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미움받을 용기

아이루다 2018. 3. 30. 08:23

 

책 제목을 참 잘 지은 책이다. 그래서 또한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책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 읽게 되었다. 아마도 그 어떻게 하게 된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이기도 하다.

 

읽고 난 후에는 한번쯤 읽어 볼만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요즘 나오는 책들 중, 그것도 유명한 책들 중에서는 그나마 괜찮았다.

 

반면에 의문도 생겼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이 책을 읽고 처음 든 느낌은 '이기적 유전자'와 비슷했다.

 

유명한데 도대체 왜 유명한지 모르겠다는 점과, 그런 생각을 한 계기가 바로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결코 쉽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 관점에서 이 책은 난이도가 꽤 있는 편이었다.

 

이 책은 젊은이와 철학자로 대변되는 두 사람의 대화로 이뤄진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 책을 그나마 쉽게 읽은 이유가 바로 그 대화체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대화체는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치는 듯 하다.

 

그리고 이 책은 책 내용에 의하면 세계 삼대 정신분석학자인 아들러의 심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아들러 이외에 프로이트와 융이 있다고 했다.

 

,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들러라는 분이 직접 쓴 책은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책을 근간으로 해서 유추해 낸 결론에 의하면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분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책 역시도 고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하면 이상적인 사상이고 조금 적나라게 하게 표현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환경적, 체험적 한계점이 명확하다는 문제 말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점은 비단 아들러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심리학자, 철학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인데, 특히 철학자들이 많이 가지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철학을 물리학에 비유하고, 심리학을 화학에 비유를 한다.

 

그래서 철학은 원자와 그 내부를 분석하고, 심리학은 그 원자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결과물, 즉 분자 단위의 분석을 한다.

 

그래서 화학에 해당되는 심리학에서 나오는 이론들은 대부분 그대로 적용이 된다. 확증편향, 방어기제, 페르소나 등등 하는 용어들을 현실에 적용하면 꽤나 잘 맞는다.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를 합치면 물이 되는 것처럼 명확하다.

 

반면에 물리학에 해당되는 철학은 시작부터 상상이다. 도대체 원자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내부가 어떤 식의 원리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물리학은, 특히 이론 물리학은 실험을 통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현상을 기반으로 해서 그 깊고 깊은 원자 내부를 상상하고는 그 현상들에 가장 잘 맞는 이론적 모형을 세웠다가 바꾸거나 철회하는 과정을 통해서 끝없이 진실에 다가간다.

 

철학은 인간의 행동양식을 통해 나타나는 표면적 현상을 기반으로 해서 그 깊고 깊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내면을 상상하고는 그 현상에 가장 잘 맞는 이론적 모형을 세웠다가 바꾸거나 철회하는 과정을 통해서 끝없이 진리에 다가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철학과 물리학은 이후 전혀 다른 흐름을 보인다.

 

물리학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실제적 증명이라는 단계가 추가되어 계속 앞으로 나가는데, 철학은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결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철학은 이천 년이나 더 오래된 과거에 나온 이론들을 계속 답습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리학이 최근 CERN을 통해서 표준입자모형의 마지막을 채울 신의 입자로 알려진 힉스를 찾아 경사가 난 반면에, 철학은 지금 이 순간에도 노자, 플라톤,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 등에서 전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천 년에도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고, 지금은 오히려 더욱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그 사이에 종교는 훨씬 더 많아지기만 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실제적 한계 속에서 아들러는 자신만의 삶에 대한 심리학적 혹은 철학적 해석을 했다.

 

하지만 그의 주 영역이 철학이 아닌 탓인지 그는 심리학적 해석을 통해서 철학적 결론을 낸다. 하지만 그 심리학적 해석조차도 그다지 제대로 된 것 같지가 않다. 그리고 철학적 결론은 본질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이론상에 머문다.

 

책의 시작부분에서 저자는 아들러의 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감정의 목적론을 주장한다. 방에 홀로 지내는 친구 얘기를 기반으로 해서 겁나고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가기 싫기 때문에 겁나고 무섭다는 감정을 느낀다는 설명을 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인과론을 깬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하지만 결국 물리학이 아닌 화학이라는 한계가 있다. 도대체 감정이 왜 생겨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생략한 것 일수도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감정은 생겨난다. 인간이 자발적 의도에 의해서 감정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감정에 관한 한 인간은 완전히 수동적이다. 만약 감정이 드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1%라도 개입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감정이 수동적인 이유는, 모든 감정의 근원이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조절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저 참거나 도망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감정은 매우 복합적으로 생겨난다. , 한번에 하나가 아닌 수 많은 감정들이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다. 외출하기 직전 친구와 했던 약속이 깨지면 실망감, 짜증, 불안함과 같은 나쁜 감정도 들지만, 안도감, 편안함 등과 같은 좋은 감정들도 함께 생겨난다. 그 친구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친구일수록 좋은 감정이 더 많이 든다. 심지어 행복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복합적 감정이 들 때 사람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 크게 보면 행복한 것이거나 불행한 것이다.

 

실망감이나 불안감을 잡는 사람은 불행을 선택한 것이고, 안도감이나 편안함을 잡은 사람은 행복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목적론이다. , 감정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데 그 중에서 자신이 잡길 원하는 감정을 선택하는 과정이 바로 목적론의 진정한 정체가 된다.

 

일부로 뺀 것인지, 몰라서 안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는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중간에 많은 얘기들이 나오는데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러니 바로 결론을 가자.

 

그런데 마지막 결론이 좀 생뚱맞았다.

 

책에서는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나온다고 전제한다. 그러니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각자의 삶은 인간 혹은 더 큰 어떤 것의 공동체를 위해 봉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대부분의 고민이 인간관계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은 맞는 전제이다. 그러니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행복의 열쇠라는 것도 맞다. 그리고 삶을 공동체 전체 혹은 더 큰 의미에서 우주 전체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도 어느 정도 이해할 만 하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가능할까?

 

사람들이 관계에 얽매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바로 생존의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 관계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의미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당연히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두려움이란 감정이 과연 용기가 있다고 해서 사라질까? 번지점프 대에 올라서 뛰어내리기 직전 용기를 가지면 뛸 수 있을까? 사실 이때 뛰어내리는 힘은 오히려 또 다른 두려움이다.

 

여기에서 뛰지 못하면 또 어딘 가에도 뛰지 못할 것이기에 뛰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가 생겨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뛰어 내리게 된다. 원래 용기가 그것이다. 더 큰 두려움이다.

 

아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모가 보여주는 용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두려움을 뛰어 넘는 용기가 아니라 아이를 잃었을 때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용기를 내야 한다는 말은 아예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용기라는 말 자체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더해서 저자는 모든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용기만 내면 된다고 한다.

 

왜 이런 황당한 결론을 냈을까? 만약 소수의 사람들만 행복할 수 있고, 그들만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면 인정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라니.. 참으로 책상머리에 앉은 사람들이 하는 너무도 이론적인 결론이다.

 

이해는 간다. 철학자라는 칭호를 듣거나 그것까지는 아니어도 대학 교수 정도의 타이틀을 단 사람들은 관계로부터 분리된 채 사회에 봉헌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 이 철학자에게 젊은이가 찾아 온 것처럼 가만히 있어서 관계가 맺어지니까 말이다.

 

가진 능력도 충분하다. 깊은 산속에서 좋은 집 짓고 유유자적으로 살 수 있다돈도 되고, 지식도 되고, 말하는 능력도 된다. 그러니 책에 나오는 철학자처럼 가끔 젊은이에게 좋은 얘기나 해주거나 책이나 써서 사회에 봉헌하면서 살면 된다.

 

그래서 그런지 평생 주변에 학자들이나 대학 교수만으로 채워진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원래 사람은 환경에 종속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데도 그것을 가정한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한참 생각하고 결론 내고 보니 꽤나 어려운 이 책을 그 많은 사람들이 읽었는지 이해가 갔다. 사람들은 이 책을 철학이나 심리학 책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서나 혹은 힐링용 책으로 읽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가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관계로부터 너무 힘들었던 사람들이 그저 잠시 쉬어갈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빈틈을 정확히 찔렀다.

 

실제로 이 책은 자기계발서로 구분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너무 깊게 읽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약간 공허한 느낌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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