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 정당성

아이루다 2017. 11. 20. 08:59

 

이 세상은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수 많은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다양한 일들은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각자마다의 행복이다. 물론 그 목적이 이뤄지지 않아서 불행한 경우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사실 갈등이란 말의 정의가 바로 이것이다. 갈등은 누군가의 행복과 누군가의 행복의 충돌이다. 혹은 누군가의 불행과 누군가의 불행의 충돌이다.

 

이것을 좀 더 정리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총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 유형은 행복과 행복의 갈등이다. 이것은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갈등이기도 하다. 밥을 먹어야 할 때, 누군가는 시원한 냉면을 먹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어제 먹은 술을 깨기 위해서 따뜻한 순대국을 먹고 싶어한다.

 

이때 두 사람 모두 냉면도 먹을 수 있고 순대국도 먹을 수 있다면, 그나마 갈등은 쉽게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냉면을 먹고 싶은 사람이 순대국을 먹지 못하거나, 순대국을 먹고 싶은 사람이 냉면을 몹시 싫어하게 되면 갈등은 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이럴 경우에는 제 삼의 해결책, 즉 콩나물국밥을 먹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정리가 될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불행과 불행의 갈등이다. 이것은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의 갈등이기도 하다. 주말이 되어서 집안 대청소를 해야 하는 아내와, 시댁에 다녀와야 한다는 남편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갈등은 정말로 수 없이 많은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때 두 사람은 대부분 싸우게 된다. 서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보다 해야 할 일을 할 때 훨씬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도 내면에는 서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인정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싸워도 아주 큰 싸움은 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상황이 자주 반복되면 아주 큰 싸움이 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세 번째 유형은 행복과 불행의 갈등이다. 이것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갈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갈등은 또 다시 두 가지로 세분화된다.

 

하나의 유형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불행함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경우이다.

 

해외여행 계획을 세우고 하루하루 준비를 하고 있는 중 떠나기 전날 시어머니가 몸이 아파서 병간호를 해줘야 할 사람이 필요해 여행 가는 것을 취소해야 할 며느리의 경우가 그렇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 놓이면, 아무리 착한 며느리라도 해도 화가 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앞에서 나온 자신이 행복한 것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양보해주는 것이나, 자신도 불행도 힘들지만 그 사람의 불행이 더 크거나 중요하기에 이해하고 넘어가 줄 수 있는 상황과는 다르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할 경우이며, 또한 그 포기의 결과가 결국 아픈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해야 하는 불행함일 경우라면 정말로 견디기가 힘들다. 그래도 이런 경우엔 하고 나면 어떤 가치는 생긴다. 가족의 불행함을 함께 해줬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훗날 언제든 기회가 되면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온전히 손해를 본 것만은 아니기에 그렇다.

 

또 하나의 유형은 다른 사람의 행복 추구로 인해서 자신이 불행해지는 경우이다. 사실 이 경우가 지금까지 나온 사례 중에서 가장 견뎌내기 힘들다.

 

주말이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간다고 주말 내내 외박을 하는 남편이나, 사고 싶은 옷들이 있다고 해서 카드 빚을 내서라도 옷을 사는 아내의 경우가 그렇다.

 

일단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니 대놓고 말릴 수는 없지만,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쌓여서 결국 커다란 갈등의 문제가 되고 만다.

 

시어머니를 위해 해외여행을 포기한 며느리는 힘들고 짜증이 나지만 그나마 가치라도 있다. 또한 주변에서도 그런 희생을 알아준다. 그러니 당장 힘들어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이 불행해져 버리는 상황은 그저 바보가 되고 만다. 누구도 위로해줄 사람도 없고,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해주는 사람도 없다.

 

기본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일어났느냐에 상관없이 갈등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여지가 크다. 사실 갈등만 없어도 이 세상은 참 속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사는 한, 갈등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했던 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모든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갈등은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갈등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된다.

 

, 우리가 흔히 지혜롭다, 현명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갈등을 얼마나 서로간의 피해가 없이 조화롭게 풀어낼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한다. 그래서 어떤 갈등을 큰 충돌 없이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지혜로운 자가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갈등을 잘 풀어내는 것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된다. 그러니 갈등의 원인과 그것의 해결책에 대해서 아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다.

 

사실 갈등은 갈등 그 자체보다 갈등이 또 다른 갈등을 부르는 확대해석이 문제이다. , 냉면을 먹고 싶은 사람과 순대국이 먹고 싶은 사람이 그냥 제 삼의 해결책인 콩나물국밥을 먹게 되면 간단히 처리될 일을, 한쪽이 죽어도 냉면을 먹고 싶다고 하거나, 한쪽이 죽어도 순대국을 먹어야 한다고 할 때 문제가 된다.

 

또한 설령 그런 경우라고 해도 둘이 각자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끝나는데, 서로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면서 '너는 왜 냉면도 못 먹냐' 라고 비난하게 되면 일이 커진다. 물론 상대도 '너는 왜 순대국을 먹지 못하냐' 라고 반응할 것도 뻔하다.

 

그래서 이런 강요가 왜 일어나는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거기엔 바로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에 대한 "정당성"이 숨겨져 있다.

 

, 사람들이 뭔가 자신이 경험하고 싶은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면, 거기엔 자신이 경험하고 싶은 행복이 옳다라는 자기 확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것들은 정당할 것일까?

 

사실 사람들이 갈등 상황에 싸우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서로 자신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주말에 가정을 팽개치고 낚시를 떠나는 남편도 자신만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힘든 주중의 회사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날리고, 삶을 충전하기 위해서 낚시를 떠난다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혹은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도 그렇다고 하기도 한다.

 

사실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에 대한 정당성이 없다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를 댈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운 좋게도 다른 사람과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행복이라면 좋지만, 갈등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정당성이 없을 경우 결국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하고 싶다는 감정이 중요할까 아니면 그것을 해도 되는 정당성이 더 중요할까?

 

물론 자신과 갈등을 겪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당성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냉정히 상황을 바라보면 결국 자신이 그것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훨씬 더 중요하다.

 

원래 무엇인가를 하고 싶지 않다면,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수십 가지를 댈 수 있기 때문이다. , 정당성을 위해서 내놓는 논리들은 그저 정당성을 위해 끌어들인 것들일 뿐이다. 그 순간 끌어들인 논리들이 실제로 사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논리는 그저 논리일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찜찜함이 없이 행복하고 싶어한다. , 주말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아내를 두고 낚시를 떠나는 남편은 뒤에 뭔가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정당성을 정하고는 낚시를 다녀와서 낚은 대어를 아내에게 내놓는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다듬어지지 않는 생선을 처음부터 다 손질해야 하며,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매운탕을 끓어야 하는 처지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입이 더 튀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때 남편은 새로운 작전을 쓴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 앞에서 자신이 큰 물고기를 어떻게 잡았는지 생생하게 떠드는 일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런 아빠의 이야기 속에 빠져서 재미있고 행복해 한다. 이렇게 되면 아내는 속에서 열불이 나도 생선의 내장을 정리하고 매운탕을 끓이는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되고 난 후, 맛있는 매운탕을 먹을 때가 되면 남편의 정당성은 정점에 다다른다. 자신이 주말에 힘들게 바다 낚시를 다녀와서 일요일 저녁에 온 가족이 맛있는 매운탕을 먹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당성은 다음주 주말에도 낚시를 떠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에서 그 누가 남편의 입장과 다를까. 지금 이 순간에도 다들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정당하고 믿기에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도박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렇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자. 도대체 거기엔 어떤 정당성이 있을까?

 

사실 정당성만 제거하고 나면 수 많은 갈등 상황이 꽤나 쉽게 해결될 가능성이 크다. 어떤 갈등이 크게 번지는 이유 자체가 바로 서로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게 서로 물러서지 않기 때문에 감정이 골이 깊어져서 결국 관계의 단절이 일어나거나 심한 경우 살인이 일어나는 경우까지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갈등을 최소화시키고 또한 일어난 갈등을 불필요하게 확대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추구하는 그 모든 행복에 대한 정당성을 되 집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에 충분히 생각을 하게 되면어떤 것에서도 근거를 찾을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될 수 밖에 없다.

 

설령 남을 돕는 것이 행복이라서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다 기부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가족은 굶어 죽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흔히 좋은 일이라고 알려진 것조차도 그것이 쉽게 정당화 될 수가 없다. 그나마 정당성을 가지려면 그 불행함이 그 자신에게만 한정적으로 머무는 경우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사람은 그 어떤 인간관계도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니 그럴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세상의 원리는 누군가가 이득을 봤다면, 반드시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의도로 그것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오직 이득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돈이 없는 환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인해서 무료로 진료를 해주는 의사의 경우라고 해도, 그런 행동으로 인해 살아있는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국 그 병원에만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주변 병원들이 문을 닫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갈등 상황에서 자신의 주장엔 그 어떤 정당성도 없다는 본질적 개념만 잊지 않는다면, 자신이 수 많은 사실들을 설득의 근거로 끌어들임으로써 결국 상대를 설득할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를 스스로 믿는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전환으로 인해서 혹시나 자신이 상대의 논리에 밀려 설득되더라도 결코 그것을 화낼 필요가 없음을 스스로 성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상대가 자신보다 좀 더 많은 사실을 논리적으로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다.

 

정당성을 위해 쓰인 모든 논리는 옳은 것이 아니라 그저 도구일 뿐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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