉽지는 않아 보인다.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기에 도대체 참고할만한 예를 찾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것을 어느 시점에 갑자기 바꾸기란 정말로 힘들 것이다. 그러니 오랜 시간에 걸쳐서 천천히 바꿔야 한다.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은 바로 그것이 무엇이든 처음부터 부풀리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엔 단돈 천원에 행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행복을 얻으려면 백만 원도 부족할지도 모른다. 물론 물가가 올라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많이 높아졌다.

 

동네 문방구 앞에서 팔던 떡볶이를 먹는 행복을 얻으려면 적어도 소고기 스테이크 정도는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더 그럴 수 있다. 근처 공원에 놀러만 가도 느낄 수 있었던 행복이 이제는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가야만 겨우 얻을 수 있게 바뀌었다.

 

도대체 언제 천원에서 백만 원으로, 떡볶이에서 소고기 스테이크로 바뀐 것일까? 물론 중간 과정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천천히 점점 더 비싸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백만 원과 소고기 스테이크에 도착한 후에는 다시는 천원과 떡볶이로 되돌아 갈 수가 없다. 이미 지나온 과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퇴보이면서 패배가 되기 때문이다.

 

좁은 집에서 넓은 집으로는 가더라도, 넓은 집에 살다가 좁은 집으로 가면 그 자체가 불행해지는 것이 바로 사람이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늦추거나 멈춰야 한다. 물론 월급은 더 높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소비 자체는 멈춰야 한다. 할 수 있다고 계속 했다가는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올라가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설령 올라가더라도 언제라도 되돌아 올 수 있음을 알 수만 있다면, 아니 되돌아오는 것이 결코 퇴보나 패배가 아닌 것으로 인식할 수만 있다면, 올라갈 수 있을 때 올라가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올라갈 수 있음에도 괜한 걱정에 올라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사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내려올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올라가서는 안 된다. 이미 한번이라도 올라가게 되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올라갔다고 해도,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서서히 내려 올 준비를 할 수도 있다. 그 과정은 힘들겠지만, 그렇게 한번 올라갔다가 내려온 경험을 했다면, 다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삶의 과정 중에서 어떤 식으로든 중간 점검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동네 앞 문방구에 모여서 떡볶이를 먹으면서 행복해 할 수 있다. 근처 공원에 가서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생각보다 무엇을 먹고 어디에 있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닌, 그런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내느냐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었다. 사람이 중요하지 조건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었다. 그리고는 계속 조건만 더욱 더 높이려고 노력한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여긴다.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것들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것도 역시나 결국엔 누군가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일 뿐이란 점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을 왜 사진으로만 하려고 할까?

 

그냥 만나서 하면 된다. 그것이 훨씬 더 직접적이면서 강렬하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것만큼의 큰 행복도 없다. 하지만 더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를 최대한 더 벌리려고 애쓴다. 자신만이 더 잘나고, 남다른 것을 경험할 수 있고, 자신만이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진 거리를 재면서 만족해 한다.

 

하지만 그 거리를 벌리는 노력 조차도 결국 그저 두려움을 처리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임을 그 스스로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매일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음을 까맣게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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