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아이루다 2019. 9. 4. 09:17

 

이 책의 존재에 대해서 알기는 꽤나 오래 전이다. 최소 4년 이상은 된 듯 하다.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읽게 되었다그것도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추천된 책이라서 읽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후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좀 더 명확히 이해가 갔다. 이런 종류의 책들은 전체적인 문제점에 관한 설명들은 매우 깊게 공감이 가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들이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보면 다소 부족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틀렸다는 입장이다. 예전에 '미움 받을 용기'가 그랬었다.

 

일단 공감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먼저 말해보겠다.

 

이 책은 빅터 프랭클이란 정신분석학자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겪었던,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전에도 이미 여러 번 그 수용소의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면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을 읽다가 보니 또 다른 느낌이 났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내가 22살이 되었던 시절 군대에 입대를 한 후 제대를 했던 그 30개월의 시간이 떠올랐다. 물론 나는 아우슈비츠 수준의 비참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곳은 나에게만큼은 강제수용소와 다름이 없었던 곳이다.

 

그래서 나 역시도 이 책에서 말하는 세 단계를 약하게나마 경험했다.

 

나는 논산 훈련소와 같은 전문적인 신병훈련소를 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단 직속 훈련부대로 입대를 했다. 그래서 처음에 춘천에 가서 며칠 대기하다가 멋진 관광버스를 타고(당시엔 좋은 버스를 탈수록 나쁜 곳을 간다고 했었다!) 두 시간이 넘게 걸려서 어딘가를 도착했다. 가는 도중 선잠을 자다가 38선이란 표지판을 봤던 기억과 한참 버스가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분 동안 단 한 채의 인가도 보이지 않는 기괴함도 경험했다.

 

나는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혀 어디쯤일 줄 아무런 상상도 가지 않는 그런 곳에 도착했다.

 

어딘가에 도착하자마자 밖이 시끄러웠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말에 따라서 빠르게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는 도중에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조교들은 - 당시엔 그들이 우리처럼 징병된 군인인줄도 몰랐다머리에 조교라고 써져 있는 헬멧을 깊게 눌러써서 눈 자체가 보이지 않은 모습을 한 채 내리고 있는 우리에게 빨리 이동하라면서 한대씩 쳤다. 이미 겁을 먹고는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뛰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식당이었다그 후 30분만에 200명이 넘는 인원이 식사를 마치고 커다란 강당에 모여서 밤 10시가 될 때까지 사단장에게 보고할 훈련을 했다. 이제 갓 입대한 신병들은 몇 시간의 동안의 구타와 단체기합을 통해서 전체가 모두 동일한 동작을 할 수 있도록 강제적으로 맞춰졌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한참 그렇게 우리를 엄청나게 괴롭히다가 조교 중 한 명이 갑자기 한 가지 제안을 했던 기억이다. 지금이라도 너무 힘들어서 못 견디겠으면 손을 들으라고 했다그러면 그 사람은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놀라운 제안에 몇 명이 손을 들었다하지만 그들을 결국 앞으로 끌려나가서 나가서 우리를 대표해서 엄청나게 맞았다. 그 당시 내가 있던 그 공간은 정말로 누구 하나 죽어도 아무 문제가 없이 지나갈 수 있을법한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이 과정이 나에게는 첫 단계인 절망이었다.

 

책에서 말한 두 번째 단계인 일상의 적응은 놀라웠다. 내가 입대한 부대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열악하기가 그지 없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아예 수도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개울물로 해결해야 했다. 심지어 먹는 물 조차 개울물을 받아서 먹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있던 강원도 물은 워낙 깨끗해서 그냥 먹어도 별 상관은 없다. 물맛도 좋다). 아무튼 따뜻한 물을 쓰는 것은 거의 힘들었고, 개울물의 특징상 위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데 밑에서 그 물로 이를 닦고 입을 헹궈야 했다.

 

겨울조차 그렇게 씻었다. 물론 나의 이런 고생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군인들 공통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가 겪은 아우슈비츠에 비하면 엄청나게 좋은 곳이기도 했다. 적어도 먹을 것을 충분히 제공되었으니까 말이다. 맛은 없었지만.

 

세 번째 단계인 자유를 얻은 후의 과정은 다소 모호했다나는 제대를 한 후 바로 복학을 해야 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군복무는 이미 정해진 기간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저자의 표현처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용소 생활' 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은 없었다. 그러니 더 그랬을 것이다.

 

단지 책에서 나온 어린 농작물을 짓밟는 장면은 꽤나 공감이 갔다. 나 역시도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이 세상에 대한 화가 나긴 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나는 억지로 군대에 끌려가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이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군생활이 어느 정도 적응되는 시기인 1년쯤 지나자 사라졌다. 사실 좀 부끄럽기도 했다.

 

또 한 꼭지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저자는 책의 후반 부분에서 로고테라피라는 자신이 만든 일종의 치료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한 설명인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개념 하나를 집어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실존적 공허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 언급되었는데, 요즘 사람들이 겪는 많은 문제들이 바로 고민과 권태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내가 그 동안 써왔던 용어로 치환을 하면 바로 두려움과 지루함이 된다. 그러니까 고민은 두려움이고, 권태는 지루함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앞으로 사람들의 여가시간이 더욱 더 많이 늘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실존적 공허 현상은 더욱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우울증과 근거 없는 공격성,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중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원래 두려움은 생존에 관한 영역이다. 그래서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다. 아니, 의미를 가질 필요조차 없다. 단순히 숨을 쉬는 것이나, 밥을 먹는 것에는 딱히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냥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 사실 의미가 없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바로 죽게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권태나 지루함에 관한 것은 반드시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해야 할 의미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찾지 못하면 결국 공허함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 열심히 했는데 그것이 무의미하면 얼마나 공허하겠는가?

 

이런 식으로 두려움이 사라진 후 지루함의 시대가 열렸을 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삶의 의미를 갖기가 힘들게 되며, 그런 식으로 삶의 의미가 퇴색될수록 결국 엉뚱한 것들로부터 그것을 채우려 하게 된다는 점을 저자는 매우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결국 우울증, 집착, 중독 등이 모두 권태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을 계속해서 죽이는 연쇄 살인범들이나 다양한 성 도착증을 보이는 사람들, 과도한 중독서을 보이는 오타쿠 등의 출현이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가 권태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공감 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이어지는 이 분의 해결책 부분에 대해서는 그리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지루함이나 권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할 수가 없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은 - 물론 찾으면 좋겠지만 -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이것은 사실상 인간이 인간 사회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 사회에서 교육받고 자라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국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고 만다. 그리고는 그저 동물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별도의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삶을 사는데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어차피 인간 사회 속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의미나 가치를 추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도 결국 행복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생각들일 뿐이다. 저자는 자신처럼 엄청난 시련을 통해서만 자신에 대한 존재적 의문을 품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원래 행복한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행복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생각을 하게 된다. 혹은 생각 그 자체가 행복한 사람들만이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다.

 

그들은 그야말로 생각을 잘하니까 생각을 하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남보다 잘하는 것을 할 때 행복해 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생각을 하는 존재들은 시련에 빠져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거나 혹은 남들보다 사고력이 뛰어나 생각을 하는 것이 행복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보통 철학자들이 그런 삶을 산다.

 

그리고는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그러니 누구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행복한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을 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저자처럼 아우슈비츠에 있었다고 해도 그리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 그런데 어떻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존재적 의문을 품고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런 생각 자체가 결국 편협한 관점일 뿐이다.

 

또 하나 사람의 인격을 고매한 인격과 미천한 인격으로 나누는 관점도 그리 공감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이 원래 생존을 위한 존재라는 것 자체를 무시한 편견이다.

 

사람이 살아남는 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남의 것을 잘 뺏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과 잘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 중에서 누가 더 생존에 유리한가 여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이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이런 두 가지 특징은 - 주로 선과 악이란 개념으로 갈리긴 하지만 - 각자 서로 다르게 생존에 장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인간에게 두 가지 성향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 두 성향을 가지고 있다. 단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어느 쪽 성향이 더 잘 나타날지 여부는 환경적 요인에 달렸다. 그래서 보통 잘사는 환경이면 남과 잘 지내는 쪽으로, 못사는 환경이면 남의 것을 뺏는 쪽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만약 남의 것을 잘 뺏는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면 지금 세상은 그런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남에게 잘해주는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었던 역시나 그런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징은 상황마다 서로 다르게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도 책의 초입부에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된다는 표현을 했었다. 그리고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이것은 그저 남을 돕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과 남에게서 뭔가를 뺏을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 이 두 종류 사람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그런 행복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 남을 돕는 행복은 '인간적인 것', '선한 것' 이라고 칭하고, 남에게 뺏는 행복은 '야만적인 것', '악한 것' 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썼다. 아주 소수이지만, 분명히 그런 상황에서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보면 '인간성 유지'는 단순히 단계적 문제로 보인다. 내가 갔다 왔던 군대에서는 반쯤은 인간적이었었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신병 훈련소 시절엔 90%이상이 비인간적이었고 나머지가 인간적이었다. 결국 힘들수록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좀 더 열악한 상황이 되면 될수록 인간적인 사람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정도 되면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우슈비츠가 정말로 마지막 지옥이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심각한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저자가 예를 든 가장 '인간적인' 사람인,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은 콜베 신부조차도 동료를 위해서는 언제라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자신들을 괴롭히는 나찌 장교를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다면 그 사람이 누군지 상관없이 중요해야 하지만 만약 신부가 죽어가고 있는 악날한 나찌 장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장기를 기증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못할 수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언젠가는 여전히 인간적인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의 숫자가 0이 되는 시점이 오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은 견딜만한 수준일 때까지만 한정된다.

 

저자가 한 단계만 더 나갔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어떤 의미가 되는 것,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써 사는 것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결단을 내리고, 미래의 목표를 정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1차 해결책이라면, 2차 해결책은 스스로 의미를 내려놓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단계로 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왜 의미가 있어야 할까? 또한 왜 의미가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할까? 오히려 삶이 의미 있어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 모든 문제가 생겨나지 않을까? 그저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아무런 기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더 궁극적인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가지고 싶어서 그 모든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 않을까? 저자의 설명처럼 삶이 의미 있고 싶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과잉의도(hyper-intension)”가 아닐까?

 

우리는 그저 행복하면 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행복하지 못하니까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다. 행복하지 못하니까 중독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매일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삶,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어야 한다. 물론 의미나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행복한 삶의 한 방편이니까 해도 된다. 단지 그것만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운동 열심히 하고, 잘 놀고, 뭔가 열심히 할만한 것을 찾아서 하면 된다. 그것이면 삶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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