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존감 키우기

아이루다 2017. 10. 28. 07:14

 

지난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라는 글을 통해 자존감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했었다. (http://blog.daum.net/lunenstar/7641004) 그리고 이번엔 지난 글에서는 부족하게 다뤄진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개인적으로 서점이나 많은 인터넷 글에서 자존감을 키우는 방법으로 설명된 방법들에 대해서 이해가 가면서도 안타까움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 소개되는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들이 주로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라든가, '자신을 사랑하라' 든가, '남들과 비교를 멈춰라' 등의 매우 피상적인 설명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생각한다고 해서 가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남들과 비교를 멈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조언들을 쉽게도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인생에 있어서 돈은 그리 중요한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것은 돈이 어느 일정 수준까지는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내일 먹고 사는 것이 걱정인 사람에게는 그야 말로 '개소리'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당장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뭔가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동 경험과 행복 경험, 이 두 가지가 유일하게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거나 낮은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모든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경험들을 하고 산다. 또한 행복하기도 하다. 그런데 왜 자존감은 높아지지 않을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경험을 한 행동의 목적이 잘못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자신이 한 어떤 행동의 목적이 잘못되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어떤 행동의 목적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주로 이기적 행동을 의미한다. , 나만을 위해서 하는 행동들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이득을 주지만,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인정을 받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득이 될 때, 그것을 인정해준다. , 나도 좋고 남도 좋은 행동을 할 때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다.

 

자존감은 갑자기 어느 날 거울을 보고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라고 중얼거린다고 해서 생겨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는 절대로 혼자서 높일 수 없는 것이다. 자존감은 타인의 평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존재감' 이라고 부른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존재감을 통해서 자존감을 만들어 내게 된다절제력, 인내력, 용기 등의 덕목을 지키면서 살다가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존감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정은 반드시 타인을 통해서만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잊혀진 인정의 주체는 그 누구보다도 강력하며 또한 효과적이다. 그 존재가 바로 자신이다. , 자신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면, 사실상 남의 인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그다지 좋게 평가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타인의 평가가 문제가 될 가능성보다 그 자신이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를 하여서 생기는 문제가 더 많을 수도 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겨날까? 남들을 그나마 인정을 해주는데,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일,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이 생겨날까?

 

그 이유는 바로 어린 시절부터 사회로부터 끝없이 행동의 정당성에 대해서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에 따르면, 부지런함, 정직, 용기, 인내력, 절제력, 정의로움 등등 사회적으로 좋은 가치라고 알려진 것들을 최대한 지켜야 하는데, 사실 누가 이런 덕목들을 제대로 지키고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스스로가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자책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서 결국 자존감이 하락하고 만다.

 

자존감의 이런 특징으로 인해서사회적 가치에 대한 주입이 훨씬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 그렇지 않은 서양에 비해서 자존감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밖에 없다. 반면에 개인의 가치와 개성을 존중해주는 서양 사람들의 자존감이 훨씬 높은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개인적으로 비도덕적으로 살아도 훨씬 더 자존감이 높고 행복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현실이 희망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그저 자신의 생각만 고쳐먹어도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자존감을 높이는 조언들이 그런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더 신뢰하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 질 수는 없다. 뭔가 하려면 자신을 설득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근거를 찾기는 너무도 힘들다. 이미 머리 속에는 사회에서 주입한 가치가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보다 게으른 사람을 보면 혀를 차고, 이기적으로 구는 사람을 보면 재수없어 한다. 자신보다 비겁한 사람을 보면 비웃으며 즐거워하고, 인내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면 그것도 못 참냐고 핀잔을 준다.

 

자신도 남들로부터 그런 평가를 받지만, 그 자신도 남들을 그렇게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정리하며, 자존감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열심히 살고, 부지런하고, 용기 있고, 책임감 있게 사는 것이다. 그것의 유일한 문제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말에 의문을 가지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주변에 이런 도덕적 가치와 별로 상관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자존감은 높아 보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왜 그럴 수 있을까? 혹시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존감이 진짜로 높을 수도 있다. 그 근거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과 다른, 서양사람들의 자존감에서 찾을 수 있다.


 
, 사회적 가치와 개인적 욕구가 충돌이 될 때, 확실하게 개인적 욕구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 비겁해야 내가 행복하다면 그냥 비겁해지는 것이다. 게을러야 내가 행복하다면 그냥 게을러지는 것이다.

 

앞에서 자존감은 사회적 가치 기준치에 얼마나 도달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가치 기준점을 과연 누가 정했느냐 이다.

 

물론 사회가 정해주긴 했다. 하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는 오직 자신이다. ,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도달 여부를 평가하고 있다. , 얼만큼 만족스럽게 도덕적 기준점에 도달했느냐에 대한 자신의 평가에 따라서 자존감이 결정되고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개인주의가 더 발달한 서양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자존감이 높고 행복한 근본적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힌트 하나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그저 그 기준점을 낮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거기엔 '나는 어떤 사람이야' 라는 수준에 대한 자부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마다 '나는 정직한 사람이야',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야', '나는 이타적인 사람이야',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야' 라는 평가가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자존감은 낮고 불행하지만, 자부심과 자존심은 가득하다.

 

그러니 그것을 내려놓으려면 그나마 자신을 버텨주던 자부심이 상처를 입기에 견디질 못한다. 더 해서 한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기준점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끝없이 판단하고 비난해왔다는 점이다. 특히 남을 평가할 때는 자신에게 적용했던 기준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는 점이 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준점을 내려 놓은다는 말이 가진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일이 되고 만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비난했던 사람들이, 그것이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비난을 하고 있는 자신이 문제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기준점을 낮추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낮은 자존감으로 자기 자신도 비난하고 더해서 세상 사람들은 더 크게 비난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시점에 정말로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사회적으로 정의된 많은 좋은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한 진정한 내면의 답을 얻을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이 된다.

 

아무리 사회적 가치가 좋아도,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방해한다면 그냥 치워버려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범법행위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냥 게으를 때는 게으르고, 비겁할 때는 비겁하고, 거짓말을 해야 할 때는 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 비난하는 것을 멈추면 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행복은 도덕도 양심도 아니다. 그냥 기분 좋은 것이다. 그래서 거기엔 아무런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가 없다. 그저 행복해지기만 하면 되니까 뭐든 가능해진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죄를 지으면 죗값을 치러야 하니 불행해져서 그렇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은 그저 불행에 빠지지 않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행복하고자 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근거가 필요하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라는 절대적 정당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먼저 죽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정당방위로 처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엄청난 죄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죽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심지어 전체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전쟁에서는 많이 죽일 수록 영웅이 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판단 기준점을 낮출 수만 있으면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행복해지면 또 다시 자존감이 높아지는, 일종의 선순환이 생겨난다.

 

원래 그저 행복하기만 해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존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치화 되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로 인해서 외부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할 팬클럽 문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특정 가수가 너무도 좋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너무도 행복하기에 그것에 대해서 엄청난 가치를 느끼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그 가수로 인해서 전혀 행복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도 이상해 보일 뿐이다.

 

복잡한 설명을 했지만,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단순하다. 사회적으로 정의된 가치 기준에 따를 능력이 없으니, 그것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점을 낮추서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다.

 

단지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 즉 자부심에 가득 차 머리 속에 상상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날려야 하는 힘든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 자신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주체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믿고 있는 '되고 싶은 나' 인 것이다. '현실의 나' '되고 싶은 나' 사이의 간극이 모든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되고 싶은 나'가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 이것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머리 속에 있는 되고 싶은 나에 대한 욕망이 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되고 싶은 나를 현실의 나 수준으로 낮춰서 자존감이 높아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힘든 과정이겠지만, 충분한 시간을 통해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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