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수고했어 오늘도.

아이루다 2017. 10. 18. 11:21

 

예전에 봤던 어떤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한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그것은 바로 애니 속 한 인물이 죽기 직전에 술을 한잔 마시면서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 아니었나?' 라는 말하던 장면이다. 제목도, 등장인물의 이름도, 앞뒤 사정도 거의 생각이 나질 않지만, 그냥 그 장면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내가 죽을 때 스스로에게 저 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지금까지 사느라고 정말로 고생했어' 라는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삶을 함께 한 아내에게 '고마워요. 함께 해줘서' 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거의 변화는 없다. 욕구 자체는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도 운이 좋다면 그렇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

 

아는 분이 준 CD에 들어 있는 노래 한 곡이 있다. 계속 듣기만 했는데, 찾아보니 옥상달빛이라는 음악그룹이 부른 노래라고 한다그리고 그 노래의 제목이 바로 '수고했어 오늘도' 이다.

 

이 노래 가사는 나름 어렵다. 이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용을 듣고 있기가 어렵다그것은 너 일수도, 나 일수도 있는 평범한 우리가 스스로를 다독이는 내용이다.

 

삶이란 것은 너무도 예측이 안되기 때문에 또한 의도한 대로 되질 않기 때문에, 우리는 딱히 많은 것들을 바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견디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때마다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보지만, 운이 없을 때는 좌절도 하고, 우울해진다. 상처받고 괴롭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도대체 나는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이런 자책이 시작되면 행복은 멀어지고 불행은 성큼 곁으로 다가온다. 의욕이 사라지고 한없이 처진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지만, 이조차도 쉽지 않다. 탈출조차도 기본적으로 의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을 살아가는 과중 중에서 특히 힘든 시기를 통과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시기이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시기이거나, 각종 공시를 준비하느라 매일 도서관을 갈 때이다.

 

첫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나, 다니던 직장에서 갑작스럽게 정리해고를 당해 먹고 살길을 찾아야 할 때이거나, 장사를 하려고 가게를 열었으나 점점 매출이 떨어지고 결국 가게 월세도 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때이다.

 

갑자기 큰 병에 걸려서 완치의 가능성도 보장받지 못한 채 치료를 해야 할 때이거나, 지겹도록 이어지는 가족과의 관계에 얽혀서 끝없이 삶이 흔들릴 때이거나, 생각하지도 못한 배우자의 부정으로 인해서 이혼을 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 이런 힘든 삶을 통과하면서도 우리가 늘 듣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내가 겪는 모든 문제가 오직 내 잘못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힘든 시간을 통과한 후에 그것에 대해 남는 것은, 그저 고통의 기억뿐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도 역시나 나 혼자만 그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군대를 다녀온 경험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힘들었던 시기이다. 하지만 누구나 군대를 간다는 이유로 인해서, 그 힘든 경험은 '수고했어' 라는 한마디 말을 듣기가 힘들다. 오히려 사회에서는 군인을 그다지 반갑게 보지도 않는다.

 

여자에게 있어서 아이를 키웠던 경험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힘들었던 시기이다. 하지만 누구나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이유로, 그 힘든 시기를 통과할 때 힘들다는 표현을 하면 '너만 애 키우냐?' 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렇게나 개인적으로 힘든 경험들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한다는 이유로, 마치 그것이 당연히 참고 견뎌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사자들도 역시도 자신의 수고스러움을 그런 식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남들 다하는 것을 했는데, 그것이 별 고생이냐 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보고 있더라도 내 손에 난 칼에 벤 상처가 덜 아픈 것은 아니란 점이다. , 다른 사람들도 겪는 고통이라고 해서 내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사회는 끝없이 강요한다. 네가 겪는 고통은 너만 겪는 것이 아니니, 아프고 힘들다는 소리 하지 말고 그 시간이 있으면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각자 개인들은 자신이 겪는 그 힘든 시간을 그저 빨리 통과하기만 기다린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그때를 떠올릴 때면 그저 진저리 칠 뿐, 아무런 위로도 받질 못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래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남들도 다 하는 것을 했으니까, 자신이 겪은 그 고통의 시간들을 그냥 아무것도 아닌, 어디에 가서 고생했다는 소리도 못 할만큼 그렇게 하찮게 취급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인정을 기대한다. 진심이 담긴 수고했다는 평범한 한마디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자신의 수고스러움을 인정받지도 못하고, 스스로 인정해주지도 않는 사람은 결국 그것으로 인해서 고통의 기억은 그저 잊고 싶은 어떤 것이 되고 만다. 더군다나 이것이 끝도 아니다.

 

더 큰 문제가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그 고통을 지금 겪고 있는 사람들의 힘들다는 말에, 아무나 하는 것을 하면서 뭐 그런 유난을 떠냐는 핀잔을 준다. , 이제는 자기 자신이 반대의 입장이 된다.

 

이것은 지금 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 이것은 이렇게 연속적으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분명히 힘든데도 인정받지 못하고, 분명히 힘든 것을 알면서도 위로해주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나 다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너는 왜 못하냐고 조언을 가장한 폭력을 쓴다.

 

물론 버텨야 할 때는 있다. 살다가 보면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할 것들이 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면 아무리 힘들어도 취업공부를 해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몇 년간은 죽을 듯 고생한다. 군대를 가면 몇 십 개월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낸다. 직장을 다니다 보면 못 볼꼴도 많이 본다. 장사를 하다가 보면 별의 별 손님이 다 있다.

 

이런 것들은 살려면 해야 한다. 그런데 살려면 해야 하니 포기하지 않고 살 것이 분명한데, 왜 그렇게 수고했다는 한 마디를 해주는 것이 힘든 것일까? 그런 말을 들어도 우쭐해져서 그만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냥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남들이 했든 말든, 더 힘든 남이 있든 말든, 내가 힘든 것은 힘든 것이고, 남이 힘든 것도 힘든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힘들어서 힘든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간 모두가 수고했다.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영양을 쫓다가 실패한 치타도, 인도에서 바나나를 찾아 먹고 있는 원숭이도, 너무 작아서 잘 눈에 띄지도 않는 수 많은 곤충들도, 개울가에서 서투른 사냥을 하고 있는 하얀 백로들도, 하루 종일 먹이를 찾아 이동하고 있는 작은 뱁새들도,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 마이클씨도,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왕씨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김씨들도 모두 수고 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네가 수고를 했고, 내가 수고를 했다.

 

우리 이제는 서로 얼마만큼이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이뤘는지 묻지 말자. 그냥 하루를 살았으니 수고한 것이다. 살기 위해서 노력했고, 오늘을 살았으니 수고한 것이다.

 

그래서 언제가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그래 이만하면 수고 많이 했다' 라고 하고 떠나면 된다. 그것이 삶이면 된다.