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어른이 된다는 것

아이루다 2017. 11. 30. 07:03

 

인간은 누구나 아이로 시작한다. 갓난아이에서 어린아이로, 어린아이에서 청소년으로,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자라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이 대략 한 20년의 시간 동안 변화이다. 그리고 이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다란 외모적, 성격적, 환경적 변화를 겪는다.

 

외모적이나 환경적 변화는 뭐 딱히 더 설명할 것이 없다. 그냥 알아서 변해가기 때문이다. 물론 성격적 변화도 비슷하긴 하지만, 뭔가 좀 다르다. 왜냐하면 외모나 환경의 변화는 누군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지만, 성격은 분명히 부모의 의지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보통 남자는 남자로써 자라고, 여자는 여자로써 자라게 된다.

 

사실 남자나 여자로 정의되는 전형적인 성격이타고나는 것과 자라면서 사회적으로 교육받은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크게 영향을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기본적으로 매우 중요한 두 개의 호르몬,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에 의해서 선천적으로 성별 성격이 형성되고, 이후 사회적 개입에 따라 나머지가 형성되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아무튼 아이는 어른이 되는 과정 중에서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된다. 그런데 이것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몸은 그냥 자라서 성인의 몸을 갖을 수는 있지만, 진짜 어른이 되어서 어른으로써 적절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험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명시적으로 인식한 상태에서 치르는 시험은 아니다. 또한 그 결과가 명확히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시험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다른 남자들에게 남자로써, 다른 여자들에게 여자로써 인정을 받게 된다그런데 이때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주어지는 문제는 서로 다르다.

 

남자는 바로 용기이며, 여자는 바로 공감능력이다.

 

용기는 남자가 남자로써 세상을 살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공감능력은 여자가 여자로써 세상을 살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이것이 선천적으로 필요한지, 아니면 인간 사회에서 성적 역할 분담의 요구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선택된 것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미래에도 계속 이럴지는 알 수 없다.그렇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다.

 

과거를 살펴보면 남자들의 용기는 매우 직접적으로 증명되곤 했다. 과거에 수 많은 문명에서 존재했던 성년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나운 맹수를 잡는 사냥을 떠나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거나, 자란 곳을 떠나 오랜 시간 홀로 생존을 해내는 것 등의 관례가 존재했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 적자생존이 일상화되어 있는 자연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켜야 할 책임을 가진 남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종류의 용기의 증명은 매우 중요한 통과의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직접적인 증명 방식은 성공과 실패가 명확히 구분되었고, 일등과 꼴등도 어느 정도 구분되었다.

 

그래서 성공한 일등은 남자로써 크게 인정을 받았으며, 실패한 꼴등은 남자로써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남자들의 세계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서 남자들은 21세기에도 서열화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이런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의 공감능력 시험은 매우 은밀하게 이뤄진다. 그래서 딱히 성공과 실패도 잘 구분되지는 않는다. 단지 실패한 여자들은 결국 여자들의 사회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될 뿐이다. 성년이 되는 시험에 실패할 경우 남자는 버림을 받는다면, 여자는 무시를 당한다. 


 

즉, 용기가 부족한 남자는 대놓고 무시를 당하고 결국 왕따를 당했다면, 공감능력이 부족한 여자는 앞에서는 괜찮은 듯 굴지만 결국 은밀하게 따돌림을 당했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여기엔 한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남자가 용기가 있을 수는 없고, 모든 여자가 공감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사실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 비해서 현저하게 적다는 것이 현실이다. , 시험에 통과한 사람이 생각보다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그냥 버림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고 있어야만 할까?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뭔가 다른 해결책을 찾게 된다.

 

그 해결책이 바로 그런 척을 하는 연기를 하는 것이다. , 남자들은 용기가 있는 척, 여자들은 공감능력을 가진 척 하기 시작했다.

 

물론 굶주린 사자를 앞에 두고 싸울 때 용기가 있는 척 연기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문명 사회에서는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자신의 용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평소에 사자를 만나도 용기있게 싸울 것처럼 말하고 다니면 된다. , 딱히 용기를 증명할 기회가 없으니, 용기가 없어도 용기가 있는 척을 하고 살아가면 된다. 정 안되면 경찰을 부르면 되니까 말이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공감능력이 없지만 공감능력이 있는 듯 굴기 시작했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리액션이다. , 상대가 무엇인가를 말하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면에서 어떤 이해도 일어나지 않지만그저 상대가 원하는 수준의 감정적 반응만 보여준다. 그러면 그것이 공감능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사실 공감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나 모두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 인간이 서로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여자들의 대부분은 이것을 연기하면서 자신들이 공감능력이 있다고 믿고 살아간다. 그리고는 그런 리액션을 보여주지 못하는 남자들에게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을 한다. 어쩔 수 없다. 남자들은 공감능력이 있어보이는 척을 하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들 역시도 입으로는 용기란 용기는 다 가진 듯 군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남자들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하기 마련이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사람은 정말로 드물다. 그리고는 두려움을 좀 더 자주 느끼는 여자들을 보고는 비겁하다고 비웃는다. 어쩔 수 없다. 여자들은 용기있는 척을 하는 연기에 별 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연기를 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용기나 공감능력이 왜 필요했는지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두가지 능력은 왜 필요했을까?

 

사실 이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용기나 공감능력 자체도 매우 엉뚱하게 해석되고 있다. 실제로 굶주린 사자 앞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일반적으로는 근력의 힘이다. 즉, 육체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용기가 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엔 그것이 지적 능력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머리가 좋은 것이 용기가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처음부터 이상하다. 머리가 좋은 것과 용기가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니 결국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것과 용기도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어야 옳다.


신체적능력이나 지적능력은 그저 생존능력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용기와는 원래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나마 이런 능력들이 뛰어나면 자신감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도전을 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용기는 아니다. 사람이 개미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그저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용기는 처음부터 사자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용기는 오직 내면에서 생겨나는 힘으로, 이것을 정확히 표현하면 자기 신뢰이다. 즉, 스스로를 믿는 힘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신뢰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 놓여서도 자신의 중심점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공감능력도 다를 바 없다. 공감능력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 아니다. 다들 그런 행동을 공감능력이 좋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저 감정이입 능력이 뛰어난 것뿐이다. 즉, 다른 이가 겪은 일들을 자신이 겪은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이다.


공감능력은 타인의 아픈 경험을 자신의 간접 경험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엄마가 울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같이 우는 것은 공감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감정 흉내이다. 그럼에도 위로가 되긴 하기 때문에 이것도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공감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능력은 오직 내면에서 이뤄지는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타인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신뢰 역시도 결국엔 자신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공감은 임시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살아오면서 쌓인 수 많은 경험과 머리에 넣어 놓은 다양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깊은 사고 과정을 통해서 이뤄진 이성의 결론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라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뢰의 기반이다.

 


사실 용기와 공감능력은 전혀 다른 개념을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공감능력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용기가 있는 것이다.

 

  

용기나 공감능력은 모두 신뢰에 대한 문제이며, 누군가 남자냐 여자냐에 상관없이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은 용기를 가진 것이고, 용기를 가진 사람은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단지 성별 역할에 따라서 좀 더 중요한 덕목으로 취급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용기가 있는 사람이 되며, 또한 어떻게 하면 공감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은 이미 타고나기 때문에 결코 노력해서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아니다. 충분히 노력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자기 신뢰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바로 사람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갖게 되는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본질적 두려움에 대한 물러섬 없는 직시를 조건으로 한다. , 자신의 본질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결코 용기가 있을 수 없음을, 또한 제대로 된 공감능력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즉, 인간은 누구나 비겁하고 이기적이다.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자신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르던 것을 알 때 흔들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더라도 이미 알고 그것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했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런 점이 바로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당황을 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리고 더해서 인간은 원래 부족한 것이 있어야 채우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이미 충분한 용기와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면, 그것을 채울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그것을 솔직히 인정할 때,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근원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문명 속에서 연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용기 있는 척하고 살고, 공감을 하는 척하면서 살아가는데 제법 익숙하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을 살다가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비겁함과 타인에 대한 몰이해가 끝없이 반복됨을 경험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보면서도 깊은 성찰을 하기보다는, 그런 상황을 만든 것들을 비난함으로써 벗어나려고 한다. , 자신의 비겁함이나 몰이해의 원인을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찾아서 합리화 하려는 것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오직 타인의 문제로만 몰아가며 끝내려고 애쓴다. , 자기 변명에 의한 합리화를 하고는 결국 관계를 끊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점점 더 고립되고 만다.

 

조금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공감하려고 노력했다면, 서로가 더 좋은 관계로 잘 지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고 만다.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관계를 거부하고 행복 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 중에 하나이다.

 

결국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하고, 공감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행복하기 살기 위해서이다. 내면에 존재하는 자기 신뢰의 힘이 바로 용기와 공감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행복해진다.

 

비록 이런 설명이 진리는 아니지만, 행복한 삶을 위한 매우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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