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아를 성장시키지 못한 사람들

아이루다 2017. 9. 27. 09:12

 

이 세상은 행복하기도 하지만, 사실 좀 살기 힘들기도 하다. 삶의 과정 속에서 행복과 불행은 매 순간 교차되면서 우리들 각자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들 행복하니까 산다. 혹은 미래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산다.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니 그냥 두고, 불행한 것만 좀 살펴보자. 웃기는 질문 같지만, 이런 질문을 하나 해보자. 도대체 인간은 왜 불행을 경험해야 할까그냥 계속 행복하게만 살 수는 없을까?

 

뻔한 답이지만, 그것은 안 된다. 사실 불행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불행할 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하면 아무 것도 하기 싫다. 그냥 그 행복 자체에 머물고 싶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면 그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있다간 죽는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 몸과 정신은 결코 행복한 상태에서 머물게 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아무리 좋은 것도 시간이 흐르면 지루해진다. 그래서 결국 불행한 상태에 놓이게 한다. 그 덕분에 우리가 오늘 하루를 더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이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해도, 사실 너무 불필요하게 많은 불행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배고픔이나 졸림 그리고 지루함 등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수 많은 기분 나쁜 상황들은 사실 그다지 생존에 도움이 되질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기분이 상하게 되면 의욕이 떨어져서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거나, 과한 폭식을 하게 되거나, 기분을 풀고자 쇼핑, 술 등을 즐기다가 경제적으로 심한 압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불행은 최대한 막아야 한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기분 나쁜 일들은 최대한 막는 것이 좋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불행을 경험하게 될까?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이 바로 '자아가 받는 상처' 이다.

 

자아의 상처는 배고픔이나 졸림, 지루함과 같은 것은 실체적인 불행은 아니다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을 훨씬 더 괴롭히는 주체이다.

 

요즘은 배고프거나 졸리거나 지루해서 불행한 사람들은 별로 없다. 아주 가끔 그럴 때가 있을지라도 대부분은 금세 회복이 된다반면에 사람들은 거의 매일 자아가 받은 상처를 경험한다. 그런 일은 회사에서, 친구들 모임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끝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한번 받게 되면 오랜 시간 지속이 된다. 하루를 넘겨서 며칠을 갈 경우도 많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지루하면 영화를 보거나 친구를 만나면 금세 해결이 된다. 하지만 자아가 받은 상처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가능하긴 하다. 대신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다른 이의 행운을 질투할 때, 자신의 못난 면을 발견할 때,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다른 이의 잘남에 대한 열등감을 느낄 때, 노력한 일에서 결국 실패할 때, 경쟁 속에서 패배할 때 등등, 다양한 상황에서 자아의 상처가 발생한다.

 

각자의 자아는 그때마다 좌절하고 비하한다. 심각해지면 절망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내면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단지 그 상처가 삶 자체를 심하게 뒤흔들 만큼 크지는 않기에, 그리고 행복한 경험도 어느 정도 하고 살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사는 것 자체가 죽는 것보다도 더 힘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아는 언제나 화약고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언제라도 상처를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좌절, 비하, 질투, 열등감, 분노, 실망 등의 감정은 금세 튀어나와서 사람들을 짓누르게 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인생이다.

 

그런데 이런 뻔한 삶과 조금 다른 형태의 삶을 사람들이 있다. 비록 소수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자아의 상처를 별로 경험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질투심도 거의 없고, 딱히 열등감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아도 그리 심하게 화를 내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누군가는 질투심의 화신이 되고, 내면에 열등감으로 가득하고, 조금만 무시를 받아도 죽일 듯 달려드는데,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충분히 많아 가졌고, 충분히 잘났고, 상황 판단 능력이 뒤떨어져서 그럴까?

 

,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로 드물다. 어떤 사람들인 자아의 상처를 거의 받지 않는 듯 보인다면, 그 사람은 사실 자아가 거의 존재하지 않아서 그렇다. 웃기는 말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자아는 인간의 본질은 아니다. 자아는 마치 각자와 일치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회에 속해 경쟁을 하면 살아왔기 때문에 생겨난 존재이다. , 경쟁이 없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다.

 

자아의 상처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모두 어떤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질투, 열등감, 무시 등등 모두가 그렇다. 그러니 관계가 없다면 자아도 없다.

 

그래서 아주 어린 아이들의 경우엔 자아가 없다. 아마도 이것을 자의식이 없다고 해야 좀 더 이해가 쉬울 것 같기는 하다. 아무튼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의식이 생겨난다. 그리고 자아가 성장한다. 거울 속 자신을 인식하고, 타인과 다른 자신을 인식한다. 그런 식으로 자아는 계속 성장한다.

 

자기 인식과 타인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비교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비교를 하기 시작할 때, 자신이 좀 더 낫고 싶어한다. , 승자가 되고 싶어한다. 이것이 자아가 성장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겪지 못한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그렇다.

 

첫 번째는 타고난 성향이 욕망이 적어서 그렇다. , 선천적으로 자아가 성장할 발판 자체가 별로 없는 경우이다. 이미 말했듯이 자아는 비교와 경쟁 그리고 승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등을 통해 성장한다. 하지만 욕심이 적으면 그런 순환 구조가 일어나지 않는다.

 

두 번째 경우는 타고난 성향은 평범한데, 어떤 이유로 인해서 자아가 성장할 기회를 놓친 경우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과도한 두려움에 노출되어서 그렇다.

 


원래 자아는 두려움이 어느 정도 해결된 후에 발달하기 시작한다. 원래 인간은 무서울 때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자아가 발달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 그런데 운 없게도 그렇지 못할 경우, 심한 경우엔 부모가 그 두려움의 주체일 경우, 아이의 자아는 거의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 매우 강압적인 부모일 경우도 비슷하다.

 

지금부터 이 두 가지 경우를 다시 좀 더 살펴보자. 왜냐하면 또 다시 세분화가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타고난 욕망이 적은 성격일 때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삶으로 나뉜다.

 

일단 능력이 충분한 경우이다. 사실 이때가 가장 좋은 조합이다. 자아가 가진 단점인 비교의 불행을 경험하지 않으면서도 타고난 능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먹고 살기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다. 사실 비교나 경쟁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인한 상처가 있어야 노력하기 때문이다. 패배에 대한 상처가 있어야 이기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타고난 욕망이 적으니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 하게 되면 딱히 더 노력을 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힘들게 하고 싶지가 않다. 그리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경쟁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타고난 능력이 어느 정도 있으면, 먹고 살기에 그다지 문제가 없으니 정말로 행복하게 삶을 살 수 있다. 주변에서도 좋은 평가를 많이 받는다.

 

능력이 부족한 경우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성실하고 욕심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뭔가 하면 꾸준히 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자아로 인한 감정의 요동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다. 욕망이 적으니 뭔가 하려고 무리하게 하질 않는다. 주어진 상황을 그냥 받아들여서 살기 때문에 큰 돈은 벌지 못해도 소소하게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

 

하지만 타고난 욕망이 적은 사람들은 능력의 여부와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치명적 단점을 가지게 된다. 그 단점은 타인에 대한 이해가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점으로 인해서 생겨난다.

 

사람은 원래 욕망의 존재이다. 그렇기에 또한 타인의 욕망도 짐작해 낼 수 있다. 내가 갖고 싶어야 다른 사람도 갖고 싶다는 유추를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그리고 타인의 욕망을 짐작해서 적절하게 채워주는 것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행동 중 하나이다. 생일 선물 하나 줄 때도 그렇다. 그런데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중요한 것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 변화 등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긴 하지만 깊게 사귈 수가 없다.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공감을 하겠는가?

 

상황에 맞는 센스 있는 농담을 하는 능력도 떨어지고, 잘 웃긴 하지만 바보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로 인해서 관계 속에서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게 된다. 좋은 사람이란 평가는 많이 받지만, 딱 거기에서 머문다. 그래서 신뢰 있고한결같긴 하지만,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이제 두 번째 경우를 보자. 타고난 성향은 일반적이지만 어린 시절 너무 과도한 두려움에 노출된 경우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자아는 원래 본능적 두려움이 해결된 상태에서만 성장이 가능하다. 만약 어떤 아이를 어른이 될 때까지 끝없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면, 그 존재는 어린 아이의 수준에서 영원이 멈춰버리고 만다. 엄마의 과도한 참견에 의해서 마마보이가 된 아이들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성향을 보인다.

 

아무튼 어떤 이유든 간에 자아의 성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사람들은 어른이 된 후 큰 곤란함을 겪게 된다. 그것은 바로 어른 수준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다른 어른들과 상대할 수 있는데, 자신은 몸만 어른이 되었지 그 내면은 아직도 어린 아이 수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사는 것에 큰 지장은 없다. 커오면서 인간으로써 어떻게 사는지는 다 배웠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여행을 가고,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 수 있다.

 

기능적으로는 충분한데, 그 내면이 문제가 된다. 여전히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사람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어른이 되어 충분히 힘을 가진 경우이다. 보통은 남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어른이 되어 힘을 가진 경우엔, 자신을 평생 짓눌러 온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된다. ,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아가 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린아이 때와는 다르다. 어린아이 때는 힘이 생겼다고 해도 그것을 쓸 수 있는 대상이 매우 한정적이었고, 혹시나 잘못해서 친구를 때리기라도 하면 부모님에게 크게 혼났다. 그래서 끝없이 그 힘이 억제될 수 있었다그래서 또래의 아이보다 몸짓이 크게 자란 아이는 어린 시절에 폭력성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아무튼 어른이 되어서 물리적인 힘을 가진 채 자아가 자라기 시작하면, 그 힘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자아가 가장 바라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것이다. 원래 욕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는데 억눌렸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다가 그런 힘을 쓸 데가 많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나 아이들의 존재가 그렇다. 그래서 여자나 아이들에게 폭력을 쓴다. 가정 폭력이 이뤄진다이런 상황임에도 어른이 되었기에 들키지 않게 쓰는 요령도 익히고 있다.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대부분 가정에서 폭력을 쓰는 남자들의 내면엔 바로 어린 시절에 겪은 두려움이 존재한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자아가 존재한다. 힘으로써 승리를 하고 싶다는치기 어린 어린 시절에나 가질 법한 자아의 욕망이 그제서야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안다. 물리적인 힘보다 지적인 힘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설령 육체적인 힘을 쓰고 싶다고 해도 자제를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 자아가 성장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것을 참아내기가 힘들다. 힘이 있으니 힘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물론 당연히 다른 힘센 남자들은 건들지 못한다.

 

또 하나의 경우는 그 두려움을 그대로 안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어른이 되었기에 조금씩 독립적으로 변하면서 어린 시절에 겪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자아로 인해서 끝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원래 잘나고 싶어야 높은 절벽에서 다이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잘나고 싶다는 욕구가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자아가 성장하지 못했기에 잘나고 싶다는 욕망이 현저하게 적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겨내기가 무척 힘들다.

 

좋은 점은 있다. 다른 성인들이 겪는 질투, 열등감 등은 거의 경험할 기회가 없다.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감당하는 것도 벅찬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이다. 원래가 그렇다. 먹고 살만해야 비교도 하는 것이다.

 

자아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은 공통적인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이 특징을 통해서 자신을 진단해 볼 수 있다.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다. 자아는 잘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끝없이 자신을 꾸미려고 한다.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사고, 운동을 한다.

 

그런데 자아가 발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욕구를 별로 못 느낀다. 그래서 매우 털털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외모에 대한 무관심 일뿐이다.

 

두 번째 특징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다. 아니, 무관심이 아니라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 자아가 성장하지 못하니 자신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따라서 타인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더욱 문제는 타인의 자아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없다.

 

인간의 모든 이해는 각자의 자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공감능력이 특히 더 떨어진다. 심할 경우 사이코패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도 이런 특징이 드러난다. 분위기에 잘 맞지 않는 말을 하기도 하고, 흐름를 잘 집어내지 못하기도 한다. 분명히 나쁜 사람은 아닌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힘들다. 다른 사람들의 질투나 열등감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받는 상처라는 것 자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왜 저런 것에 질투를 할까? 왜 저런 것에 열등감을 느낄까? 왜 지면 그렇게 화를 낼까? 하고 의문만 갖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는 마치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처럼 느낀다. 아주 미약한 비교를 하고 거의 감지하기 힘든 승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다. 마치 돈이 거의 없는 사람이 거지로 살면서 돈이 뭐가 중요하냐고 묻는 꼴이다. 적어도 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많은 돈을 가지고 살아본 후, 그 돈을 다 기부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매우 안정적이거나 매우 불안한 증상이다. 선천적으로 욕망이 적어서 자아가 성장하지 못한 경우는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자아가 원래 불안 덩어리이니 그렇다. 이기면 한없이 좋아하고, 지면 죽을 듯 군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없으니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려움으로 인해 자아가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자아의 불안정함으로 인해 불안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밑에 존재하는 본능적 두려움 단계에서 머문다. 그래서 사실 불안함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육체적 힘이 세든 아니든, 불안 증세는 동일하다. 단지 아주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 되거나, 별것 아닌 것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성격이 되는 것으로 나뉠 뿐이다.

 

자아는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실 수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욕망을 적게 타고난 경우엔 그냥 그래도 살면 된다. 깊은 관계를 맺기가 어렵긴 하지만, 또 이렇게 저렇게 살아갈 수 있다.

 

반면에 두려움으로 인해 자아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제대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과도한 폭력적 성향이나 혹은 과도한 두려움에 짓눌린 채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책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자아는 잘나고 싶어한다는 점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이를 먹은 후 자아를 성장시키고 싶다면 잘나게 살면 된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어른이 되었다는 점이 바로 이때 매우 유리하다. 뭐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 시절엔 모두 부모의 통제를 받았지만, 이젠 돈부터도 자유롭다.

 

가장 먼저 육체적 변화를 겪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확실하게 자신이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라면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사서 입고, 남자라면 운동을 해서 몸을 가꾸는 것이 좋다. 물론 반대로 해도 문제는 없지만, 매우 비효율적이다. 성 정체성에 맞는 것을 할 때 훨씬 효과가 좋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 투자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실 어른이 되어서 성장하기 시작하는 자아에게 좋은 길을 만들어 주는 과정이긴 하다. 하지만 결국 잘나고 싶어서 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이다. '자기애', 이것이 바로 나이를 먹고 자아를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렇게 자신을 좀 더 예쁘고, 좀 더 멋있게 꾸미게 되면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자신감의 주체가 바로 자아이다.

 


그리고 이런 자신감은 이후 또 다른 시도들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공부를 한다든지, 뭔가를 배운다든지,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한다든지 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결과라고 해도 두려움에 의해 자아가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선천적으로 욕망이 적어서 자아가 성장하지 못한 경우에 비해서 훨씬 좋지 않다. 그럼에도 장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어른이 되어서라도 자아를 제대로 성장시킬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그 누구보다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이다. 공감하고, 이해하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자아를 성장시키는 단계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식적으로 해낼 수 있다면, 그때는 나중에 새로운 기회가 온다자아는 성장 후 깊은 성찰을 통해 성숙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린 시절에 무의식 상태에서 자아가 성장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럴 기회가 거의 없다. 자아와 너무 오랫동안 함께 했기 때문에, 그 자아의 존재를 바로 자기 자신으로 느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새롭게 자아를 성장시킨 사람은, 그 존재와 분리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없었던 것이 생겼으니 당연히 그렇다.

 

대신 용기를 내야 한다. 현재 자신이 가진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힘든 과정이다. 자기 부정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해야 한다그것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꾸미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매 순간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힘든 과정이지만, 좋은 기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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