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늑대의 살갗 아래

아이루다 2018. 7. 19. 09:53

 

몇 달 전에 넷플릭스를 가입하고는 나서, 게임을 해보려고 사놨지만 몇 년 째 놀고 있던 XBox TV를 연결해서는 틈틈이 보고 있다.

 

넷플릭스에 대해서 누군가는 가격 대비 만족스럽다고 하고, 누군가는 볼 만한 것이 너무 없다는 불만을 늘어 놓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사실 따져보면 볼만한 것과 볼만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겠는가?

 

그나마 나에게 각각의 작품들마다 차이가 있다면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도저히 보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멈춰야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고 끝까지 볼 수 있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니 봐지면 보는 것이고, 보기 힘들면 다른 것을 보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매주 새로운 작품들이 추가되고 있는 넷플릭스 서비스가 딱히 비싼 것도 아닌데 내가 불만을 가질 것은 없다.

 

더군다나 넷플릭스는 내 개인적인 관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작품 출처의 다양성이다. 상영되는 영화나 TV에서 방영되는 외화들은 거의 대부분이 미국 작품 위주이다. 그것에 반해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는 넷플릭스는 기본적으로 미국에서 만든 작품들이 많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외의 나라들에서 만든 작품들이 꽤나 많은 편이다.

 

그리고 오늘 얘기할 주제로 삼은 '늑대의 살갗 아래' 라는 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이 작품은 바로 스페인에서 제작된 영화이다.

 

비록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되고 있는 작품 정도만 본 경험이 있지만, 유럽 영화나 드라마들은 미국이나 우리나라 그것에 비해서 조금 다른 관점이 보여진다. 그것은 바로 사실주의 추구이다.

 

어떤 경우는 그 사실주의가 너무 심해서 화면을 통해서 진짜로 냄새가 전해지는 느낌도 들기도 했고, 영화 속 추위가 느껴진 적도 있었다. 오늘 얘기 할 이 작품도 사실주의 측면에서는 꽤나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영화 줄거리는 딱히 설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검색을 해보니 다음의 영화 줄거리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만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산에 홀로 사는 사냥꾼이 아들을 얻기 위해 한 집안의 자매를 데려와 함께 살다가 자살하는 극영화'

 

이 설명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화 내용이 이것으로 끝이다.

 

이 영화는 깊은 산골사람이 사는 마을이라고 부를만한 곳으로부터 족히 이틀을 걸어가야 하는 곳에서 - 마을을 가려면 중간에 한번 노숙을 해야 한다살아가고 있는 젊은 남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렇게 살다가 아이를 얻기 위해서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죽고 만다. 그래서 그 여자의 동생을 데리고 온다.

 

남자의 하루는 생존 그 자체이다. 사슴을 잡아서 고기를 충당하고, 늑대를 잡아서 모피를 모은다. 추우니 매일 나무를 구해다가 불을 때고, 먹고 살아야 하니 요리를 해서 먹는다.

 

살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다가 여자를 데리고 오자 밤마다 섹스를 하는 것이 추가 되었다. 그야말로 먹고, 자고, 싸고, 섹스를 한다. 섹스를 하는 목적에는 쾌락도 있지만 아이를 얻기 위해서가 더 크다.

 

이 영화의 감독이 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묻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통해서 '삶은 무엇인가?' 라는 묵직한 질문을 받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같이 영화를 본 아내에게 물었다. 저 남자의 삶과 당신의 삶은 다르냐고 말이다.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영화도 보고, 노래방도 가고, 술도 마시고, 여행도 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직장도 다니는 삶을 사는 아내는 한참 생각하더니 결국 같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결코 같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말이다.

 

아니 머리에서는 같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남자처럼 생존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삶은 그보다 더 뭔가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오랜 설명으로 인해서 그렇지 않음을 알기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을 내가 모를 리가 없다. 가치로 인해서 생겨나는 행복이 얼마나 큰데 어떻게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내는 영화 속에 나온 대사 하나를 기억하고 말했다.

 

'이곳은 살기에 힘들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라는 말이다.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대신 억지로 끌려 온 여자에게 남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그렇게 표현했다.

 

나도 그 대사가 기억이 났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살고 있던 곳은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거의 없는, 그래서 사는 것이 힘든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불편한 것들이 참 많아 보였다.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다. 작은 밭농사를 지어서 채소를 충당하고, 사냥을 해서 고기를 구한다.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만들어야 하고, 아주 가끔 마을에 내려가서 가죽을 팔아 생긴 돈으로 덫과 같이 필요한 물품을 사서 돌아온다.

 

이것이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무한히 반복될 삶이었다. 그러다가 늙고 기력이 떨어져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할 처지가 되면 홀로 쓸쓸히 죽어갈 삶인 것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좀 더 일찍 마무리를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저렇게 사는 것도 삶인가? 힘들게 사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저렇게 주변과 최소한의 교류도 없이 홀로 살아가기에 인간 세상에 그 어떤 영향력도 존재감도 없이 살아가는 삶이 과연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단지 살아있다면 그것만으로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몇 해 전부터 깊은 산 중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하루 밤을 자고 오는 내용을 담은 TV 프로그램들이 인기가 있어왔다.

 

사람들 속에서 고달프고, 그래서 뭔가 한적하고 쉴 만한 곳을 찾고 싶은 현대인들은 그렇게 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자연인이라고 부르면서 바라보았다.

 

그 자연인들과 영화 속 남자의 삶은 무엇이 다를까? 그 자연인들도 역시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주 가끔 그 프로그램을 본 후 그런 생각을 한다. 홀로 지내던 공간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며칠 간의 촬영을 모두 끝하고 떠나간 날, 그날 밤 자연인은 과연 얼마나 깊은 잠을 잘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내 생각에는 그들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다.

 

든 자리는 몰라도 떠난 자리는 표시가 난다고 했다. 그래서 잠시라도 누군가 머물다가 간 자리는 숨겨졌던 외로움과 고독을 상기시키는 가장 치명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나는 그 남자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남자의 삶이나 자연인의 삶이나 내가 살고 있는 삶에서 그 어떤 차이도 느끼지 못한다.

 

나 역시 그저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아내와 함께 도시에서 살고 있고, 그들의 삶에 비해서 훨씬 더 다양한 일들을 하고 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삶과 다른 점은 아무리 오래 동안 생각해봐도 단 하나도 찾지 못하겠다.

 

내 삶이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바뀐 지가 꽤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 나를 눌러왔던 가치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은 지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하루 하루를 존재한다. 만약 지금 불행하다면 겨우 버틴다는 표현을 해야 할 것이고, 그나마 살만하다면 그저 보낸다고 할 것이며, 행복하다면 충만하게 살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에 대해서 그다지 동의는 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태어난 이유가 있고, 살아갈 목적이 있길 바라고,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어하니까 말이다.

 

또한 그렇게 사는 것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단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살기엔 너무 멀리 왔다.

 

더운 날들이다. 예보를 보니 한참 더 더울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를 보내는 것 자체가 더욱 중요해진다. 어쩌면 우리가 의미나 가치를 찾고 싶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먹고 살만하고 시간이 남아서 그런 것 같다.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너무 배가 고프면 가치고 뭐고 아무런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말이다.

 

* 수염이 덥수룩 해서 그렇지 영화 주인공 남자는 꽤나 잘 생겼다. 가끔 디카프리오 느낌도 났다. 찾아보니 나름 스페인의 청춘스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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