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용서의 종류

아이루다 2017. 11. 1. 09:19

 

세상을 살다가 보면 기분 상하는 일이 많다. 길을 가다가 우연한 사건에 의해서 그렇기도 하고, 밥을 먹으로 들어간 식당 안에서 그럴 수도 있다. 그래도 그나마 이런 것들은 단발성이지만 아닌 것들도 많다.

 

오래된 친구와의 갈등이 생겨서 힘들 때가 그렇다. 또한 가장 믿고 살아야 할 가족간의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가 그렇다. 이런 문제들은 앞의 것처럼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삶을 끝없이 괴롭히게 된다. 그래서 결국 불행해진다.

 

사람들의 삶은 보통 갈등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서 다툼이 생기고 그 다음으로 어떤 식으로든 화해를 통해서 그 갈등을 마무리 하는 과정 속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이런 과정 중에서 비온 뒤 땅이 더 굳듯이 관계가 더욱 더 튼튼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갈등이 이렇게 아름답게 끝나지는 못한다. 그래서 어떤 갈등은 화해가 아닌 절대로 풀리지 않는 앙금을 남긴 채 마무리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절친이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되기도 하고,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기도 한다. 형제가 원수가 되기도 하고, 부모와 자식간이 평생 보지 않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화해는 정말로 중요하다. 갈등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화해만 제대로 해 낼 수 있다면, 갈등은 관계를 더욱 더 돈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일반적으로 화해란 다툰 주체가 서로에게 자신이 잘못을 했다고 인정하는 행위인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화해가 갈등을 풀어내는 가장 좋은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그 시작에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이 먼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라서 쉽지는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단 한 번의 갈등으로 인해 오랜 시간 맺어 온 관계를 끊을 수 없으니 사실 좀 억지로라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만 지나고 나면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과거의 관계로 되돌아 갈 수도 있다. 아니, 더욱 더 좋은 관계로 발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근본적으로 힘들 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은 거의 없고, 오직 상대의 잘못에 의해서 갈등이 생겨났을 경우가 그렇다. 화해를 하려면 상호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데, 도대체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인정할 것이 없으니 화해를 한다는 것은 그저 상대가 온전히 패배를 선언하는 길뿐이다.

 

그나마 상호 잘못을 인정할 때는 자존심이 상하긴 해도 상대도 같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니 억지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상황이고, 그것을 그 사람이 인정해야 할 처지라면, 그 사람은 그것을 일종의 굴욕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쌍방간의 문제가 있을 때는 화해가 쉬우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했을 때는 오히려 화해가 어려워지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용서이다. , 용서란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처를 준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나 좋은 용서임에도 불구하고, 늘 좋게 끝나지만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상 용서가 잘못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그래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용서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여지가 있다. 그러니 자신의 용서를 좀 더 정확히 판단해 봐야 한다. 그것을 실패하게 되면, 훗날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심한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용서의 첫 번째 유형은 형식적 용서이다. , 상처로 인해 생겨난 내면의 분노는 그대로인데, 어떤 필요성이나 사회적 압박에 의해서 용서하는 척을 하는 것이다그런데 실제로 자신도 그것을 믿기도 한다.

 

아내나 남편의 바람을 알고 난 후, 그것을 용서할 때가 그런 경우가 많다. 배우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았는데, 이혼이 겁이 나니 스스로 용서를 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이 살긴 하지만, 끝없이 상대의 전화기 속 내용이 궁금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혹시 어떤 여자나 남자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지 촉각이 곤두선다. 그래서 매 순간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치민다.

 

이것이 용서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전혀 용서가 되지 않는 용서이다. 이런 경우는 보통 자신의 인격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 벌어진다. , 자신은 전혀 그런 것들을 용서할 그릇이 안 되는데, 사회적으로 주입된 용서의 가치를 마음에 새긴 채, 마치 자신의 마음이 그런 것쯤은 품어 줄 수 있다고 착각을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이 용서는 모든 용서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용서가 된다. 그래서 차라리 화를 내고 싸우는 편이 더 낫다. 하지만 자신은 용서를 했다고 믿기 때문에, 화도 내지 못한다. 그리고 점점 그 속은 썩어 들어간다.

 

용서의 두 번째 유형은 자신이 압도적 입장이 되었을 때 하는 용서이다. 즉, 이것은 자신이 용서할 상대와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를 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할 수 있는 용서인 셈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착각은 아니다. 이 용서의 문제는 용서를 한다고 해서 상대가 갑자기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용서의 가장 큰 특징은 우월성이다. , 자신이 상대에 비해서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모두 더 나은 위치에 있을 때 용서가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용서를 받는 쪽은 이것을 온전히 굴욕감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수준 차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종의 동정이기 때문이다. 마치 거지를 불쌍히 여기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설령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상대의 그런 용서의 태도로 인해서 큰 반발감이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당장은 용서를 받는 것이 유리하니까 상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내면엔 언제든 다시 상황을 뒤집고 싶다는 욕망이 불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이 용서는 기본적으로 불안정하다. 언제 다시 그 용서를 해준 행위가 다시 자기 자신을 찌를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나 불운하게도 그런 두 번째 배신을 경험하게 되면, 결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서 처절한 복수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 이 용서는 자신이 우월적 지위가 유지될 때만 유효한 셈이다.

 

용서의 세 번째 유형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또한 자신도 그와 똑같은 인간임을 자각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상대를 용서하는 것 동시에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용서가 진짜 용서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용서는 사실 형식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런 종류의 용서는 매우 힘들다. 자신을 정말로 오랫동안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켜봄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한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후 할 수 있는 용서이다.

 

그럼에도 이 용서는 경험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이런 용서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후로는 영구히 변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용서는 앞이 두 가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비가역적인 변화이다. , 한번 용서를 하게 되면, 절대로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용서이다. 그래서 만약 정말로 용서를 경험하고 싶다면 바로 이런 용서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용서가 가진 진정한 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의 네 번째 유형은 그것에 대한 잊음이다. , 자신을 상처 입혔던 존재에 대한 완벽한 무관심이다. 그래서 이것은 일종의 초월을 의미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좌의 반대는 우가 아니다. 좌의 반대는 위나 아래이다. 무엇인가의 반대는 그것의 반대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무엇인가에 대한 완벽한 반대는 그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상황이어야 옳다.

 

그러니 사랑이 완벽히 무의미해지는 것은 그 대상이 있는지 조차 모를 때이다. 또한 좌가 완벽히 무의미해지는 것은 위나 아래가 될 때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으로써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나 이것을 의지적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것을 용서의 한 종류로 끼워 넣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세월의 망각이 주는 능력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배신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랬던 기억조차도 희미해진다. 그래서 죽을 날이 가까워 오면 자신을 배신해서 상처 입혔던 사람이라도 자신을 기억해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다.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초월이 일어난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게 되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앙금처럼 마음 속에 남는다. 그래서 이것은 둘 중 하나로 반드시 처리해야만 마음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그것 중 하나가 복수이고 그것을 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것이 바로 용서이다. 이 둘 모두 할 수 있다면 일단 복수가 더 좋다.

 

하지만 복수는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수를 하고 싶지만, 하지는 못하는 상태에 머무른다. 그러니 끝없이 이것은 자신을 괴롭힌다. 그 상처를 건드리는 계기가 있으면 사정없이 분노가 솟구친다. 그래서 이것은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다.

 

그러니 용서를 해야 한다. 자신을 상처 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해야 한다. 나를 가엽게 여기고, 나를 이해해주며, 나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용서가 시작된다. 이것은 상대를 가엽게 여기고, 상대를 인정해주고, 상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용서는 나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상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쩌면 그 상대는 자신이 상처를 입혔다는 것조차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오직 나 자신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운이 좋다면,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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