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로봇시대 인간의 일

아이루다 2017. 12. 9. 08:13

 

지난 화요일에 정말로 우연히 그리고 뜬금없이 '로봇시대 인간의 일' 라는 제목을 가진 책으로 토론회를 하는 장소에 참석할 일이 생겼다. 그것도 촉박하게 정해진 일정이라서 정작 책은 거의 겉핥기로 읽고 갔다. 사실 읽기가 좀 귀찮아서 그랬던 면도 있다.

 

토론 장소에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이 적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토론을 하게 되었다원래 나는 그냥 앉아 있으면 되는 줄 알고 부담 없이 갔는데, 이미 토론을 위한 주제들까지 나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의미 있는 토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나가고 있는 독서토론회에 비해서 조금 덜 개인사가 다뤄졌을 뿐, 말하는 사람들의 사고의 범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튼 그 덕분에 혼자서 이상한 소리만 하다가 오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갔다 오고 나서 후회를 좀 했다.

 

이번 토론회의 주제가 된 책은 로봇이 인간 세상에 끼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다룬 책이다. 저자가 철학과 출신이라서 그런지, 단순한 지식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입장에서 로봇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로봇시대라고 했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인공지능 시대를 뜻하고 있다. 로봇 시대는 이미 와있으니까 말이다. 이 둘을 잘 구분해야 한다.

 

로봇은 몸을 의미한다. 하드웨어이다. 그런 면에서 냉장고도 넓은 의미에서 로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당연히 정신을 의미하며 소프트웨어이다.

 

물론 진짜로 로봇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제품이 일반인들의 삶까지 접근한 사례는 별로 없다. 하지만 산업계에서 로봇은 이미 엄청나게 많이 보급되어 있다. 최근에 만들어지고 있는 첨단 공장들의 자동화 율은 90% 이상, 심한 경우 100%에 근접한 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소비하고 있는 많은 것들은 사실상 로봇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의료 쪽에서도 로봇을 이용해 수술을 하는 경우도 꽤나 있다고 하니, 로봇시대는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온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진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인공지능의 시대이다. 아이폰에 탑재되어 있는 거의 음성인식 수준인 시리나 바둑에서 인간을 꺾은 꽤나 발전된 형태의 알파고 등이 바로 인공 지능의 예가 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나눈다. 이 구분이 꼭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렇게 구분해 보는 것이 편하긴 하다. 그리고 인간은 일반적으로 정신을 더 우월하게 여긴다. 그것이 바로 정체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영혼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인공지능은 로봇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책에서는 인공지능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다뤘다. 아주 단순한 인공지능인 자율주행에서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일 것 같은, 인간과 교감이 가능한 수준의 인공지능까지를 언급했다. 특히 영화 '그녀(Her)' 나 엑스마키나(EX MACHINA) 에서 등장한 순수 인공지능과 로봇의 몸을 가진 인공지능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다양한 의견을 내놓긴 했지만, 결국 누구나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로봇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에 반대한다. 나는 로봇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100년 전쯤 사람이 현재의 시대에 와서 집에서 개를 키우고, 옷을 입히고, 미용실을 데려가고 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이 망했다고 소리칠지도 모른다.

 

100년 전 사람들 중에서 누가 개와 인간이 정서적인 교감을 할 수 있다고 믿었겠는가? 그 당시는 개는 그저 단백질 보충 수단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의 개념이다. 하지만 100년 후에도 그럴까? 아닐 것이다. 인간들 중에서는 분명히 인공지능과 정서적 교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인공지능은 개처럼 인간의 말을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외모도 인간처럼 생겼으며, 심지어 인간과 비슷한 반응을 할 것인데, 외로운 사람들이 과연 그 존재가 인공지능이라는 이유로 거부할 것인지는 깊게 생각을 해봐야 한다.

 

물론 지금도 집에서 개를 키우면서 인간처럼 대우하는 것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미래에도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영화 아이로봇에 나온 윌 스미스가 그랬다. 그는 로봇이라면 그냥 싫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인공지능을 품은 로봇을 누구나 다 싫어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지금과 같은 개인적인 삶이 더 선호되는 상황이 지속되면 당연히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인해서 로봇을 찾는 사람은 더욱 더 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은 제대로 평가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감정 표현을 해도 무조건 가짜라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다 의도된 것이고, 프로그램 된 것이니 가짜인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인간의 감정만이 오직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인간을 자신을 뭔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할까?

 

사실 인간의 모든 판단 기준은 바로 두려움에서 나온다. 이 책에서는 두려움을 부족함에서 오는 절실함이라고 표현을 했다. 또한 그런 인간의 특징을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써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그저 자신이 느끼는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일 뿐이란 뜻으로 풀 수 있다. ,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최초의 의도는 바로 외부에서 온다. 그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반드시 주어진다.

 

그러면 두 번째로 단계로 사람들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을 해결하려고 애쓴다. 인간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자신을 일부로 부족한 상태에 있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에 있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두 번째 단계에서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자유의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의 시작인 부족함이나 두려움은 완벽히 수동적이다. , 사람들은 일이 터져야 움직인다. 혹은 일이 터질지 모르니 움직인다.

 

더군다나 그것도 끝이 아니다. 해결책을 찾는 두 번째 단계에서 의지적으로 계획되고 실행되는 것들은 자유의지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사실 엄밀히 말해서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해결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들, 즉 각자의 성격, 경험, 지식, 조언, 환경 등은 이미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역시도 모두 선택 불가능한 것들뿐이다.

 

각자가 가질 수 있는 의지는 결국 선천적인 성격으로 타고나고, 후천적으로는 거의 부모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후 경험과 지식을 쌓는 것도 역시 그렇게 결정된 성격과 이미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그래서 북유럽에 태어난 사람과 아프리카 전쟁터에서 태어난 사람은 똑같은 성격을 타고 태어나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발에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 북유럽에서 태어난 사람은 열심히 치료를 하는 것을 선택하겠지만,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은 한쪽 다리를 자르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것을 과연 자유의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뭐 어떤 사람은 강력한 의지로 아프리카에 태어났지만 유럽으로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미디어에 의해서 소개되면서 마치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0.1%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강한 의지를 가진 성격에다가 아주 많은 운이 따랐을 때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책에서 이런 문제들을 좀 다뤄졌으면 했다. 정말로 깊게 생각해봐야 하는 것들은 바로 이런 문제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책은 주로 정보 전달에 집중했고(사실 책의 의도가 처음부터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겉핥기 식의 문제 제기 방식으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중요한 쟁점거리로 다뤄질 만한 질문,  로봇이 인간과 결코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좀 구차했다결국 인간은 로봇과 다르게 부족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절실함이 있기에 로봇과 다르다고 설명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로봇은 부족함이 없으니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뜻인가?

 

부족함이 없는 존재, 냉정히 말하면 이것은 인간이 원하던 신의 모델이 아닌가? 그렇다면 로봇이 인간과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하등 존재라서 그렇다는 뜻인가? 로봇과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 구분하기 위해서 부족함이라는 단점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입장이, 인간의 입장이 안쓰럽기도 하다.

 

또한 이 설명은 한 가지 힌트를 준다. 그것은 만약 로봇에게 부족함의 개념을 심어줄 수 있다면 로봇도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로봇이 자신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면, 로봇은 완벽한 인간처럼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에게 감정을 가르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다양한 감정을 흉내 내는 로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파괴에 따른 두려움만 심어주면 나머지 모든 감정은 알아서 배우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로봇도 인간처럼 행복과 불행을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부족함에 의한 절실함을 알고, 창의적 활동을 할지도 모른다.

 

로봇에 탑재된 인공지능은 새로 개발된 신형 팔을 보면 더 갖고 싶어할 것이고, 자신의 팔이 어딘가 끼어서 망가지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원래 인간의 두려움은 고통으로부터 생겨난다. 고통을 느끼거나,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고통을 느낄 때는 신체적으로 힘들고,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있을 때는 정신적으로 힘들다.

 

로봇에게 신경계를 만들어서 고통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겠지만, 고통을 느낄 가능성을 가지게 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인간과 같은 감정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생각들도 큰 전체의 일부만을 보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독서 토론회는 서로 각자가 본 다른 면들을 얘기해야 하는 자리여야 했다. 그저 원래 우리가 알던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말이다.

 

인간은 위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저 인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 중에서만 유효하다. 그리고 이제 인간은 그 자신들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접어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흥미롭긴 하다. 딴 것은 몰라도 자율주행은 지금 중년이 나이의 사람들이 나이를 먹은 후 운전을 하기 힘들어질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노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양을 전문적으로 처리해주는 수준의 로봇은 나올 듯 하다. 사실 그 어떤 분야보다 그것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로봇들도 나올 것이다.

 

아마도 이런 분야가 로봇이 대중화 되는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영화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움받을 용기  (0) 2018.03.30
저녁의 구애  (0) 2018.03.16
여덟단어  (0) 2017.04.17
비폭력 대화  (0) 2017.03.17
워크래프트 : 전쟁의 서막  (0) 2016.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