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두려움의 다른 표현들

아이루다 2017. 12. 18. 09:14

 

사람들이 쓰는 단어들 중에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주는 것들이 있다. 아주 쉬운 예로는 색을 뜻하는 단어들이 그런데, 빨갛다, 붉다, 발갛다 등등은 모두 같은 색을 의미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준다.

 

그나마 이런 말들은 각각 가지고 있는 느낌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다르게 쓰기 때문에 가능하면 다양할수록 더욱 더 좋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단어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느낀 어떤 감정을 순화하려고 하거나 좋은 쪽으로 치장하려고 하는 목적으로 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연민' 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동정' 이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가능하다.

 

사실 연민이나 동정은 거의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동정보다는 연민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지적했듯이 연민이 동정에 비해서 조금 더 나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정을 느끼기보다는 연민을 느끼는 자신이 좀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감정은 동일한 이유로 느껴진다. 그저 상대가 측은하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그래도 이 정도의 혼용은 괜찮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단어를 오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한 커다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 자신도 자신이 선택한 단어에 속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감정이입'을 한 것을 '공감' 이라고 표현한 경우이다. 감정이입과 동감은 너무도 다른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공감으로 표현한다. 비슷한 것으로 '반응' '감응' 이라고 쓰기도 한다. 감정적인 것을 감성적이라고 쓰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감정이입, 반응, 감정 보다는 공감, 감응, 감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

 

같은 이유로 세뇌보다는 믿음을, 고집보다는 신념을, 복종보다는 충성을, 우유부단함을 신중함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물론 사실 그것을 정확히 어떤 단어로 표현하느냐 여부는 정확히 정할 수는 없다. 표현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며, 듣는 사람도 다르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점은 바로 사람은 누구나 남이 하는 것은 주로 불륜이고, 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잘못 사용하는 공통된 단어가 바로 두려움이다.

 

어떤 면에서 두려움이란 단어는 사람들이 가장 쓰기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다들 비겁하다든가 혹은 겁쟁이란 말을 듣는 것을 정말로 싫어한다. 하지만 비겁하다는 말이나 겁쟁이란 평가를 듣는 것을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즉 비겁하거나 겁을 먹었다는 말은 어떤 식으로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이런 이유로 인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두려움의 반대인 용기의 가치는 언제나 늘 최고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인간이 그 자신을 용기 있는 존재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정말로 두려움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평소에 두려움이란 단어를 쓰는 것을 최소화 시킴으로써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듯 여기고 싶어한다. 그래서 두려움은 끝없이 다른 단어로 치환되어서 사용된다.

 

두려움이 다른 단어로 표현되는 가장 흔한 예는 바로 분노이다. , 원래 누군가 화가 났다고 말을 했다면, 그것은 자신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식으로 두려움이 화로 표현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문명이다. 인간은 거의 대부분 문명 속에서 보호를 받기 때문에 두려움을 화로 표현하는 것에 별다른 무리가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존재에게 이유 없이 맞게 되면 화를 내게 된다. 그것이 몹시 부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굶주린 곰에게 맞고 심지어 먹힐 위기에 처하면 부당함은 온데간데 없어진다. 그때는 오직 커다랗고 날카로운 곰의 앞발로부터 오는 공포와 두려움만이 존재한다. , 맞는 수준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데도 화는 전혀 나지 않고 죽을 듯이 두렵기만 하다.

 

분노는 두려움을 느낀 후 그것을 통할만한 상대에게 그 두려움을 재해석해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분노 자체가 두려움은 아니지만, 모든 분노의 원인은 바로 두려움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겁이 나서 화를 내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화가 났다고만 표현할 뿐, 겁을 집어 먹었다 라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분노와 비슷한 표현으로는, 짜증이나 신경질 등이 있다. 이런 표현들은 비록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것을 상대에게조차 쉽게 표현하기 힘든 상황일 때 쓴다. , 지나가던 새가 싼 똥을 맞게 되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짜증이나 신경질이 날 가능성이 높다. 새는 이미 멀어져서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는 두 번째 유형은 바로 흥분이나 짜릿함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두려움을 좀 덜 실체적으로 느낄 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 현실로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두려움이 바로 흥분이나 짜릿함이란 감정의 본질이다.

 

언제라도 잘릴지 모를 밧줄을 타고 절벽을 오르는 일은 결코 흥분감이나 짜릿함을 안겨주지 못한다. 그것은 순수하게 두려움만을 느낀다. 하지만 절대로 끊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밧줄을 타고 절벽을 오를 때는 흥분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두려운 상황을 벗어나는 순간에는 순간적으로 흥분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일단 적어도 안전해졌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이것을 착각하고는 계속 밧줄을 타고 오르는 일을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믿었던 밧줄이 끊길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순간, 흥분이나 짜릿함은 금세 죽음의 공포로 변하게 된다. 그나마 이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은, 평소에 그런 짓을 하다가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음을 생각해본 경험일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생각해봤던 사람은 적어도 추하지 않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오랜 경험을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신출내기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두려움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는 세 번째는 냉소적이거나 혹은 무관심함이다. 이것은 과거의 있었던 두려움의 경험을 기억하고는 미리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반응들이다. 그래서 이것이 나름 현명한 것도 같긴 하지만, 문제는 거의 모든 새로운 시도조차도 다 막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과 거리를 둠으로써 아예 처음부터 두려움을 느낄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위험한 놀이기구를 타는 것이 두려움을 자극시킬 수 있으니, 아예 놀이기구 자체에 냉담해지거나 혹은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흥분이나 짜릿함은 바로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진짜로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안전 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승부에서 지고 싶지 않으면, 승부를 겨루지 않으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것들과 비슷한 다른 표현으로는 비관적인 것과 회의적인 것들이 있다. 과거에 경험한 두려움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기에 미리 부정적으로 대응해 나가는 것이다.

 

두려움을 대체해서 표현하는 네 번째 방법은 바로 낙관적이거나 혹은 희망이란 단어이다. 사실 이런 긍정적인 단어가 왜 두려움의 대체 표현인지 혼란스럽기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인 것,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는 것, 그 모두가 그저 두려움을 최대한 줄여서 보고자 하는 노력 중 하나이다.

 

, 두려움을 크게 부풀려서 보는 것이 바로 비관적인 태도이고, 두려움을 최대한 줄여서 보려고 하는 것이 바로 긍정적인 태도가 되는 것이다. 이 둘은 단순한 태도의 문제일 뿐, 전혀 그 원리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섯 번째로, 안전함이나 평온함 등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표현하는 다른 단어들이다. , 사람들이 지금 마음이 평온해 라는 표현을 했다면, 그것은 지금 별다른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두려움이란 단어를 써서 그 상태를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같은 의미이지만,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여섯 번째로, 기쁨과 환희 등은 자신이 가진 두려움이 줄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두려움이 줄어들 때 그런 감정을 느낀다. 들어가고 싶은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큰 돈을 벌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졌을 때 그런 감정을 느낀다.

 

원래 인간이 느끼는 모든 욕망은 바로 두려움을 줄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먹고 싶은 욕망은 배고픔의 두려움을 줄어준다. 큰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은 돈을 벌어야 더 안전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고 싶은 욕망은 자신이 가진 지식적 경험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목적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 잘 모를 때 더 두렵기 때문에 지식의 축적과 다양한 경험을 쌓는 일은 두려움을 줄여주는데 있어서 아주 큰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 여행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면서도 두려움을 줄여 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기에 특히나 여자들이 더 많이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두려움을 줄일 수 있는 추가적인 능력을 얻었거나, 가능성이 생겼거나, 그렇다고 믿어지게 되는 일을 해내게 되면 커다란 기쁨을 얻고 환희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기쁨의 크기와 환희의 강도는 바로 줄어든 두려움의 크기 만큼이 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기쁨이나 환희라고 표현하지, 두려움을 줄였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예 그것이 두려움이 줄었기 때문에 그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 자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나 긍정적인 감정들에서 두려움의 존재는 영구적으로 퇴출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원론적인 감정인 동시에, 가장 느끼고 싶지 않는 감정 중 하나이다. 그래서 문명 속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사람들은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움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들이 아예 두려움 자체를 느끼지 않는다고 믿기까지 한다.

 

그러니 화가 나도 그것이 두려움인지, 짜릿함을 느낄 때도 그것이 두려움인지,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인 것들이 두려움과 관련된 것들인지 스스로 인식할 방법이 없다. 안전함을 느끼거나 기쁨과 희망을 말할 때도 거기에 두려움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두려움이 없다면 처음부터 존재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무 두렵기 때문에 두려움 자체를 입에 담지도 않고, 아예 없는 것 취급을 하려고 한다.

 

그러니 비겁하다거나 겁쟁이란 평가를 받게 되면 그렇게 기분 나빠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용감해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두려움은 계속 끝없이 잊혀지고 수 많은 다른 표현들로 표현되고 만다. 단 한차례의 공격으로 인간의 목숨을 끊어 놓을 수 있는 곰, 사자, 호랑이 등의 맹수들은 이제 모두 동물원 속에서 귀엽고 친근한 존재들이 되었다.

 


배를 타거나, 산에 오르거나, 사냥을 하는 그 모든 생존 행위들은 이제 모두 취미 생활이나 여흥거리로 전락했다. 이런 식으로 두려웠던 것들이 재미나 흥미로운 것들로 변하면서 결국 이런 원리로 두려움은 인간 세상에서 거의 퇴출되고 말았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을 기억한다. 아니 두려움은 애써 잊었지만,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또 다른 단어를 분명히 기억하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일곱 번째인 용기이다.

 

용기야 말로 인간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인간이 용기의 가치를 잊지 않는 한, 두려움은 단순히 잊혀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용기라는 말 자체가 바로 두려움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로봇이 불길이 타오르는 통로를 뚫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용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용기가 있을 수 있을까?

 

오직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드는 소방관만이 용기가 있는 것이다. 그 소방관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으로 가득할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한 책임감과 불길 속에 더 큰 두려움에 떨고 있을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의미 있다고 믿는 그 모든 것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로봇은 인간이 주장하고 있는 가치를 가질 수 없으며, 감정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도 사람들은 두려움을 잊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두려움을 생각하면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절대로 극복할 수 없으니 그저 잊고 싶어한다. 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로봇과 인간을 구분하면서도, 자신은 로봇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는 오직 좋은 감정만을 느끼는 존재이고 싶어한다.

 

아마도 이 글을 읽은 후에는 자신은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게 두려움을 아는 존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호랑이나 곰이 무척 위험한 동물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두려움이 많고 비겁한 존재라고 인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 것이다. 자신이 원래 겁쟁이라는 것을 그저 아는 것과 깊이 인정하는 것은 무척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말로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그저 자신의 비겁함에 대해서 충분히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그것을 충분히 생각해본 사람은 두려움이 얼마나 깊은 지, 그것을 왜 극복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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