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저녁의 구애

아이루다 2018. 3. 16. 08:15


책을 읽는 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지가 벌써 2년은 넘은 듯 해서, 요즘은 자의적으로 책을 골라서 읽는 경우가 참으로 드물다.

 

지난 연말에 아내가 지인들에게 책을 선물하겠다고 해서 같이 서점에 갔었을 때 그 유명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오랜만에 고르긴 했지만, 아직도 두어 페이지만 읽고는 그 후로는 한쪽에 팽개쳐 놓은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일주일에 한 번씩 하게 되는 독서모임에서 채택된 책을 읽는, 일종의 타의적인 독서가 요즘 내가 접하는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저녁의 구애 역시도 그런 이유로 인해서 읽게 된 책이다.

 

책을 쓰신 분은 편혜영이란 이름을 가졌다. 이름으로 보아서는 여자분인 것 같고, 글의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 꽤나 민감한 감수성이 내적으로 깊게 숨겨져 있는 분 같았다. 그러다 보니 글에서 건조하기 이를데 없는 무신경함과 어떻게 그런 것을 놓치지 않았을까 하는 민감함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책은 여러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책의 제목인 '저녁의 구애'는 그 중 두 번째로 나오는 단편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제목이 '토끼의 묘' 였는데, 나도 그 단편 속 주인공처럼 도심의 어느 곳에서 토끼를 우연히 주어서 키웠던 적이 있었다는 경험으로 인해 끌렸었다.

 

아마도 이 단편집들은 사람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반응이 나타날 듯 하다. 대략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독서 모임에서 이 책에 대한 토론회를 했을 때도 그랬다.

 

개인적으로 책을 보고 나서 떠오른 단어들만 나열하자면, 어두움, 지루함, 반복, 절망, 외로움, 타인, 소외, 분리절망 등등 정도가 될 듯 하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난 후 기분이 좋아지거나 하는 책은 아니다. 단지 책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와 독백을 통해서 아예 모르고 있었거나 잊고 있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나야 워낙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라서 딱히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지는 않았지만, 어떤 분들은 그것을 꽤나 강하게 느낀 듯도 했다.

 

각자 단편들은 다양한 주인공과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져 있지만, 사실 대부분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각자가 단편이면서 결국 한 편의 장편 소설이 된다.

 

사람들이 매일 살아가는 하루를 보통 '일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일상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뉜다. 하나는 일상의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의 지루함이다. 그런데 이렇게 반대가 되는 둘의 입장은 서로 옳다.

 

일상은 행복이 될 수도 있고, 일상은 지루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구분되고 있을까? 일상의 행복은 일단 책하고는 거리가 한참 머니 그냥 지루함만 보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지루함이다. 매일 반복되는 것이 지루한 것이다. 토끼를 주어오기도 하고, 400km나 떨어진 곳에 꽃배달을 하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고, 시골로 전근을 가거나 도시로 전근을 가지만 결국 일상은 여전히 지루하다.

 


이 지루함은 도대체 왜 생겨나는 것일까?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 삶의 목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는 것이다. 나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 그 자리에서 겨우 버티거나 오히려 뒤로 물러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에서 감당해야 할 두려움을 모두 타의적으로 해결하려 했기에 그렇다. ,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지 않고 남에게 맡겼다. 어떤 회사를 들어가는 것도, 먼 곳에 꽃배달을 가는 것도, 대학교 건물의 지하 복사실에서 제본을 해주면서 살아가는 것도 그렇다.

 

내용물도 모르고,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시키는 대로 먼 곳까지 큰 자루를 옮기는 두 사람도 그렇다. 곧 출산을 할 예정인 아내와 지방 현장으로 전근을 가서 결국 커다란 개를 죽이고 스스로 죽음을 불러오는 한 남자도 그렇다.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질질 끌려가고 있다. 자신의 두려움을 스스로 감당하기가 너무 겁이 나서 그저 누군가 미리 정해준 대로 살아간다. 혹은 당장 눈 앞에 놓인 두려움만 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지루함의 유일한 이유이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이런 형식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자신이 매일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의 의지일까? 이것은 정말로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을 점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형식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외부 자극에 자신을 맡기는 행위이다.

 

TV, SNS, 독서, 영화, 대화 등등 무엇인가 자신을 자극해주거나 혹은 멍한 상태로 끌어 낼 수 있는 것들을 매일 매 시간 하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틈이 나면 두려워서 그렇다. 그러니 틈을 없애야 한다. 그것을 위한 가장 흔한 방법이 시간을 없애는 일이다.

 

설령 그런 행위들을 통해서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더라도 별로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노예가 노예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이 얼마나 무거운지, 얼마나 빛나는지 서로 자랑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타율적인 삶에 너무 익숙해지게 되면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 그래서 남이 시키지 않은 일, 남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하지 않고 살며 시키는 일을 해내는 즐거움에 살아간다. 또한 자신과는 달리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왜 자신처럼 그렇게 시키는 대로 살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리고는 매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그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인 것인가?

 

그것은 그저 어딘가에서부터 전화로 전달받은 지시사항을, 내용물도 모르고 지금 가는 곳이 목적지가 맞는지 조차 모른 채 커다란 자루를 옮기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그래도 월급은 나오는 것이니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희망의 존재이다. ,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를 통해서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존재는 죽는다. 그리고 희망이 조금만 남아 있는 존재는 지루함을 느낀다.

 

이 책은 답을 주지 않는다. 잔뜩 문제만 제시하고 끝난다. 너의 지루함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고 시킨다.

 

그러니 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사실 이런 질문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책은 의미가 있다. 답은 주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질문이 있음을 알 수는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답을 찾고 싶은가? 혹은 찾고 있는가?

 

기회가 된다면 책의 저자에게 자신이 낸 질문의 답을 스스로는 어떻게 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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