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걸리는 것들

아이루다 2018. 4. 5. 08:02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늘 언제나 무엇인가에 걸리는 과정이다.

 

걸려서 생각지도 못하게 어딘가를 함께 가기도 하고, 걸려서 누군가에게 거추장스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걸려서 힘을 합쳐서 무엇인가를 해내기도 하고, 걸려서 넘어지기도 한다.


비난에 걸리기도 하고, 칭찬에 걸리기도 하며, 판단에 걸리고, 평가에 걸린다. 지나가는 말에 걸리고, 웃자고 한 말에 걸리며,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 말에 걸리기도 한다.

  

이렇듯 걸린다는 것은 좋은 일들도 있고 나쁜 일들도 있다. 그런데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나게 되면, 그러니까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주로 하고 살아야 할 때가 되면 사는 것이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좀 덜 걸렸으면, 왜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나를 걸어대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러니 제발 나 좀 놔달라고 소리지르고 싶다. 심한 경우 사방으로 걸려서 옴짝달싹할 수도 없다. 좌절하고, 지치고, 억울하고, 불안하며 결국 우울해진다. 그리고도 외롭다.

 

결국 사방에서 나를 걸고 있는 것들을 하나라도 잘라내고 싶다. 나를 둘러싼 촘촘하게 얽힌 그물과도 같은 것들이 숨을 막히게 하여 숨쉬고 사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그것들은 걸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었음을 말이다.

 


내 마음 속에는 밖을 향해 수 없이 많은 실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그 수 많은 실들 끝에는 모두 뾰쪽하고 구부러진 낚시 바늘과 같은 것들이 달려있다.

 

나는 그것들을 늘어 놓은 채 산 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 낙엽에 걸리고, 풀에 걸리고, 나무 뿌리에 걸리고, 부러진 나뭇가지에 걸리고, 누군가 버려 놓은 과자 봉지에 걸린다.

 

하나씩 둘씩 걸리다가 보니 점점 더 움직일 때마다 힘이 들고 운신의 폭이 좁아짐을 느낀다. 그럼에도 앞으로 가야 하니 끝없이 움직인다그러다가 결국 언젠가는 꼼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에 걸려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 움직이지 못하니 두렵고 비명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나 좀 놔달라고 소리지르고 화를 내고 싶다.

 

그렇지만 모든 실들의 시작점은 바로 내 마음이다. 거기에 걸려 있는 나뭇가지 문제도 아니고, 풀 뿌리의 문제도 아니며, 누군가 버린 쓰레기들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나 스스로 걸고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살아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접한다. 직접 보기도 하고, TV를 통해 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통해 듣기도 한다.

 

그때마다 마음 속에서 낚시 바늘이 연결되어 있는 질긴 실이 생겨나서 밖으로 늘어진다. 그리고는 그것을 걸어 둔다. 특히 자신을 조금이라도 덜 불안하게 해줄 것 같으면 더욱 더 질기고 튼튼한 실을 쓴다.

 

그렇게 끝없이 사람들을 판단한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틀렸다. 누구는 그렇게 살면 안되고, 누구는 마음에 든다. 누구는 아무 것도 아니고 누구는 소중하다. 누구는 싫고 누구는 좋다. 누구는 별 것 없고, 누구는 중요하다.

 

어떤 판단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 속에서 실이 나와서 그것에 건다. 그리고는 점점 더 자신을 고정시킨다.

 

하지만 그 실이 모두 자신의 불안함에서 자신의 두려움에서 만들어졌음을 알지 못한다. 불안할수록, 두려울수록 실이 두꺼워져서 자신이 더욱 더 단단하게 고정되길 바란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확신 있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더 질긴 실을 걸고,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도 더 강한 실을 건다.

 

하지만 확신이란 말 자체가 바로 수 많은 질긴 실들의 집합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확신 있어 보이는 사람들은 결국 두려움으로 인해서 자신보다 더 많은 실을 주변에 걸어 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선과 악을 결정짓고 싶어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행위를 끝없이 평가하려고 애쓴다. 그래야 혼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의 옳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의 삶의 정당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평생 동안 삶의 정당성을 찾아 헤맨다. 단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삶의 정당성은 주로 타인으로부터 받는 인정에 근거한다. ,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 받을수록 조금이라도 더 정당한 삶이 된다. 존재해도 되는 삶이 된다. 존재하는 것이 나은 삶이 된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그만큼의 실을 뽑아내어서 걸어둬야 한다. 그래서 나 자신의 정당성이 결국 수 많은 사람들의 평가에 걸려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 역시도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건 것이다. 그리고 평생 끊어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서서히 나이를 먹어간다늙어갈수록 점점 더 실의 개수는 많아져서 아예 한발자국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고정되어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손끝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오면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삶은 무조건 이렇게만 흘러가야 하는 것일까? 다행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걸려 있다고 여긴 모든 실이 사실은 스스로 걸고 있었다는 자각이 이뤄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반대로 스스로 실을 끊어 낼 수 있다.

 

아니 사실 이 실은 처음부터 가짜였다. 너무도 단단해서 절대로 끊어질 것 같지 않았던 실은 그저 두려움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그러니 두려움을 거두면 실은 저절로 사라진다.

 

여기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도대체 두려움은 어떻게 거둘 수 있을까?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다양한 방법이 알려져 있긴 하다. 하지만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두려움을, 즉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나마 대안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적극적으로 두려움에 대처해가는 삶이다.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삶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두려움을 줄여준다.

 

그래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은 덜 고정되어 있다다른 사람들보다 마음 속에서 뻗어 나온 실의 숫자가 확연하게 적기 때문이다. 그들은 끝없이 움직이면서 이미 생겨난 실 조차도 줄여간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열정과 에너지 자체도 걸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열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고 싶은 욕구가 사실은 두려움을 줄이려고 하는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면 그만큼 단단히 고정되는 것도 드물다. 누구나 그런 것에 단단하게 걸린 삶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 동안 단 한번의 자각도 이뤼질 수 없다.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바라 볼 기회가 없다. 오직 실패하고 불행한 사람만이 삶을 되돌아 볼 기회를 얻는다. 철학자들이 불행한 삶을 사는 이유이다.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상관없이 결국 자각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걸린 것이 아니라 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 만으로도 삶은 거대한 변화를 겪을 수 있다.

 

매일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말은 모두 실을 만들고 거는 작업이다. 아무리 정당하고, 아무리 의미가 있고, 아무리 확실히 옳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그저 두려움에 생겨나는 실일 뿐이다.

 

자신이 하는 거의 모든 말들은 그저 자신의 옳음을 증명 받고 싶어서 하는 말임을 자각하고 그것이 결국 더 많은 실을 만들어 내고, 그래서 자신을 더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면,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갈 수 있다.

 

그것을 자각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정말로 커다란 차이이다.

 

인간은 누구도 옳지 못한다. 인간은 그저 생존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살고 싶으니 정당하고 싶은 것뿐이다. 원래부터 자연엔 선과 악이 없다. 정의도 없다. 옳고 그름도 없다. 도덕도 없다.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실의 원재료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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