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나를 경험한다는 것

아이루다 2017. 10. 10. 08:23

 

아기 물고기가 물었다.

 

"아빠, 바다는 어디에 있는 거에요? 어제 읽은 책에는 나오는데, 도대체 어떻게 바다에 갈 수 있죠?"

 

아빠 물고기가 대답했다.

 

".. 나도 잘 모르겠구나. 나도 바다는 말로만 들어봤을 뿐, 한번도 본적이 없구나."

 

아기 물고기가 다시 물었다.

 

"그럼 바다를 갈 수 있는 방법을 아는 분은 아무도 없나요?"

 

아빠 물고기가 대답했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많은 경험을 하신 촌장 할아버지에게 물어보거라. 그분이라면 혹시 아실지도 모르지."

 

아빠의 대답에 아기 물고기는 희망을 가지고 촌장 할아버지 물고기를 찾아갔다.

 

"할아버지. 바다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바다에 갈 수 있죠?"

 

촌장 할아버지 물고기는 아기 물고기의 질문에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고 바라보기만 했다.

 

"바다는 말이야.. 지금 네가 있는 이 물 속이란다. 이곳을 바로 바다라고 부르지."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번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본적이 없다면, 자신이 그것 안에 있음을 상상하기란 힘들다. 우리 인간들이 매일 경험하는 중력도 따로 그런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우리가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스스로 깨우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태어나서 단 한번도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사람이란 존재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그 안에서 이뤄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더해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더 힘들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알고 싶은 대상을 외부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 관찰자가 될 때, 그 대상은 그 진짜 정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에서 죽는 물고기는 평생 바다가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다. 물고기는 아마도 누군가에 낚싯대에 걸려 물 밖으로 나간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평생 자신이 살아온 바다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존재에게 있어서 바다와 같은 것은 무엇일까사람들이 평생 그것에 종속되어 있으나, 그것에 종속되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살다가 죽게 되는 것은 과연 없을까?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라고 부르는 존재이다. , 인간에게 있어서 ''는 물고기에게 있어서 바다와 같다사람들은 평생을 나로 살지만, ''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살다가 죽는 것이 인간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있어서 ''는 절대적으로 ''이다. 이것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의심되지 않았던 진실과도 같은 것이다. 도대체 내가 나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나이겠는가? 이것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런데 혹시 그냥 한번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지금 바닷물 속에 살고 있어서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는 나라고 알려진 어떤 것에 종속되어 있어서 '진짜 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슬쩍 의심해는 것은 너무도 말이 안 되는 일일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물고기는 바다를 안다. 책을 통해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고기는 바다를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번도 감각해보지 못한 것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노을 빛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경험되지 못한 것들은 그저 아는 것으로 남는다. 이런 지식은 경험이 함께할 때 비로소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경험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말은 좀 이상하다. 내가 어떻게 나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경험의 주체가 바로 나인데 말이다. 그것은 마치 돼지가 삼겹살 맛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어떤 것이 주체가 되었을 때,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험의 대상을 객체로 볼 수 있는 존재만이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 대상과 내가 분리되어 있을 때만 그것이 경험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지만, 정작 죽고 있는 당사자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특히 죽음 후는 결코 경험이 불가능하다. 자신이 죽은 후의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나는 나를 알고는 있지만, 결코 나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일까? 어떤 식으로든 나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을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결국 어떤 식으로 간에 나를 객관적 관찰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이것이 가능할까? 혹시 가능한지 한번 상상해보자.

 

물속의 물고기는 아주 잠깐 바다를 경험할 수 있다. 자신이 있는 힘을 모두 다해서 수면을 향해 솟구치면, 잠시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물 밖으로 튀어 올라서 찰나간의 경험을 할 수 있다그리고 그 순간 물고기는 노을 빛에 물든 붉은 하늘과 그와 맞닿은 끝없는 수평선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억은 평생 동안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나 역시 아주 찰나간의 순간이라도 해도 나로부터 벗어나 아주 짧은 순간에 나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위험하다.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오직 목적을 향해 질주할 때수 많은 포식자들의 공격에 노출이 된다. 또한 물 밖으로 튀어나갔다가 지나던 새에 잡혀 먹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은 생존에 반하는 행동이다. , 사는 것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런 행동을 왜 하려고 할까? 아무런 쓸모가 없다. 평생 동안 바다 속에서 살면서 바다를 경험하지 못하고 산 그의 아빠처럼 그렇게 살아도 된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가장 높게 나는 갈매기가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다른 갈매기들은 그런 그를 비웃는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말이다. 그냥 자신들처럼 항구에 떨어진 고기조각이나 주어먹으면서 살면 되지, 왜 그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 짓을 하냐고 조언을 가장해서 비난한다.

 

하지만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그것을 멈출 수 없다. 단 한번이라도 물밖에 나가 바다를 본 물고기가 평생 그것을 잊을 수 없듯이 말이다.

 

그들은 멈출 수 없다. 무엇인가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끌림에 따라 가장 높이 날아 본 갈매기와 물 밖으로 튀어나가 바다를 경험한 물고기는 그렇지 못한 갈매기와 물고기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어떤 경험들은 그 존재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버리니까 말이다. 이것을 각성이라고 부른다.

 


나를 경험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를 단 한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은 전혀 해보지 못한 사람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를 경험하는 각성의 시간을 경험한 사람은 영구히 바뀐다.

 

모든 인간은 나로써 살고 나로써 죽는다. 하지만 나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알긴 하지만 결국 나를 이해할 수는 없다. 살면서 수 많은 것들은 경험하지만, 정작 경험의 주체인 나는 나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계측기계로 전기의 전압, 전류량, 저항을 젤 수 있지만, 그 계측기계에서 표시되는 수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과연 그것을 제대로 해낸 것일까?

 

결국 주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든 종류의 경험이 과연 제대로 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경험을 하고, 판단을 하며, 결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나는 왜 살까?

 

그러니 이 단순한 질문 하나에도 대답할만한 것이 없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단순하다. 죽기 싫기 때문이다.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을 믿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고 굳게 믿어도 지금 죽을 수는 없다. 죽기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살고 싶어서 산다. 그리고 살고 싶으니 가능하면 행복해야 한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그로 인해서 행복은 인간에게 있어서 또 다른 바다가 되고 만다사람들은 평생 행복 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평생을 행복 안에 있길 원하기에 행복을 관찰자로써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행복하고 싶어할까?

 

그래서 이 질문은 던질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것은 높이 날고 싶어하는 갈매기의 꿈과 같다. 인간들은 그 꿈조차도 행복으로 바꿔서 해석하고 노래한다. 하지만 갈매기의 꿈은 우리가 아는 꿈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이 아닌, 존재의 각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이다.

 

하지만 바다는 물고기에게 있어서 너무도 필수적인 것이라서 물고기는 바다를 떠날 수 없고, 그래서 바다를 경험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나란 존재는 각자 자신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필수적인 것이라서 어느 누구도 나를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나를 경험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단 한번도 '내가 누구인지'를 궁금해 할 기회가 없다.

 

지금 이순간, 커피를 먹고 싶은 나, 회사를 가기 싫은 나, 친구를 보고 싶은 나,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있는 나,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나, 공부를 하고 있는 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 나,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나, 화장을 하는 나, 쇼핑을 하고 있는 나, 글을 읽고 있는 나를 경험해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커피를, 회사를, 친구를, 전화를, 영화를, 여행을, 공부를, 스마트폰을, 컴퓨터를, 화장을, 쇼핑을, 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고 있는 주체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다행스럽게 있다. 단지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짓처럼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것이 쓸데없는 짓일까?

 

자신의 마음 속에 생겨나는 수 많은 욕망과 갈등 후회와 걱정을 만들어내고 있는 주체를, 스스로 경험하지 못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수 많은 문제들을 단 한치도 오차도 없이 절대적으로 경험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느끼는 나 자신은 옳은 것일까?

 

도대체 왜 그런 욕망을 가졌으며, 왜 그런 갈등을 겪고 있으며, 왜 그런 후회를 하고, 왜 그런 걱정을 하고 있게 되었는지, 그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왜 전혀 궁금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것도 궁금하긴 하다.

 

나를 경험하는 것은 사실 매일 간접적으로 이뤄지긴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타인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타인을 만날 때는 오직 관찰자의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타인은 나와 그리 많이 다른 존재가 아니기에,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은 누구나 남은 이성적으로 경험하지만, 정작 자신은 감정적으로 경험한다는 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남을 경험할 때는 이성을 통하지만, 자신을 경험할 때는 그저 감정을 느끼는 데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더 행복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들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진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시간이 약이라고 조언해주는 것이다.

 

경험의 주체가 아닐 때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관찰자로써 봤으니까 그렇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 입장에 되었을 때 다른 이들의 이런 조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주체자가 될 때는 오직 감정적 존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나를 경험하는 것은 오직 이성적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감정은 경험의 시작점과 그것의 결과이지 결코 경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나를 경험하고 싶다면 자신을 관찰자의 이성 능력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경험을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해볼만한 가치는 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시간은 남을 것이고, 그 남은 시간은 무엇을 하든 사실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여기에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죽음 그 자체의 비밀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해봐야 안다. 해보지 않으면 알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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