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형식주의자

아이루다 2017. 10. 22. 09:08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


스승이 대답했다.


“물처럼 살아야 한다.


제자가 다시 물었다.


“제자, 아둔해서 다시 묻습니다. 물처럼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요?


스승이 대답했다.


“물은 그 어떤 모양에 담겨도 모두 적응한다. 물은 자신을 담은 용기에 따라 끝없이 그 모양이 변하지만, 언제라도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물은 스스로 형식이 되질 않는다. 또한 물은 찢어질 수 없으며, 찔릴 수 없다. 그래서 물은 결코 상처받지 않는다. 그러니 물처럼 산다는 것은, 그 어떤 형식이 없는 삶을 의미한다.


제자가 대답했다.


“네, 스승님의 말씀 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나 다른 사람들은 물처럼 살지 못할까요?


스승이 대답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 두렵기에 단단해지고 싶어한다. 그래서 물이 두려움을 갖게 되면 얼음이 된다단단해지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형식이 되고,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며, 그래서 바뀔 수도 없다. 또한 언제라도 파괴될 수 있으며, 찔릴 수 있다. 그래서 물은 부드럽지만 상처받지 않고, 얼음은 단단하지만 상처를 받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이란 과정은 끝없는 불완전함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함의 원인은 바로 두려움이며, 두려움은 살고 싶다는 욕구로부터 시작되는 생명체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원래 모든 생명체는 죽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끝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체의 본능이라고 해도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대한 완전해지고 싶어 한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돈을 벌고, 관계를 맺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운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완벽하게 안전해질 수는 없다. 오히려 나이를 먹어서 늙기 때문에 점점 더 불안해지기만 한다.

 

그런데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방법이 있는 듯 보이긴 한다. 그것은 바로 어떤 형식이 되는 것이다. 안전해 보이는 어떤 고정된 단단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은 원래 그 어떤 형체도 없다. 그래서 물은 컵에 들어가면 컵 모양이 되고, 병 속에 들어가면 병 모양이 된다. 물은 어떤 용기에 들어가도 그 모양이 된다. 그래서 물은 불안해 보인다. 원래 가진 고정된 모습이 없으니 어떤 일관성도 없고 신념이나 믿음은 더더욱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만약 물이 어떤 형태의 용기에 들어간 후, 안전함을 느껴서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하게 되면 어떨까? 아마도 물은 단단해진 듯 보일 수도 있다. 그 모양에 일관성이 있고 신념과 믿음이 생긴 듯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물은 정말로 완전해질 것일까? 결국 아니다. 처음엔 그렇겠지만, 움직임을 멈춘 물은 결국 썩기 시작한다. 비록 겉은 단단해졌지만, 내면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 이것은 일종의 은유적 표현이지만, 사람도 다를 바가 없다.

 

모든 고정된 것들은 썩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불안함을 느낀 사람들은 자신을 어딘가 고정된 곳에 정착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강한 바람이 불어서 자신의 몸이 날아갈 상황이 될 때면, 몸을 어딘가에 단단히 고정시켜놔야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야 강한 바람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바람이 멈출 때이다. 삶은 늘 바람만 부는 것이 아니다. 좋은 날도 있다. 하지만 이미 어딘가 몸을 단단히 고정시켜 놓았기에 화창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어떤 날에도 계속 그곳에 묶여 있어야 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에 자신을 묶을까? 어떤 것에 묶어서 자신을 고정시켜야 스스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까?

 

어떤 이들은 종교에, 어떤 이들은 가족에, 어떤 이들은 인간관계에, 어떤 이들은 돈에, 어떤 이들은 열정에, 어떤 이들은 취미에, 어떤 이들은 단절에, 어떤 이들은 직업에, 어떤 이들은 특정한 사상에, 어떤 이들은 신념에, 어떤 이들은 다양한 가치에 자신을 묶는다.

 


그리고 거기에 단단하게 고정될 수록 자신이 더 안전해진다고 믿고 살아간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고정하길 원한다면, 거기엔 수 많은 도구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이 땅에 살았던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그 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불안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고정된 것을 찾는 일은 셀 수 없을만큼 많이 시도되었고, 그래서 그것들 중에 사람들에게 선택 받은 것들이 충분히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다.

 

사실 이런 고정화 과정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린아이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될 때 생각보다 많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분간 고정되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는 분명히 있다. 흔들림이 너무 심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고정되지만 그래도 뭔가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 낫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 고정되면 거기에 안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 알기 위해서는, 누군나 자신을 묶여 있는 그 대상을 바라봐야 한다. 물론 그것 조차도 운명으로 믿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실 물이 컵 모양이 될지, 병 모양이 될지는 아주 우연히 결정된 것이다.

 

, 자신이 고정화된 과정을 돌이켜 보면, 자신이 어린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될 때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것에 강한 신뢰를 느껴서 자신을 고정화 시키게 되었다는 점을 기억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고정화가 너무 심하게 진행되었다면, 그 고정화 대상을 자신과 일체화 시키게 된다. 아주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어떤 것에 자신을 최대한 묶은 후, 그것과 자신은 분리가 불가능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강할수록 불안함은 줄어든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저 그 대상의 부속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어떤 식으로든 고정되어 그 안에서 큰 안정감을 느끼게 되면, 그 안에서 절대로 빠져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 다시 풀려난다는 것은 고정화 되기 전에 느꼈던 그 두려움을, 아니 이제는 안정감까지 경험했기 때문에,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대상과 자신을 묶고 있는 굵은 밧줄을 끝없이 점검하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우연히 자신이 머무르게 된 곳을 평생 동안 신뢰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다음 세대에도 가르친다. 너 역시도 두려우니, 내가 묶인 대상에 너도 단단히 묶으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단단한 갑옷과 같다. 단단한 갑옷은 매우 효과적인 방어수단이어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단단한 갑옷은 외부와 자신을 단절시키고 만다.

 

다른 사람들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지만, 자신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사람들이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삶의 과정 속에서 끝없이 상처도 받고 배신도 당한다. 그래서 각자 다들 자신만의 갑옷을 만든다. 그래야만 버텨진다. 하지만 이 단단한 갑옷으로 인해서 결국 서로가 자꾸 분리가 된다. 같이 살아야 더 안전하고 더 행복한데, 자꾸 각자 사이에 틈이 생기고 벌어진다.

 

그나마 젊은 시절에는 각자 유용성이 있고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억지로라도 가깝게 지낸다. 해야 할 일들도 많다. 돈도 벌어야 하고, 집안 일도 해야 한다. 아이도 키워야 하고, 시간이 되면 운동도 하고 뭔가 배우러 다니기도 해야 한다. 그러니 시간이 오히려 부족하다.

 

하지만 그 후로 나이를 더 먹게 되면, 점점 필요성과 서로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부족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존재의 유용성이 떨어지게 되면 점점 시간만 더 남는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그렇게나 부족했던 시간이 이제는 감당이 안 된다.

 

하지만 이미 단단한 갑옷으로 자신의 몸을 무장하고 살아 온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이제는 그 갑옷을 벗어나 다시 원래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 된다. 그 갑옷은 이미 자신의 정체성이 되었고, 그 갑옷은 이미 자신의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최초에 그 갑옷을 만든 이유가 불안해서 그렀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그 형태만 남은 '형식주의자' 가 되고 만다. 그리고 서로 그렇게 분리가 된 사람들은, 각자 서로가 잘 이해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갑옷에 대해서 끝없이 이야기를 한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다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무엇을 해봐야 한다고 서로에게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대화는 끝없이 겉돌 뿐이다. 갑옷 안에서 하는 말들은 갑옷을 통과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어 버리며, 또한 갑옷을 통해 듣는 말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로 재해석되어서 들릴 뿐이다.

 

이런 식으로 갑옷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이후 경험하는 모든 것은 갑옷을 좀 더 견고하게 만드는 쪽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다들 남는 시간은 보내야 하기에 끝없이 이야기를 한다. 이때는 상대나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는지 여부는 거의 관심이 없다. 자신이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남들이 하는 말도 듣질 않는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는 그저 서로간의 형평성을 위해 필요한 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니 말이 별로 없이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인기가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둘 중 하나가 되고 만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허공에 날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거나,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 버려서 견디질 못하고 결국 도망친다.

 

그 누구도 이것을 피해갈 수 없다. 지금은 그나마 필요한 존재이고, 유능하기도 하고, 바쁜 일들이 많기 때문에 넘기겠지만, 언젠가는 누구나 늙기 때문에 그런 시절이 오기 마련이다.

 

물론 늙어서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돌이켜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갑옷, 자신을 스스로 묶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것들은 어리고 잘 모르던 시절에 흔들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잠시 필요했던 도구였다. 물이 어딘가를 이동할 때 잠시 컵에 담기는 것처럼 말이다.

 

일단 이동이 끝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수준의 지식과 지혜를 갖추는 순간 갑옷은, 단단하게 고정한 어떤 것은, 컵은, 벗거나 벗어나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 지금 이 순간 다시 돌이켜보자.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불안함이었다. 두려움이었다. 살고 싶어서 그랬다. 형체가 없으니 불안해서 단단한 형체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도움은 많이 되었다. 어딘가 고정되었기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애벌레가 고치를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고정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비로 변태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종 목적은 고정이 아닌, 날개를 가진 자유로운 몸이었다. 하지만 고치 안에서 안정된 행복을 경험한 이들은 영원히 그 고치 안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 안에 만들어 진 형식은 어느새 감옥이 되어 버리고 만다.

 

어떤 이는 세상을 오직 이성과 논리로 해석한다.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신의 의지로 해석한다.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운으로 해석한다. 어떤 이들은 천국을 믿고 어떤 이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돈이 최고라고 믿고, 어떤 이들은 관계가 최고라고 믿는다.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은 오직 과학적 사고에 의해서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고, 어떤 이들은 그런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은 모두 사기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무당의 점을 믿고, 어떤 이들은 미신이라고 배척한다. 어떤 이들은 외계인이 있다고 믿고, 어떤 이들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몇 명의 존재들이 있다는 음모론을 믿고, 어떤 이들은 말도 안 된다며 헛소리로 치부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세차만 하면 비가 온다고 믿고, 어떤 이들은 아침에 똥차를 보면 복권을 사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이는 혈액형 성격을 신봉하고, 어떤 이는 손금을 보고 삶을 예측 한다. 또한 어떤 이는 관상을 보고, 어떤 이는 사주팔자를 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사실 그 수 많은 것들을 그렇게 확신 있게 믿거나 거부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이미 형식화 되어서 그 안에서 고정되어 있다는 가장 확실한 사실 하나도 제대로 인식도 못하고 있다.

 

심지어 풍족함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먹는 이유가 살기 위해서 먹고 있음을 잊었다. 무엇인가를 먹는 것은 맛있고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잊어 먹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맛없는 것만 먹고 사느니, 그냥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매일 신에게 기도를 하지만, 정작 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매일 지식을 쌓고 세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도대체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잊었다.

 

살아야 하니까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삶이 되었고, 불안함을 견디고자 만들어 놓은 갑옷은 이제는 그것을 벗고는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삶이 되어 버렸다.

 

자신을 안전하고자 만든 형식에 다들 지배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각자는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형식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경험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매일 자유의 소중함을 말하지만, 정작 자유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며, 실제로 자유가 주어지면 두려움으로 인해 금세 다시 자시의 형식 속으로 되돌아 가고 만다.

 

매일 심한 바람이 부는 날이 계속된다면 이것은 현명한 결정이리라. 하지만 삶은 언제고 맑고 따뜻한 봄도, 화창한 여름도, 하늘이 높고 상쾌한 가을도, 흰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겨울도 온다.

 

봄에는 소풍도 가고, 여름엔 바다도 가고, 가을엔 단풍 물든 산에도 오르고, 겨울엔 눈사람도 만들려면 자신을 단단하게 고정시켜주고 있다고 믿고 있던 밧줄이, 사실은 자신을 그 어디에도 가질 못하게 얽매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고치 안에 안전함에 머무르게 된 애벌레는 결코 나비의 자유로움을 경험하지 못한다. 또한 그 고치 안의 안전함조차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지루해진 애벌레는 결국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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