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완전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

아이루다 2017. 9. 20. 08:27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가수 안치환씨가 부른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에 나오는 가사의 일부분이다. 사실 이 노래의 전체 가사 흐름은 그렇지 않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런 연결을 한다. 그것은 바로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외진 곳에서 살아, 누구 하나 찾는 이 없이 수년을 보낸 사람이라면, 그저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반가울 수 있다. 꼭 외진 곳에 산다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도심에서도 그렇다.

 

어떤 면에서 군중 속의 고독은 그 어떤 외로움보다 더욱 더 견뎌내기 힘들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느껴지는 외로움은 더할 나위가 없다. 이소라씨의 노래 '시시콜콜한 이야기' 에 나오는 '갤 만나고부터 못 견디게 외로워' 라는 가사가 그것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사람을 만났는데, 오히려 외로움을 느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외로움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고, 친구를 만나고, 수 많은 활동을 하지만 바쁜 하루가 지나고 저녁에 잠에 들 때가 되면 문득 공허함이 느껴진다. 마치 마음 한 구석에 늘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본다. 무엇인가를 듣는다. 무엇인가를 읽는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렇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사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충분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살고, 어떨 때는 혼자 좀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도 그렇다.

 

하지만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결국 충만함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온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이 온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누구나 삶을 완전하게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과 온전한 것은 단 한글자만 다를 뿐이지만, 품고 있는 의미는 서로 너무 다르다.

 

완전해지고자 하는 노력은 홀로 서기를 의미한다. 완전해진 자는 혼자 살 수 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롯이 혼자 살 수 있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뭐든지 잘하고, 뭐든지 다 가지고 있다면 과연 다른 이들이 필요할까?

 

완전함의 반대말인 불완전함이 가진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종속적이며 언제든 어떤 문제에 노출될 수 있는 불안함을 품고 있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완벽해지고자 한다. 완벽주의자라는, 특정 무리를 일컫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

 

인간이라면 모든 이들이 완벽주의를 꿈꾼다. 이것은 인간의 영원한 희망이다. 그럼에도 완벽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따로 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꿈도 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수의 잘난 사람들만이 그나마 완벽주의를 꿈꾼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죽음이 존재하는 한, 완벽하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의미하다. 오직 죽음을 극복할 때 완벽주의는 실현 가능하다. 설령 죽음을 넘어 섰다고 해도 인간의 근본이 감정에 있는 한, 완벽주의는 언제든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더해서 완벽주의는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다. 완벽해질수록 타인의 가치는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홀로 설 수 있는데 왜 다른 이들과 어렵게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까? 돈이 많아질수록 관계가 줄어드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물론 더 많은 사회적인 관계가 늘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그저 형식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관계는 불안함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그런데 완벽해진다는 것은, 돈이 아주 많아진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함을 관계 이외에 다른 곳에서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완벽해지고 싶어하고 돈이 많고 싶어한다.

 

사실 그러면 좋을 것도 같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불가능하다. 처절하게 불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것의 답의 바로 온전함에 있다. , 우리는 완벽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살아가야 한다.

 

온전하다는 것은 불안전한 각자가 서로에게 기대어 맞춰지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퍼즐 조각이다. 그래서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모여서 적절한 위치에 맞게 잘 배치되면 각자가 품고 있던 숨겨진 놀라운 그림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완전해져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해지기 위해 함께 사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완전해지길 바란다. 그런데 그것은 조화, 어울림, 배려, 용서, 관용,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잘남, 차별, 우월감, 혐오이다.

 

완전하길 바라지만, 완전해지지 못하기에 우리는 그저 서로 멀어지고만 말았다. 서로가 완전해져서 멀어져야 하는데, 완전해지길 너무도 욕망하기에 우선 멀어지기부터 하고 말았다. 완전함에 있어서 멀어짐은 결과이어야 하는데, 그것의 조건이 되고 말았다.

 

정현종이란 이름을 가진 시인은 이런 멀어짐을  "사람들 사이엔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온전해지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데, 우리는 모두 각자 섬이 되어 버렸다그것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우리는 모두 스스로 각자의 의지에 의해서 고립되어 있다.

 

각자가 고슴도치가 되어서 삐쭉하게 바늘을 뻣뻣하게 세우고는 서로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완전한 형태로 만들고자 했다.

 

예전에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켜줘야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예전에 누군가 등을 지켜주었기에 앞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고슴도치가 된 후로부터는 이젠 그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게 되고 말았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얼굴이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땅에 밀착시킨 채, 그 어떤 틈도 보이질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더 완전해졌다. 하지만 조금씩 덜 온전해지고 말았다.

 

요즘은 관계조차도 완전함을 위해서 존재한다. 어느 정도 안전해진 이런 세상에서 관계는 원래 목적이었던 각자의 불안함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재미를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이제 관계는 완전해진 후, 남는 시간을 잘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필요한 좋은 도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언제든 선택 가능하며, 언제든 버릴 수도 있는 것이 되었다.

 

끈끈함의 부담감이 줄어든 관계는 더 많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은 더 많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럴수록 점점 더 행복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관계를 통해 얻고자 한 것, 그 온전함에 대한 절대적 필요성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각자의 머리 속에서는 아득하게 잊혀지고 말았지만, 깊게 숨겨져 있을 뿐, 언제든지 틈만 나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곤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각자가 늦은 저녁 시간 잠자기 전에 불현듯 느끼는 익숙하고도 낯선 감정의 정체이다. 그 감정은 온전해지지 못한 자들의 숨겨진 불안함인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사람들은 이 불안함을 착각하고는 다른 형태의 충만함을 추구한다. 멀리 여행을 떠나고, 취미 활동을 더욱 더 열심히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하지만 각자의 내면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바로 온전해진 충만함이다. 여행을 떠나도 어디를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떠나는 것이 중요하며, 설령 혼자 가더라도 낯선 장소에서 누군가의 만남이 필요하다. 취미활동을 해도, 책을 읽어도 그것 자체로는 그저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게 된다. 그것이 온전해지려면 결국 공유하고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다.


온전함을 필요로 하는 것에는 남자 여자 차이도 없고, 나이의 많고 적음도 차이도 없고, 체중이나 키의 차이도 없고, 돈이 많고 적음의 차이도 없다.

 

인간에게 죽음이 공평하듯이 온전함에 대한 욕구 역시 모두에게 동등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완전해지길 바라기에 온전함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는 이젠 너무도 풀기 힘든 숙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동네 아이들 모두가 놀이터에 나와서 노는 시절엔 언제든 놀이터에 나오기만 하면 되었다. 설령 아무도 없어도 잠시 기다리면 옆집 철수, 건넛집 영희가 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놀이터에 나오질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한 명씩 한 명씩 나오질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곳에 가도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오히려 더 외롭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있는 것은 집에서 혼자 있는 것보다도 더 쓸쓸하다.

 

그럼에도 가끔 그곳에 나오는 아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 역시도 우리들처럼 예전에 함께 모여서 놀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마음 잡고 하루 종일 기다릴 각오로 그곳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분명 바보 같은 짓일 것이다. 언제나 완벽하게 채워지길 바라는 세상에서 그런 행동은 한없이 어리석은 짓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단절되어 완전해지지도 온전해지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진정하게 필요한 것은 이런 어리석음일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온전해지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각자 너무도 깊이 두려워하고 있어서 도대체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밖을 향했던 가시를 거두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서로 마주보고는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나도 너도 쉽게 그런 용기가 생겨나질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시는 점점 무뎌져 갈 것이고, 그로 인해서 이제는 온전해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점점 불완전하게 변해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늙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여력이 있을 때 스스로 가시를 거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서로 만나 조금이라도 더 온전해졌으면 좋겠다.

 

이것이 각자가 밟아 지나갈 삶의 궤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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