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욕망의 이유

아이루다 2017. 11. 27. 08:57

 

사람들은 누구나 불행하길 원하지 않는다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능하다면 최대한 행복하길 원한다. 그나마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서 어떤 한계점을 가진다면, 혹시라도 너무 과하게 행복했다가는 미래에 큰 불행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경험적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제외하고라면, 사람은 누구나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것이 쉽게 이뤄지지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행복은 고사하고 불행의 늪에 빠져서 허덕이는 사람들도 꽤나 많은 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쩌면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누가 그것을 얻길 원하겠는가?

 

그러니 행복하게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많이 행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불행하게 살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 적어도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불행은 어떻게 피해야 할까? 그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왜 불행한지를 알아야겠다불행의 진짜 원인을 알아야 해결을 할 시도라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질문을 던져본다. 사람들은 왜 불행할까?

 

그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불행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고통 때문이다. 몸이 아파서 불행할 때, 돈이 없어서 불행할 때, 남에게 사기를 당해서 불행할 ,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져서 불행할 때, 중요한 시험을 망쳐서 불행할 때,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경험한다.

 

이 고통은 육체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 모두에서 나타난다또한 현재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미래에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통은 삶의 과정 중에서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오늘 아침에 멀쩡하게 집을 나선 사람이 저녁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이 흐름을 조금 정리해보자.

 

고통은 크게 얼마나 실제적이냐에 따라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시점을 기준으로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고통으로 나눌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분류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 육체적 고통은 주로 현재 시점이며, 정신적 고통은 주로 미래의 고통이다. 이것은 당연하다. 당장 아플 때가 육체적 고통이고, 미래에 아플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배가 고플 때는 육체적 고통이 느껴지고, 회사에서 잘려서 통장의 잔고가 비어갈 때는 당장 먹을 것은 있지만, 미래가 걱정되기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결국 어떤 형태이든 어떤 시점이든 상관없이 불행 그 자체가 바로 고통과 그것을 예상하는 두려움에서 온다는 사실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긴 하다. 몸이 아픈 것을 제외하고 삶의 과정 중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고통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배고픔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추위나 더위와 같은 고통이다.

 

그런데 배고픔의 고통은 먹을 것만 충분하면 해결이 되고, 추위나 더위와 같은 고통은 난방이 되는 집만 있어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아프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얼어 죽을 정도로 춥지만 않다면, 삶의 과정 속에서 정말로 견디기 힘든 고통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 조건은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하지 않아야 맞다. 운이 조금 좋다면 행복해야 옳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불행할 때는 주로 고통이나 두려움과 같은 깊은 감정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가벼운 감정들인 짜증, , 귀찮음, 신경질, 질투, 열등감,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 수준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두려움이 훨씬 약해진 상태에 놓여 있다.

 

, 불행하긴 하지만, 그 불행이 심각한 수준의 불행은 아닌 셈이다. 그래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까지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살아갈 만 하다. 가끔 짜증도 나고 가끔 귀찮고, 가끔 질투도 느끼겠지만, 삶은 좋은 것들도 많기 때문에 충분히 감당할 만 하다. 그럼에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행한 사람들이 꽤나 된다. 그래서 자살을 생각해본 사람들도 꽤나 되는 편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는 진짜로 그것을 시도하기도 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될까? 왜 견딜만한데도 견디지 못할까? 이상하지만 그 답은 바로 자신이 놓여있는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다. , 아이러니 하게도 고통이나 두려움을 줄이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게 되고 만다.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한 상태에 놓이면, 무엇을 하려고 할까? 이 질문은 다시 하면, 사람들은 고통의 상태에 놓이거나 두려움을 느낄 때 무엇을 하려고 할까?

 

답은 지극히 단순하다불행, 고통, 두려움 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이 설명을 제대로 이해 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기 싶어서 욕망을 가진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행함으로 벗어나고 싶기에 결국 욕망으로 가지게 된다.

 

그래서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커지고 싶어하고, 얼굴이 못생긴 사람은 예뻐지고 싶어한다. 돈이 부족한 사람은 돈을 가지고 싶어하고, 여행을 충분히 가보지 못한 사람은 여행을 가고 싶어한다. 심지어 TV 드라마를 보고 싶다는 욕망도 결국 자신의 불행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생겨난다.

 

사람들은 행복을 인간의 본질로 여기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사람들의 막연한 바램일 뿐이다.

 

사람들의 믿음과 달리 인간의 본질은 행복이 아닌 불행이다. , 고통이며 두려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일 때마다 행복을 경험한다. 그리고 각자가 가진 두려움의 종류는 모두 다르다. 여자는 폭력을 두려워하고, 남자는 무리에서 버림받음을 두려워한다. 어떤 이는 바퀴벌레를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비둘기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의 두려움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그때 그것을 자신이 좋아한다고 느낀다. 행복하다고 느낀다.


사람들마다 행복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한 이유도 바로 욕망의 원인 자체가 각자마다의 부족함 혹은 두려움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정말로 행복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한 사람이 행복한 일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행복해야 한다. 또한 일정한 조건이 되면 행복한 상태가 끝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행복한 것은 평생 행복해야 맞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사람마다 행복은 모두 천차만별이며 또한 아무리 강렬한 행복이라고 해도 1년만 지나면 그 기억조차 그리 잘 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좋아하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고 만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욕망할 수 밖에 없어서 그렇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자신이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을 욕망하고 살겠는가?

 

또한 어느 시점엔 죽을 듯이 욕망했더라도 그 후로 충분히 갖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이 상태를 사람들은 지겨움이나 권태라고 칭한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행복이라면 지루함과 권태는 결코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 오늘 행복했던 일이 내일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일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아무리 죽고 못살던 연인들도 10년만 지나면 전혀 다른 관계로 변해버리고 만다.

 

이런 현상들이 바로 인간의 본질은 행복이 아닌 부족함에서 오는 고통과 두려움이란 명확한 증거가 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반드시 고통이 찾아온다. 하지만 결코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 고통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행복은 열심히 노력을 해야만 인위적으로 생겨난다.

 

이런 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그냥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삶 그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된다.

 

왜냐하면 더 이상 세상을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수동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일단 어떤 욕망을 갖고, 그것을 채우려고 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 끝없이 욕망을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한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행복하고 싶다는 것 자체가 욕망이 되어 버리는 현상이다.

 

행복이 욕망을 채우면서 생겨나는데, 행복 그 자체가 욕망이 되면 도대체 채울 방법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원래 욕망은 그것을 일으킨 주체를 만족시켜야 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싶으면 영화를 봐야 한다. 그렇다면 행복하고 싶은 욕망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

 

바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행복해야 할까딱히 욕망도 없는데 행복을 얻을 방법이 없다이때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복사해오는 것이다.

 

이때 문제는 다른 사람의 욕망은 그저 다른 사람의 부족함으로 인해 발생되었다는 점이다. 통장에 돈을 모으는 행복을 가진 사람을 복사해서 자신도 통장을 만들고 돈을 모아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 자신은 돈이 별로 아쉽지 않기 때문이다. 추운 날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군고구마를 먹는 사람을 흉내 내어서 먹어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 이미 훨씬 더 맛있는 스테이크로 배를 채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신이 행복 하려면 일단 부족함이란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은 결코 자신의 그것이 될 가능성이 높지 못하다. 그러니 복사된 욕망은 결국 돈과 시간만 쓰고 만다. 그럼에도 약간의 행복이라도 느꼈으니 그것을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행복이 욕망화 된 시대에 SNS가 발달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행복 욕망을 채우는 전체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정말로 채워질 수 있을까?

 

그나마 여기까지도 괜찮다. 시간 낭비, 돈 낭비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행복해졌으니까 말이다. 진짜로 심각한 문제는 복사한 욕망을 결국 채우지 못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를 받아들였을 때 생겨난다.

 

예뻐지고 싶은 욕망에 의해서 가진 돈을 다 털어서 성형수술을 했는데, 그 결과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까?

 

타고난 외모가 못생겨서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성형수술에 실패하면 자살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 행복해지기 위해서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을 때, 실패는 더 큰 불행을 가져다 주는 원인이 된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이 가진 모든 욕망을 다 실현할 수는 없다. 아무리 잘나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다. 그럼에도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누구나 어떤 시점에 적당히 포기할 줄 알아서 그렇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중요한 능력이다. 자기를 지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에 올라갈 능력이 없는 여우가, 그 포도는 당연히 익지 않아서 맛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자기방어기제라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이루지 못하는 욕망에 대한 무의식적 제어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타고나서 결코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욕망을 하지 않게 된다. 물론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일 때까지만 그렇다.

 

현재 시점에는 키, 두뇌능력, 운동능력 등이 바로 그런 것들에 해당된다. 원래는 얼굴 생김새도 여기에 속했는데, 의학기술과 화장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이제는 욕망을 해도 되는 것을 바뀌고 말았다그러니 요즘처럼 엄청난 욕망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예전에 누구나 못살 때는 아무도 해외여행을 욕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갈 수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되었다. 갖지 말아야 할 욕망의 대상에서 빠져버린 것이다.

 

만약 미래에 머리를 좋게 해주는 기계가 나왔는데, 그 비용이 10억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은 10억이란 돈을 벌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 타고나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만 생겨나면 그 즉시 욕망화되고 만다는 뜻이다. 이것이 포기된 욕망의 본질이다.

 

아무튼 자신에게 터무니 없는 욕망이라고 해도 자신이 한번이라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순간 욕망은 금세 자리를 잡아 버리고 만다. 누가 지나가는 말로 연예인 해도 되겠다는 말 하나에 평생을 연예인이 되는 꿈을 품고 사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끝없이 자신이 가진 욕망에 갈증을 느끼게 된다. 실현하기 힘든 욕망을 갖게 되었거나, 시도를 했으나 결국 실패하게 된 욕망은 본격적으로 불행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런데 이때 생겨나는 불행은 원래의 불행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이 문제이다.

 

, 그냥 바닥에 있는 것은 괜찮지만, 힘껏 점프를 했다가 결국 아무데도 오르지 못하고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에 느끼는 충격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절망 속에 사는 사람은 버티지만, 희망을 품었다가 절망하게 되는 사람은 견디지를 못한다. 그래서 결국 커다란 절망 속에서 삶을 놓아 버리고 만다.

 

이것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있다. 그것이 바로 욕망의 원인이 바로 행복이 아닌, 불행을 줄이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첫 번째 변화는 자신을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기가 쉬워진다. 목적이 행복이 아닌, 불행을 줄이는 것인데, 자신을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을 왜 품고 가려고 하겠는가?

 

행복을 위한 욕망은 하고 싶은 일이 되기 때문에 하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기 위한 욕망은 해야 할 일이 되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게 된다. 누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 때 그것에 미련을 가질까? 오히려 좋아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서 욕망이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오는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두 번째 변화는 바로 행복을 위해서 욕망을 실현할 때는 대부분 그것의 가치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을 막을 수 있다. 누가 두려움을 줄이고자 하는 일에 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가치를 줄이는 것이 왜 좋은 일인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가치는 그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치를 가지는 순간 차별과 분리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 사람들은 가치를 가지기에 분열된다. 서로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재단하기 때문이다.

 

도자기를 굽는 사람은 자신이 만든 도자기에 가치를 부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을 무시할 수 밖에 없다. 행복을 추구하면 가치가 만들어지지만, 불행을 줄이는 노력, 즉 두려움을 줄이는 것에는 그 어떤 가치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치를 갖지 않는 것은 그 무엇보다 대상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을 줄여준다. 행복의 커다란 단점 중 하나인 집착 말이다.

 

세 번째 변화는 새로운 다양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고통이나 두려움만 줄여줄 수 있다면 그냥 하면 된다. 특히 이런 변화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데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사실 사람에게 있어서 관계만큼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는 수단도 드물다. 예를 들어서 만약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친하다면 아마도 두려움을 느낄 시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언제든 어느 상황이든 도와줄 사람이 넘쳐나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그럼에도 관계가 두려움을 줄이는데 있어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맺는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행복한 상황에서만 유지하려고 하게 된다. 당연하다. 누가 불행하면서까지 관계를 맺으려고 하겠는가? 그러니 관계에서 아쉬운 입장이 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관계 자체를 좁아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두려움을 줄이기 위한 목적의 관계는 훨씬 더 아쉬운 입장이 된다. , 우연히 맺어진 이웃은 이사를 갈 수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참고 지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 관계에서 약자가 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관계를 넓히고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원래 관계를 잘 맺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매력이 타고나서 언제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착하게 구는 것이다.

 

원래 아쉬운 사람이 착하게 굴 수 밖에 없다. 원래 사람들은 자신이 손님 입장일 때종업원 입장일 때, 그 표정과 태도와 말투가 완전히 달라진다. 아쉬울 때 웃으면서 친절해진다.

 

그리고 관계를 통해 두려움을 어느 정도 해결하게 되면, 돈에 대한 욕망이 확실하게 줄어든다. 사실 돈은 관계의 대안이다. 먹고 사는 문제, 딱 거기까지만 돈의 역할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관계를 줄이고 - 왜냐하면 관계에서 약자가 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도 받기 때문에 - 돈을 이용해서 관계의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

 

또 다른 대안인 감성적인 행복도 그 중요도가 무척 높아지게 된다. 사실 감성적인 시간은 잠깐 두려움을 잊는 경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들었던 유행가에, 춥지만 하얀 눈이 쌓인 바닷가에, 노랗고 붉게 물든 가을 산에,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에 잠시간 현실을 잊고 낭만 속에 빠져든다. 사람들은 그 순간 잠시라도 삶의 두려움을 잊는다. 그래서 느슨해진다. 그리고 두려움은 현실적인 고통이 아니기에 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다.

 

네 번째 장점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복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행복이 목적이 아니기에 행복 그 자체가 욕망화 될 수 없다원래 행복하기 위한 공식들은 모두 동일할지 모르지만, 두려움을 줄이기 위한 공식은 각자마다 천차만별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설명했듯이 각자가 가진 부족함 자체가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욕망은 그저 그 사람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은 자신이 가진 부족함만을 기준으로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차이가 없다. 모두 두려움을 줄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자기를 굽는 일이나,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이나, TV를 보고 깔깔대는 것이나 똑같다. 그 모든 것은 그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줄이는 일일 뿐이다.

 

그로 인해서 자신만의 두려움을 바라보고 그것을 줄이는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을 좋은 말로 포장하면,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삶이 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두려움을 줄였기에 자신의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크게 보여서 두려운 것이다. , 질투 자체가 그저 두려움이 변형된 감정일 뿐이다. 이것만 이해해도 불필요한 질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자신들을 어떤 높은 존재로 정의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다른 존재들과 다른, 인간이란 가치가 결국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욕망은 부족함에서 나오니 당연하다.

 

그래서 과거엔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았다고 믿었고,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개나 돼지가 아니고 싶은 것이다. 뭔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존재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많은 것들에 대해 존재적 착각을 가지고 있다. 행복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이다. 인간의 본질이 행복이라고 믿는 그 믿음 말이다.

 

물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진짜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단계에서는 아니다. 이것은 조금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다. 그 세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저 인간은 고통과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다가 결국 죽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거기엔 어떤 가치도, 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개나 돼지가 아니어야 하기에 끝없는 자기세뇌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맞는다고 증명해준다.

 

하지만 그 착각으로 인해서 충분히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 삶을 스스로 망쳐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나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보니, 결국 그 안에 갇혀 버리고 만다.

 

자유로움은 그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 단계를 의미한다. 개나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은, 결국 개나 돼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처음부터 그런 노력 자체가 없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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