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위로와 성찰

아이루다 2017. 12. 24. 16:27

 

사람은 누구나 살다가 보면 힘든 일을 겪는다단순한 문제들은 그나마 쉽게 해결하거나 혹은 해결은 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털고 넘어갈만한 하지만심각한 문제들은 그것을 해결하기도 그렇다고 그냥 감당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 힘든 문제 앞에 놓인 사람들은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때 바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다. 비록 위로의 행위가 실제적인 도움은 전혀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당사자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너무 걱정하지마, 다 잘될 거야" 이 말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

 

어쩌면 이런 서로간의 위로가 없었다면 인간 세상은 훨씬 더 각박해지고 피폐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발달된 문명을 건설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위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단어가 하나 있다. 사실 비슷하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데, 아무튼 결론적으로는 그렇다.

 

그것이 바로 성찰이다. 위로와 성찰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문제에 대해서 비슷한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

 

이 두 단어 모두 누군가가 감당해야 할 힘든 일 앞에서 그것을 견뎌내거나 혹은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로는 위로대로, 성찰은 성찰대로 각자 다르게 그 역할을 한다.

 

위로는 훨씬 빠르고 편하게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것에 대해서 적절한 말을 해줄 사람만 있으면 되니까 말이다. 반면에 성찰은 느리고 상대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한다. 누군가의 말이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그것을 완성해야 할 주체는 바로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둘의 최종 효과는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마치 어딘가를 다쳤을 때 끝없이 진통제를 먹어서 견디면서 자연적 회복력에 기대어 해결하는 방법과 다친 곳을 수술이나 치료를 통해서 해결하는 방법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성찰이 훨씬 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찰이 반드시 더 낫다는 근거는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회복력은 바로 망각이니까 말이다. 특히나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 섰을 때 과연 성찰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그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서 있다면, 이것이 과연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 정말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절대로 복구가 불가능한 문제 앞에 있을 때는 그저 위로가 훨씬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위로를 통해 시간을 견디고 또 견디고 나면 자연적 치유 능력인 망각이 바로 모든 것을 해결해주니까 말이다. 말 그대로 시간이 약인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들 조차 성찰을 통해 해결이 가능하긴 하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란 사건 그 자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성찰을 성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찰의 도중에 일어나는 수 많은 부정적 현실에 빠져서 결국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냉소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혹은 그 과정 속에서 얻은 지식의 함정에 빠져서 결국 남다른 지적 우월함에 빠져서 평생을 그 안에 갇혀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성찰은 필요하다. 성찰은 위로가 가진 가장 나쁜 단점, 바로 반복성을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실수를 통해 배운다.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능숙해지고 현명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실수를 위로를 통해서 해결해버리고 나면 배울 수가 없다. 힘듦을 경험하면서 또 다시 이런 경험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만 배울 수 있는데, 그냥 쉽게 위로를 통해 처리해버리고 나면 또 다시 그 문제가 반복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은 바로 원인을 이해하고 다시는 그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이 된다. 물론 쉽지는 않다.

 

그래서 적당한 위로와 끝없는 성찰이 함께 할 때 모든 사람은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성찰로 착각하고, 위로를 받아서 기분이 좋아진 상태를 성장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큰 문제점이 여러 번 반복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는 않다. 정말로 재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고는 보통은 그렇다. 그런데 그 문제를 위로를 통해서 넘기고는 마치 그것을 극복했다는 듯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은 언제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나오게 된다.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 어떤 가치에 대한 끝없는 욕구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위로를 성찰로 착각하지 않는 각자만의 판단 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이것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생각보다 쉽다. 그것은 바로 위로는 언제나 불행을 향해 있다는 점을 알면 된다. , 위로는 행복한 일에는 동작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누가 행복한 일에 위로를 받으려고 하겠는가? 하려는 사람도 없고 해주는 사람도 없다. 대신 축하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성찰은 불행과 행복을 모두 아우른다. , 행복하다고 해서 그것이 성찰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불행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결코 성찰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그 불행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뿐이다.

 

오히려 성찰은 행복을 바라봄으로써 더 큰 진전을 이룰 수 있다. 행복의 진정한 정체를 이해하면 불행의 진면목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한 상태는 그 자신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기에 최대한 냉정해지고 이성적일 수 있는 조건이 되어 준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도 가능해진다. 행복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행복에 숨겨진 진짜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불행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하지만 행복해진 사람들은  즉시 성찰을 멈춘다. 행복해졌는데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것은 한 없이 어리석은 짓으로 보인다.

 

하지만 건강할 때 운동을 해야 한다. 이미 몸이 망가진 후에는 운동을 할 기회조차 없다. , 행복할 때 성찰을 제대로 해놓지 못하면 불행할 때 그 늪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그저 위로만을 통해서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과정은 삶의 전체적인 과정 속에서 끝없이 반복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행복을 근처에 두려고 하고 불행을 멀리하려고 하지만,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불행이 있기에 행복이 있고, 행복이 있으니 불행이 있는 것이다.

 

아기 해달이 나오는 '보노보노' 라는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것과 관련된 짧은 대화가 나온다. 보노보노는 마을에서 제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야옹이 형에게 왜 좋은 것인데도 끝나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야옹이 아저씨는 좋은 것이 끝나야 나쁜 것도 끝날 수 있다고 대답해준다.

 


단순한 말이지만, 이 대답은 그 무엇보다도 현묘함을 담고 있다. 행복이 끝날 수 있어야 불행도 끝날 수 있다는 말이 가진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행복을 원하기에 끝없이 행복이 유지되길 바라지만, 행복이 끝날 수 있기에 불행이 끝날 수 있고, 그 덕에 또 다시 행복이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점은 잊어 먹고 말았다.

 

그러니 불행할 때 위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할 때 그것을 성찰하는 노력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사람들은 불행할 때 생각이 많아진다. 하지만 행복할 때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것이 바로 성찰의 진정한 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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