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아는 것, 이해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

아이루다 2017. 10. 14. 09:19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통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운전을 하는 운전자이든 아니면 그냥 보행자의 입장이든 상관없이 사거리를 지날 때면 신호등을 제대로 보고 건너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냥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그렇게 신호등의 신호를 왜 그렇게 지켜야 할까? , 아주 쉬운 질문이다. 답은 그래야 안전하니까 그렇다.

 

그런데 정말로 잘 생각해보자. 우리는 정말로 안전하기 위해서 신호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주입되어서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

 

어린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횡단보도를 건너는 법을 교육받는다. 손을 들고 건너기도 한다. 애들이 그러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부모나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교육하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모든 아이는 점점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될수록 손은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반복적 교육효과에 의해서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녹색 불을 확인하고 건넌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늦은 시간이라 차가 없거나, 좁은 도로에 나있는 횡단보도이거나, 아주 급한 일이 있거나, 횡단보도가 너무 멀리 있을 경우 지키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러다 보니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차를 몰고 가다가 사람을 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걷다가 차에 치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운 좋게 사고가 나질 않더라도 무척 화가 난다. 놀랐기 때문이다. 순간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통 신호를 지키지 않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생겨나고 할 수만 있다면 한마디라도 하려고 한다. 신호 좀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무심결에 하는 말, '신호 좀 똑바로 보고 다니라'는 그 말이 가진 진짜 의미가 무엇일까? 과연 우리는 정말로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건널목을 건널 때 신호를 지켜야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아는 것' 단계이다.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모르던 것에서 아는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그런데 지식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냥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용법만 알아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쓸 때, 냉장고에 음식을 넣으면 오래 보관이 된다는 것만 알면 된다. 냉장고가 왜 차가울 수 있는지에 대한 원리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가끔 이런 아는 것이 이해하는 단계로 변화될 때가 있다. 세상을 좀 더 살다가 보면 혹은 어른이 되어서 운전을 하다가 보면 가끔 위험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 자신이 위험해지기도 하고, 누군가를 위험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잦은 교통사고 사건에 대한 소식도 듣는다. 주변 사람들 중에서 죽은 사람도 생기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점점 경험이 쌓이면서 어른이 되다 보면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배웠던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남들에게 꾸준히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도 하고, 자신이 아이를 키울 때는 그 아이에게 그것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가르치기도 한다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는 단계에서 이해를 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그리고 다음 단계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것은 보통 아주 좋지 않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 자신이나 혹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실제로 사고를 당해서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 교통질서를 지키는 일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 이해의 단계에서 개인적 경험이 더해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받아들임의 단계가 된다. 그래서 결국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이 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서 지키는 것도 아니고,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며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닌, 그저 자신이나 소중한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임을 깊게 받아들인다.

 

아는 단계에서는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신호를 위반할 수 있다. 단순히 알기 때문이다. 이해의 단계에서는 신호를 최대한 지키지만, 그것은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받아들임의 단계에서는 살기 위해서 반드시 지킨다.

 

무엇인가를 아는 것, 그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세 단계의 변화는 인간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흐름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렇다.

 

또 다른 예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이다. 하지만 그저 지식에 불과하다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중한 사람, 즉 자신의 아내나 남편, 자식을 먼저 보냈을 때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정한 받아들임이 일어난다.

 

이것은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란 것이 정말로 어떤 의미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이 슬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주변 사람들의 눈물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이를 잃어본 사람만이 진짜로 그 슬픔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면 절대 모를 것이라고 대꾸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잘 아는 것만으로 그것을 이해한 듯, 이해한 것만으로 받아들인 듯 행세한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그저 아는 것을 받아들인 냥 굴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우울한 날이면 이 넓은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덧없음을 말하면서 삶의 무의미성을 중얼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우주가 넓다는 것만 알고, 인간이 사는 땅덩어리가 좁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진정으로 자신이 의미가 없음은 전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가 누군가 갑자기 뒤통수를 치면, 왜 때리냐고 화를 낸다. 아무런 무의미한 존재를 또 다른 무의미한 존재가 쳤을 뿐인데, 화를 낸다.

 

길에 있는 돌멩이를 발로 찼다고 해서 돌멩이가 화를 내지는 않는다.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정말로 자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누가 자신을 죽여도 그냥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누가 그러겠는가? 삶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곧잘 좋은 말들을 듣는다. 하지만 사실 사람들이 아는 좋은 말들은 대부분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해만 해도 그 좋은 말들이 담고 있는 것들이 정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 말들이 정말로 깊고 오랜 생각들을 통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알고만 있는 우리들은 그런 말들을 그냥 흉내내면서 마치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척 군다.

 

사람이라면 가능하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알기는 안다하지만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별로 없다그래서 정작 선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선하게 사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어떤 의도가 아닌, 결과임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선하게 사는 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최대한 선하게 살지 않으면 인간 사회 자체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 자신을 포함한 사회 자체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선하게 살아야 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해 온 이유가 바로 서로에게 선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선함에 대한 이해의 단계이다. 선함은 개인적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니 사회는 끝없이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구분 지어서 주입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선함은 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니 그것이 선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임의 단계가 된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다 보니 도덕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무엇인가가 의도하고 목적이 된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는 언제고 버려질 수 있다. ,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불완전하다. 선함이 목적이 된다면 선과 악은 상황에 따라서 금세 뒤집힌다.

 

하지만 그것이 결과라면 달라진다. 결과는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과정이 바뀌지 않는 한, 달라질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저 욕심을 줄이면 자연스럽게 선하게 살게 된다. 그렇게 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도덕적으로 살게 된다. 욕심이 적은데 왜 남에게 나쁜 짓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선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옳은 것인 것만을 알고 끝난다. 선함이 얼마나 중요한 작용을 하는지 또한 선함이 결국엔 결과임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용기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용기가 생겨난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용기를 그저 아는 것이다. 용기를 이해하려면 과연 용기가 왜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원래 비겁하기 때문이다. , 겁이 많으니 단순히 집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이고, 인간이 용기 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겁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용기는 바로 자신이 한없는 겁쟁이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비판하지 않고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진정한 선함은 자신이 이기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지막 단계인 받아들임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진정으로 자신이 비겁하다는 것을, 자신이 이기적이란 것을 인정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누구나 자신은 조금이라도 더 용기 있다고 믿고, 적어도 남들만큼은 이타적이라는 믿음이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받아들인 척 하지만, 언제라도 누군가 비겁하다고 비웃거나, 누군가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면 그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저 아는 것 단계를 받아들인 단계라고 착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비겁한 모습을 보거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비웃거나 비난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그 사람이 아닌, 자신을 비웃는 것이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용서하지 못했고,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모습이 타인에게 보일 때마다, 마치 자신을 보는 듯 하니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늘 자기 자신에 대한 비웃음과 비난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타인에게도 상처가 되고,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가 된다. 용서하지 못한 자신은 끝없이 타인에게 형상화되어 나타나며 그로 인해서 끝없이 주변 사람들을 비난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누구의 아픔을 제대로 공감해줄 수 있을까? 누구의 비겁함을 감싸 안아줄 수 있을까? 누구의 이기심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다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매일 이것을 반복한다. 자신이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끝없는 상처를 입히고 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아는 것에서 이해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결국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나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어떤 식으로든 간접 경험들이 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받아들임은 직접적 경험으로만 가능하기에 쉽지 않다.

 

그럼에도 깊은 성찰을 통해서 반드시 경험하지 않고도 받아들임이 일어날 수 있다. 사실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꼭 찍어서 먹어봐야 할 필요는 없다.

 

간접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에 걸친 생각과 성찰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매일 살아가며 그 과정 중에서 끝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런 모습들은 대부분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의 단계에 머무른다. 행복의 방법론만이 난무한다.

 

하지만 거기엔 행복에 대한 어떤 이해도 거의 없으며, 더욱이 행복에 대한 받아들임은 거의 전무하다. 그렇게나 중요한 행복에 대한 부족한 이해는 결국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 살아가고 있지만, 삶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그렇게 죽음의 의미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단 한번뿐인 삶이라고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삶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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