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두려움 던지기

아이루다 2017. 11. 9. 08:24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물론 요즘은 과거에 비해서 너무도 많이 안전해진 까닭에그 사실을 잊은 사람들이 태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잊어와서 부정하더라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이유 하나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살고 싶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세상의 어떤 두려움도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던 사람일지라도 당장 누군가 머리에 총을 겨누고 금세라도 쏠 기세라면, 자신의 생애 동안 단 한번도 상상 할 수 없었던 극한의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마도 이성을 잃고 동물처럼 울부짖을지도 모른다. 살려달라고 싹싹 빌면서 애원할지도 모른다. 바지에 오줌을 싸거나 끝내 실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이는 아주 소수이다. 그리고 좋은 일도 아니다또한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의 경우엔 대부분 트라우마가 생긴다. 너무도 강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상처가 남는 것이다.

 

삶의 여정은 끝없이 두려움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이다. 하지만 평소엔 그것을 잊고 산다. 죽음은 자신에게는 언제나 아주 먼 일이다.

 

그렇지만 운이 없게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순간이 오면 정신이 견뎌내질 못하고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정말로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사람들이 가진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고 나뉜다. 하나는 본인이 감당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두려움을 다른 존재에게 던지는 방법이다.

 

자신이 감당하는 것은 일단 두려움 앞에 섰기 때문에 힘들긴 하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만 할 수 있다면 많은 것이 좋다. 자유롭고, 능동적이며,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다른 존재에게 두려움을 던지는 것은 당장 좋다. 자신의 내면의 두려움을 스스로 감당할 필요가 없기에 맑고 명랑하게 살 수 있다. 단지 그로 인해 삶의 한계가 존재하고, 수동적이고, 종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던지고 싶어한다. 그것이 일단 당장은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임에서도 주최자가 되는 것과 참여자로 참가하는 것과의 차이와 같다. 

 

주최자는 모임을 성공적으로 끝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부담이 바로 두려움의 일종이다. 하지만 참여자는 주최자에게 일임을 했기 때문에 다른 입장이 된다. 그리고 만약 모임이 의도한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저 불만만 늘어 놓으면 끝난다. 하지만 주최자는 그것을 다 감당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다른 존재에게 던지는 것은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던질수만 있다면 던지려고 한다. 하지만 이 세상은 모두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던지려고 해도 받을 사람이 없으면 결국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즉,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주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두려움과 맞서게 된다.

 

인간은 어린 시절에 가장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당연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연약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갓 태어난 아이는 그 두려움으로 인해 끝없이 운다. 그래서 오래 자야 한다. 어린 시절에 두려움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이가 조금 자라면 자의식을 생기기 시작한다.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자의식은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타인들과 분리된 자신은 좋지만, 그로 인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큰 문제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는 대부분 부모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부모에게 던진다. 그리고 부모는 그런 아이의 두려움을 받아준다.

 

자의식을 갖고 경쟁을 통해 에고를 성장시키기 시작한 아이들은, 자신의 능력에 비해서 두려움의 크기가 줄어든 현상이 생겨난다. 부모에게 두려움을 던졌으니 책임은 줄어들고 권리만 늘어난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당돌하다. 그리고 용감하다. 흥겹고 열정적이다. 부모에게 두려움을 던졌기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또한 내면에서 매일매일 자라고 있는 에고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

 

그래서 높은 절벽에서 뛰기도 하고, 가수를 따라 하면서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뭐든 잘하고 싶어서 두려움을 잊는다. 그래서 아이들일 때 뭐든 배우는 것이 좋다고 한다. 자신의 두려움을 부모에게 맡겨 놨기에 뭐든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언제라도 크게 놀래거나 다치면 금세 부모의 옆으로 와서 울먹인다. 자신을 안정시켜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엄마는 그런 아이를 다독거려서 안정시킨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그럴 수 있는 행운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유로 인해서 부모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던지지 못하는 아이는, 그 어린 나이부터 자신이 스스로 두려움을 감당해야 한다.

 

아예 부모가 없는 고아이거나, 부모가 있더라도 인성 문제로 인해서 부모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자녀일 경우가 그렇다. 혹은 부모가 어느 정도 정상적이라고 해도 자식들을 편애하거나, 아이의 두려움을 오직 엄격하게만 다루는 부모의 자식들도 그렇다안타깝지만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서 부모 모두 맞벌이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두려움을 제대로 받아주지 못하는 경우도 그렇게 된다.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던지지 못하는 것에는 이것들 말고도 아주 많은 이유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 부모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던지지 못한 아이들은 어쩔 수 없는 정신적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결코 자신의 두려움을 감당할 수도, 감당해서도 안 되는 시기에 그것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은 에고가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다. 경쟁은 고사하고 혼자 사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 특유의 명랑함과 밝음이 없는 아이가 된다. 자신의 두려움을 받아줄 사람이 없기에 내면이 늘 불안해서 그렇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심하게 삐뚤어진다. 어떤 아이들은 각종 정신 질환에 시달리기도 한다. 어떤 아이들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퇴화된다. 그래서 아주 무딘 사람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 특징은 남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 심해질 경우 사이코패스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슬프지만 미래는 더욱 더 좋지 않다. 두려움을 반드시 던져야 할 시기에 제대로 던지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렇다면 어른이 되면 뭐가 다를까? 물론 달라지긴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컸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자신의 두려움을 이제 스스로 감당해야 함을 뜻한다.

 

이것은 여러 가지 실제적으로 증명이 된다. 일단 경제력이다. ,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독립을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는다. 그런데 이때 아주 근본적인 변화가 하나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을 던지던 존재에서 두려움을 받는 존재로의 변화이다.


누구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순간이 오면, 이제는 거꾸로 자신이 낳은 아이의 두려움을 받아줘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때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스스로 감당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결혼을 한 후에는 남편에게 던졌는데, 아이를 낳게 되면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아이의 두려움은 거의 대부분 엄마에게 던져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여자들은 가장 불안한 상태에 놓인다. 아이의 두려움을 감당해줘야 하기 때문에, 우울증, 불안증과 같은 수 많은 정서적 문제들이 나타나곤 한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꽤나 어린 시절부터 배우는 편이다. 그래서 물리적인 독립은 일찍 이뤄진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누군가에게 던졌어야 할 두려움을 일찍부터 감당해야 하기에 남자는 여자에 비해서 세상을 훨씬 투쟁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 생존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런 식으로 두려움에 관해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많은 차이를 가진다. 그로 인해서 남자들의 세계는 주로 수직적 구조를 이루고 어울려 사는 삶에 관심이 많아진다. 서로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자들의 세계는 수평적 구조를 이루며 각자가 잘 사는 것에 관심이 많다.

  

더해서 두려움을 던질 수 있는 대상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존재가 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종교들에서 말하고 있는 신의 존재이다.

 

사람들을 자신들의 믿음을 통해 자신의 본질적 두려움을 신에게 던진다. 자신의 모든 운명을 신이 주관한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삶에 닥칠 수 많은 문제들을 훨씬 덜 걱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나름대로 현명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사실 불필요한 걱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걱정은 안 할 수 있다면 안 하는 것이 좋다.

 

그러다 보니 기본적으로 스스로 두려움을 감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여자들이 종교에 훨씬 더 많이 믿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한 번 믿게 되면 광신의 단계로 가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종교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신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믿어서라기 보다는 신에게 던져놨던 자신의 두려움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 종교를 벗어나는 순간, 던져 놓은 두려움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서 믿음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설령 그 종교가 이상하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판결을 받더라도 결코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두려움을 감당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얼마나 강한가, 얼마나 똑똑한가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 운명, 즉 죽음으로부터 출발한 감정이기 때문에, 누구나 동일하게 느낀다.

 

그래서 이 두려움을 견뎌내는 힘은 주로 책임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잘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 둘이 주로 두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이 된다. 마지막 하나를 더 넣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만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힘도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려움을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온전히 감당하고 사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신에게 두려움을 던지고 살아간다. 그리고는 편안함 속에서 행복을 누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하지만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던졌다는 말 자체가 바로 그 대상에게 종속적 존재가 됨을 의미하기에, 그것에 대해서 깊은 생각은 해봐야 한다. 물론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의 운명에 자신의 운명을 묶어 버린 상황이다. 그러니 그 존재가 조금만 흔들려도 자신은 지진이 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평생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된다. 어쩌면 단 한 차례도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다 죽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운이 좋다면,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행복하기  (0) 2017.11.18
인정받기를 위한 두 가지 통로  (0) 2017.11.15
사랑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0) 2017.11.03
용서의 종류  (0) 2017.11.01
자존감 키우기  (0) 2017.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